무엇을 하든 힘든 건 비슷하지.
유한한 삶에 있어서 2년 6개월의 군생활은 매우 한정적이었지만, 문득 군 생활과 삶이 비슷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이 힘들면,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가벼우면 몸이 힘들다.
2년 6개월 가까운 시간을 우리나라 지도에서 가장 동쪽, 그리고 가장 북쪽에 위쪽에 위치한 부대에서 보냈었다. 민간인이 쉽게 오고 갈 수 없었던 지역. 북한의 바다가 바로 보이는 위치.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고, 자고 일어나면 철책을 보고 근무를 서고,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과 시간에는 삽질을 하다가, 쪽잠을 자고, 다시 철책을 보며 근무를 서고, 그러기를 반복했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계절의 흐름이 겨울이다 싶더니 여름이 다가왔고, 아직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던 개구리가 철책선을 지지하는 쇳덩어리에 익혀서 죽어있는 모습을 종종 봤었다.
지리적 특징이 그러하다 보니 근무 투입에는 실탄과 수류탄을 들고 근무에 투입되었다. 위험도가 높았다. 그러다 보니 전방 투입 인원 선발 시에 내부적으로 상담을 해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병들은 후방에 잔류하게 되었다.
실탄 소지라는 위험성과, 경계 근무 강도로 인한 몸의 피로는 당시 군 생활에서 정서적 괴롭힘이라는 것을 최소화하게 되었다. 물론, 내부적으로 군기를 잡기 위한 폭력이나 폭행등의 사건은 전혀 없었다.
당시 세대가 변하는 시점이었기에 모든 부대가 그러했다고 생각했었으나, 전역 이후에 나와 비슷한 시점에 군생활을 했던 대학 동기들, 후배들과의 이야기를 나누며 후방부대, 실탄을 소지하지 않은 부대의 경우는 내부적으로 많은 폭력이 있었으며, 정신적 괴롭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군 휴가를 나온 제자들, 조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함께 대학을 다니다가 졸업 이후에 마음에 울림이 와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의 길을 선택한 친구가 있다.
사명감에 목회의 길을 선택했으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사회적 활동에서 오직 신앙의 힘으로 채우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별수 없이 목회자의 길에서 나오게 되었다.
목회자의 길에서 나온 것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영적인 실패도 아니었다.
목회라는 시스템이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것이고 그 나름의 방법으로 여전히 바른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친구는 짧지 않은 시간 장애우 부서를 섬겼었다.
본인 또한 좋지 않은 형편이지만, 목사라는 직업 때문에 없는 살림에도 정장을 입고 다녀야 했고, 반듯한 옷차림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밤낮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어려움을 들어야 했다. 그에게 신앙의 힘이 있었기에 그것을 이겨냈으리라.
가끔 시간을 내서 친구를 만나면 이야기를 하다가도 성도들의 힘들어하는 전화를 받으며 위로해 주던 친구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목회를 그만하게 되고 친구는 노동을 하게 되었다.
"에어컨 청소"라는 기술을 배우러 다니고 있고, 소위 인력사무소를 찾아가서 건설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로 일 하기도 하고, 쿠팡 물류센터에도 나가곤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 주고, 공감해 주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던 삶을 살았던 친구가 이제는 몸으로 해야 하는 일을 배우고 있다.
최근 친구를 만났다. 비대하던 살은 빠졌으나, 더욱 건강해졌고, 이전의 밝은 표정 뒤에 있던 어두움이 이제는 밝음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주일이면, 파트타임 목사로 다른 교회를 섬기게 되었으며, 평일에는 땀 흘리고 몸 쓰는 일을 통해서 삶을 채우고 있다면서, 안정된 삶은 아니며 몸은 힘들어도 정서적으로는 매우 맑아지는 기분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 깨끗한 셔츠와 다려진 정장 바지의 압박에서 벗어나 편안한 옷차림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고 한다.
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분필을 잡았으며, 연필을 잡아야 했던 직업에 있었다.
교사라는 직업이었으니.
성적을 분석하고, 학생들과 상담하고, 공문을 처리하고, 수업을 계획하고, 수업하고, 평가를 계획하고, 평가하고,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고.
많은 사람들이 교사는 방학이 있고, 일찍 퇴근하니 좋다고 이야기하는데,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오랜 시간 보냈던 내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방과 후를 포함해서 하루 평균 6시간의 수업을 했으며, 나머지 시간은 공문 처리와 행사 준비 및 교육활동 준비 등의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혹여 학급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평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퇴근하면서도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고민했고, 출근하면서도 고민했으며, 주말에도 그 문제를 두고 고민해야 했었다.
교사에게는 방학이 있어서 좋겠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옛날이야기이고, 학생부 종합전형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방학이라는 시기는 생활기록부 작성의 시기, 그리고 이전 평가를 바탕으로 다음 평가를 설계하는 시기로 준비되었다.
10년의 교직을 했으나, 마음 편하게 가족들과 주말여행, 방학중 여행을 떠났던 경험이 없었다.
양말공장을 하게 되었다.
제조업. 생산직. 누군가 말하는 공돌이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처음 일을 하고 가장 충격을 얻은 것은 이전보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청소를 하고, 기계가 출력한 산더미 같은 양말을 정리하며 불량을 가려내고 수량을 파악하고, 현 작업의 진행상황을 관리하고 다음 작업을 준비하고, 창고에 있는 원사의 수량을 점검하며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물론, 작업 진행 상황에 따른 원사 보유량에 대해서는 신경 써야 하지만, 그리고 기계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을 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교직을 하던 시기에 쉼 없이 고민하고, 쉼 없이 생각했던 시기와는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요즈음은, TTS의 발달로 양말을 정리하면서 여러 책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으니 오히려 삶이 더욱 풍성해지는 기분까지 들게 된다.
그렇다고 교직에 비해서 쉬운 삶은 아니다. 청소를 한다고 몸을 움직이고, 양말을 정리한다고 장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서 일해야 하고, 창고를 정리하면 약 30kg의 상자를 어렵지 않게 들고 나르고 옮기고를 반복해야 한다. 기계의 소음에 쉽게 노출되고, 원사가 방직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미세한 먼지에도 쉽게 노출된다.
교직은 몸이 편한 반면 정신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던 반면에 공장의 경우는 학교와 같이 지속적으로 장시간 신경 써야 하는 일은 아니며, 오히려 몸의 노동이 지속적으로 활용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좋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아직 지난 10년의 교직생활과 그것을 준비했던 시기의 습성이 내게 남아있기에 내 몸은 여전히 그것에 회귀하기를 바라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지금 이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중이기에 말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쉬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몸이 힘들고 마음이 힘들 것이고, 그보다 좋은 누군가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편하던가, 마음이 힘들고 몸이 편하던가, 그보다 좋은 누군가는 몸이 힘들어도 그것을 즐기며, 마음이 힘들어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한 일. 과연 그런 일이 있을까? 아니,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네 힘겨움을 겸허하게 받아들여라는 의미이거나, 힘겨움을 기꺼이 찾아다니라는 의미의 말은 아니다.
단지, 왜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원망의 근원에, 내가 모르는 그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편안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자각했으면 하는 의미이다. 어쩌면, 지금의 힘듦으로 인해 우리 삶에 더욱 행복한 느낌이 찾아왔는데, "힘겨움"에 각인된 나머지 행복함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라는 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