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는 이기적으로 살아라.
아버지께서 모임을 다녀오셨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모임을 오늘에서야 끝냈다고 한다.
70이 넘어가니 그럴 만도 하다.
부부 모임이었다. 세 팀의 부부가 정기적으로 모였으며, 한 팀은 우리 집과 가까이 다른 한 팀은 도시를 가로질러 약 1시간 거리에 지내는 부부였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두 팀이 있는 우리 집 근처에서 한 번 하면, 다음에는 멀리 지내는 부부의 집이 있는 동네에서 한 번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중간중간 서로 뜻이 맞으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임에서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 집 근처에서 모임을 할 경우에는 부모님과 가까이 거주하는 친구분의 차를 타고 이동하고, 멀리 지내는 부부의 집 근처에서 모임을 하면 우리 차로 이동을 하는 패턴이 되었다. 심지어 때로는 우리 집에서 출발해서 멀리 지내는 부부의 집으로 가서 그들 부부까지 태우고 더 먼 거리의 식당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생겼다.
젊은 시절이라면 그 정도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고령의 운전자로 정의되는 아버지의 경우는 도심을 통과해서 1시간 이상 주행을 하고 초행길을 찾아서 간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다음에는 사람이 변하겠지, 젊은 시절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 이제는 변하겠지 라는 생각에 참고 참았으나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변화는 없었고,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모임은 아버지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태워서 장소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 모두 본인이 계속해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상했던 것 같다. 게다가 모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머니께서 계속 총무를 하고 있으니, 쉽게 보면 부모님의 피해의식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사람마다, 쉽게 여기는 일과 어렵게 여기는 일의 차이가 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 단톡방에서 동시에 떠들면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모임통장으로 회비를 관리하면 간단하지만, 어른들의 경우는 A에게 전화로 시간을 물어보고, B에게 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며, 다시 A에게 전화로 확답을 받는 형식으로 약속이 정해진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모임비 입금 여부 확인을 위해서 통장을 찍어 봐야 하고, 결제하고 영수증을 챙기고, 그것을 장부에 적어서 기록으로 남긴다.
젊은 사람들, 인터넷 뱅킹을 사용하고, 전화보다 텍스트를 이용한 소통이 편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먼 이야기이다.
누군가에게 쉬운 일 처리 방식이 누군가에겐 어렵고, 때문에 누군가에게 어렵게 보이는 방법을 누군가는 쉬운 방법이라 생각하며 진행하기에 누군가에겐 문제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에서 누군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먼지처럼 쌓이던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무게가 더해지기 시작했고, 나이 들어감에 따른 육체의 약함이 더해지면서 마음의 불편함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모임을 끝내자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께서는 본인이 너무 이기적인지 내게 물어봤다.
물론, 내가 들은 이야기는 모두 아버지를 통해서 듣게 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의 수고에 대해서 누구 하나 고마워하거나, 수고했다는 말이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 아버지는 자신만의 비뚤어진 시각과 욕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잘하셨다고 했다. 모임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스트레스를 가족들이 감당해야 했었기에 어쩌면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모두가 70대인 모임이, 거주지가 서로 가까운 것도 아니고, 모두가 대중교통이 좋은 곳에 거주하는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더 마음 상하기 전에 모임을 끝내는 것이 좋은 선택이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모두가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육신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이기적인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힘이 들고, 쉽게 피로를 느끼고, 빠르게 반응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화의 흐름이다. 피로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기'를 채우는 사람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로 인하여 관계에서 좋지 않은 마음을 채우는 것보다는 그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닐까? 그나마 관계의 끈이 미약하게라도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상황에서 말이다.
모의고사가 있던 어느 날이었다.
1교시 감독이 없었던 나는 교무실에서 커피 한 잔으로 조금은 여유로운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장님께서 출근이 늦으신 것이다. 혹시나 하고 시간표 확인을 하니 1교시 감독이 있었다.
평소 늦지 않는 어른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감독을 대신해서 들어갔고, 시험 진행을 원활하게 한 후, 시간표를 담당하는 업무자에게 연락하여 1교시 0-0반 교실 감독의 출근이 늦으니 감독표 조절을 해 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잠시 후 이왕 감독을 들어갔으니 이번시간은 내가 하는 게 맞다는 연락을 업무자에게 받았다.
모의고사 진행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갔는데, 갑자기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을 다 하라는 게 무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업무 담당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미 그날의 보강이 2건이 있었는데, 의무는 의무이고, 호의까지 의무가 된다면 누가 자발적으로 일에 참여하려 하겠는가?
교사 초임시절 시험 성적이 오르면 아이들에게 작은 쿠키를 선물해 줬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응원한다는 취지에서 사비를 들여서 수제 쿠키집을 섭외하여 선물을 준비했던 것이다. 물론, 특정 점수 이상에게만 준 것은 아니다. 이전 시험보다 어느 정도 발전이 있었는지 여부를 비교해서 선물을 줬었다.
1학기는 원활하게 잘 지나갔다. 문제는 2학기였다.
학년말이었고, 업무가 바빴고, 게다가 수학과 시험이 마지막날이다 보니 성적 처리와 함께 성장지표를 산출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학교에서 연말은 어느 때 보다 바쁘다. 연중에 받은 공문에 대한 결과 보고와 지필평가, 수행평가등에 대한 확인 그리고 학기말 성적 산출 등으로 인해서 1학기 기말보다 2학기 기말은 정말 장마철에 물을 방류하는 댐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업무가 쏟아진다.
시간을 쪼개서 성장지표를 산출했고, 쿠키를 준비했다. 그리고 학년의 마지막 수업시간에 시상을 하려 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오더니 내가 시험을 잘 봤으니 쿠키를 내어 놓으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주객이 바뀐 거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선의로 준 것인데, 마치 당연한 권리라는 식으로 그것으로 내어 놓으라고 찾아온 것이다.
그날 이후, 아무리 선의로 행하는 것이라도, 아무리 이쁘고 마음이 가는 아이에게라도, 간과 쓸개까지 내어 주는 바보 같은 교사는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장을 운영하다 보면 박스가 많이 나온다.
콘이라고 하는 두꺼운 종이로 만든 깔때기 모양의 틀도 나오고, 역시나 두꺼운 종이로 만든 원통 모양의 틀도 나오며, 원사가 담겨서 왔던 많은 양의 박스도 나온다. 보통 2주일에 1번 정도는 한 트럭을 채울 만큼의 박스가 나온다.
공장 인근에 폐지를 줍는 어른을 봤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폐지를 수거하는 어른을 봤었다. 그래서 그분에게 연락처를 받고, 공장의 위치를 알려주며 전화드리면 오셔서 박스를 가지고 가시면 된다고 이야기를 드렸다.
물론, 좋아했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해서 종이류를 트럭에 채우는 것보다는 약속된 장소에서 한 번에 한 트럭을 채우는 것이니 누가 봐도 수고를 덜게 되는 것이다.
약 1년 정도 그러한 일이 반복되다가 언제부터인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1시간 뒤에 온다고 해서 일부러 문 앞에 박스를 쌓아뒀는데, 약속을 어겨서 다시 박스를 창고에 넣는 일이 몇 번 생겼다.
언젠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기다렸고, 그분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1주일이 지나서 그분께서 전화가 왔고, 우리는 그래도 2주에 1번 정도는 박스를 내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니 그럼 오늘은 바쁘고 내일 치워주겠다며 마치 우리에게 본인이 호의를 베푸는 듯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날을 끝으로 다른 분께서 재활용품을 수거해 가셨다.
그분에게 감사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마치 자신의 호의로 마치 우리를 배려하는 것 같은 말속에 비꼬는듯한 어투가 느껴졌었다.
이기적인 이타주의.
개인적으로 그 말을 좋아한다.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베푸는 것, 도움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친절하게 대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코 그것에서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의 무게가 더 거북하기 때문이다.
모임을 하면 나서서 총무를 하는 편이고, 여행을 가면 먼저 운전대를 잡으려 하는 편이고, 계산을 하면 먼저 내야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는 먼저 도움을 주려 한다.
하지 않으려 하고, 받으려 하며, 내 것을 쥐고 있는 순간에 받는 심적인 거북함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살아가는 사람을 호구라고 보통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기적인 이타주의 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마치 호구가 된 것처럼 상대가 나를 대하면 가차 없이 차갑게 대하게 된다.
누구도 타인의 희생과 호의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나 또한 나와의 관계의 연장선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생과 호의, 선의를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 또한 내게 희생과 호의, 선의를 강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내가 희생했으니 그들 또한 내게 이 정도의 희생을 할 것이라고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희생은 내가 원해서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불편할 나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나의 기쁨을 위해서 희생한 것으로 끝내야 한다. 그래야 보상을 바라지 않게 된다. 그래야 그들이 내게 희생을 강요해도 쉽게 "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의는 강요받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