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기 9일차
우수한 인력을 잡아두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장학개론이었던가? 어디서 봤던 건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경영과 관련이 있다는 책을 찾아 읽다가 그런 문구를 봤었다.
임금을 많이 주면 우수한 인력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까?
삶의 질을 향상하면 그는 그 자리에 있을까?
책임감을 더하면 그는 그 자리에 있을까?
복지를 더한다면?
책에서도 명확하게 정답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사람에 따라서 선호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직"을 했던 내 경험을 바탕으로 보면 이러하다. 물론, 내가 우수한 인력인지 여부는 제외하고 이야기하겠다.
교직에 있던 시절 일에서 가장 힘을 얻는 것은 아무래도 보람이었다.
수업에 들어가면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이 보였고, 가끔은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아이들의 박수 소리에 우쭐거리면서 나오기도 했다. 내가 계획한 평가와 교육 프로그램이 의도한 것처럼 운영되어 긍정적 효과를 가지고 오고, 그것이 진학으로 연결되면 더욱 보람이 있었다.
그렇다. 아무래도 그때는 "보람"이라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그 일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의 수고가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줬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보람"이라는 요소가 조직에서 구성원을 잡아두는 가장 큰 요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나"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확장되면서 "보람"은 중요한 요소는 하지만 비중이 조금 줄어들게 되었다.
일의 많은 요소가 비슷하게 작용했지만, "보람"을 획득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줄었다. 언제부터인가 퇴근 후에 잠든 아이가 깰까 봐 살금살금 집에 들어오게 되었고, 잠든 아이를 보고 출근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아이의 키가 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있는데,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무렵 아버지께서 수술을 하셨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처음으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던 것이다.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입원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간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관리자에게 연차를 요청했다. 근 10년 만에 처음 사용하는 연차였다. 출산을 제외하면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들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라고. 의사도 아닌 네가 가서 무엇을 하겠냐고. 가서 무엇이 바뀌냐고.
마음 같아서는 집어던지고 나오고 싶었지만, 이성의 한 조각이 그것을 막았고, 마치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낭창한 표정으로 있으며 결국은 연차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하지 못한다는 모순을 경험했다. 그때부터 일이라는 것이 과연 나를 보호할 수 있으며,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힘을 내게 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반문하기 시작했다.
나의 의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직은 그때부터 내게 책임감을 주기 시작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에서 주도적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부여했고, 내가 생각하는 많은 것을 조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했다. 내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이유로 도전적인 것을 시도했고, 그러한 부분들이 긍정적 효과를 불러왔다. 덕분에 조직 외적인 활동도 가능하게 했다.
나와 가족을 지키는 힘을 내게 줄 수 없는 조직에 대한 의심은 책임감과 함께 따르는 성취감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길을 만들어가고, 그 길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길이 되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은 인정에 대한 욕구, 선의를 행하려는 욕구를 비롯하여 여러 감정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조직은 내게 성취감이라는 욕구를 빌미로 더욱 많은 요구를 했다.
성취감이라는 핑계로 내가 감당해야 하는 가지가 너무 많아져서 내 나무의 기둥이 위태롭다고 느껴지던 그때에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직은 그렇게 끝났다.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하는 많은 것을 감당하는 게 힘들었을 뿐이다.
이직을 했다.
종종 이야기하는 제조업.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기존의 길이 없으며, 정해진 커리큘럼이 없으며, 내가 그동안 걸어왔던 길과는 다르다.
단지, 부모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이유로 이것을 선택했고, 제조업이 쉽지 않은 일이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으며 때문에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추상적 개념이 아무리 중심이 된다고 하여도 기본적인 의식주와 그것에 연계한 제조분야는 분명 살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아이들에게 변화와 성장, 발전의 가능성을 빌미로 교육을 했던 사람이 스스로는 변하지 못한다는 모순에 빠져있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제조업은 매일이 반복되는 삶이다.
그런 일이 하나 둘이냐고 하겠지만, 제조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약 5분 간격으로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내가 하는 일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성장하는 모습을 느끼게 된다.
일을 배우면서 디자인을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기계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으며, 일의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배우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조금씩 성취한다는 느낌을 얻게 되었다.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최선의 움직임으로 일에 참여하지만 하루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더 해야 하는 미흡함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부분은 익숙해지고 숙련되면 충분히 감당 가능한 부분이라는 믿음이 있다.
성취감.
하루 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을 모두 해결하고, 목표한 기준치를 달성했을 때 느끼는 마음을 종종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루의 수고가 조금씩 달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이 힘들어도 이 일이 언젠가 나의 일이 된다는 생각에 많은 상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이렇게 하지만, 언젠가 내가 하게 된다면 어떻게 문제에 대처할지, 어떻게 상황을 정리할지, 어떻게 흐름을 만들 것인지.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게 된다. 그런 미래에 대한 준비가 헛되지 않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게 된다.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누군가는 하루의 삶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잠자리를 정리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그 작은 행동에서 성취감은 충족되고 그것을 통하여 하루의 삶이 견고하게 만들어지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기억한다.
성취감이 우리에게 일을 하는 내면적인 동기를 부여하지만, 그것의 정도가 심해지면 역시나 부러지게 된다.
과하면 좋지 않다고 무조건적인 성취감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교직에서의 내 경험처럼, 성취감으로 만들어진 많은 가지가 내 기둥에 무리를 주지 않게 조절해야 한다.
언젠가 성공하는 조직의 구성원을 인터뷰하는 영상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그 조직에서 일을 하게 된 이유는, 그 조직이 아니라면 그러한 경험을 못했을 것이며, 그 조직에서 일을 했던 것이 단순히 스펙이 아니라, 금액을 지불하고도 체험할 수 없는 경험치를 부여한다고 했었다. 그것이 어쩌면 성취감과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성취감은 그가 성장하기에 충분한 정도였기에 그 조직원은 자신의 직장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속한 조직이 내게 성취감을 주지 않기에 내가 좌절할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 하자는 의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무기력하다면, 그 속에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성취감을 찾아서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너무 일이 많아서 지친다면, 성취감에 목매여서 자신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우둔함을 경계하자는 의도의 말이다.
적절한 성취감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그것이 우리 삶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보자.
그것이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경계하며 성취감을 적절하게 조절하자.
그렇게 하루하루의 삶에서 우리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