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는 막걸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촌사람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것 같은 그 흔한 막걸리 심부름은 없었다. 엄마는 농사일로 고되고 힘들 때 싱크대 밑에 숨겨놓은 소주 한잔으로 피로에 지친 몸을 달랬다.
성인이 되고 나서 막걸리를 즐겨 마시기 시작한 건 대학생 때다. 막걸리는 배도 부르고 포만감도 주니 나쁘지 않았었다.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 막걸리를 마시면 /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 옥수수로 만드는 막걸리는 / 영양분이 많다 /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 그저 배만 든든하고 / 기분만 좋은 것이다. - 천상병, 〈막걸리〉
돈 없던 학생 시절 막걸리는 특식과 같은 존재였다. 술자리에서 막걸리는 라면보다 좀 더 나은 훌륭한 한 끼 식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항상 배가 고팠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며 사촌 언니랑 자취하는 동안 궁극의 가난과 배고픔을 맛봤었다. 자취방에 쌀이 있는 날이 한 달에 몇 번이고 쌀통은 늘 비어있었고 그 흔한 김치조차 없어 냉장고에는 물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부모님과 같이 진도에 살던 작은오빠의 도움으로 겨우 등록금을 마련했었다. 작은오빠는 소를 팔아 등록금을 보태주어 나는 오빠에게 너무 미안해서 더 바라지도 못하고 쌀이 떨어졌다는 전화도 못 해 그냥 굶은 날이 많았었다. 대학 생활 동안 들어가는 월세, 생활비, 책값 등의 돈은 알바를 하며 겨우 버텼었다. 진도에서 살았을 땐 입이 짧고 까다로웠다. 인천에 올라와 처음 곱창을 접하던 신입생 때는 곱창 모양새가 징그러워서 안 먹었던 나는 자취 1년 만에 곱창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고소함을 즐기는 인간 돼지로 변했다.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먹을 때가 제일 좋았었다. 다른 걸 많이 안 먹어도 막걸리를 먹으면 달달하게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아 고된 삶이 달콤해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학교 다닐 때는 막걸리를 자주 못 마셨다. 막걸리가 소주보다 비싸다는 이유다.
결혼을 하고 40세를 넘어가면서, 독한 소주보다 순한 맥주를 즐긴다. 그러다 엄마들 모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막걸리. 20년이 지난 막걸리는 여러 가지 맛이 나와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이 가능한 술로 발전했다. 거기다 막걸리는 ‘웰빙주’라고 한다. 건강한 술이라는 논문이 나왔다. 술을 마시고 건강해질 수 있다니 이건 약장수 더한 사기일까?
거짓이 아닌 진실이다. 막걸리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건강주다.
막걸리에는 식이섬유와 단백질, 미네랄이 들어있다.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실 때 같은 양의 식이 음료를 마시는 것보다 100~1000 배나 많은 식이섬유를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막걸리를 빚는 과정에서 누룩은 소화를 돕는다.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은 식후에 막걸리 한잔이 약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참조] 막걸리를 마시면 뒤끝이 안 좋다?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2012. 9. 24., 김규회, 황선정, 송진욱)
나는 가끔 더욱 건강하게 삶을 사랑하려 막걸리를 마신다. 그중에 가장 으뜸인 알밤 막걸리다.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4호로 지정된 ‘지평생막걸리’도 맛있지만 알밤의 맛을 알아 버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알밤 막걸리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막걸리는 캠핑용 워터저그 한 자리에 얼음과 함께 듬직하게 나의 건강까지 챙겨준다. 너무 지나친 과한 음주는 신체적으로 해롭다. 다만, 열심히 살지 말자, 술잔에 기대어 하루를 허투루 보낸다고 해도 마음만 가볍고 즐겁다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