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cm의 키를 자랑하는 그야말로 훈남 하숙생이 새로 들어왔다. 정말 잘생겼다 모델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코도 높고 눈도 부리부리 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양 남자 흑발의 훈훈한 청년에게 처음 본 순간 반해 버렸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외국인 모델이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주치고 싶었다. 그의 초록 눈을 지긋이 바라 보며 Hi라고 반갑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나를 지나쳤다. 정말 안타까운 순간들이 매일매일 지나간다. 그가 화장실에서 말끔히 씻고 나오는 날에는 향긋한 보디워시 향기가 난다. 남자들이 흔히 쓰는 냄새가 아니다. 비누로 씻어도 좋을 그이지만 향긋한 꽃 냄새라니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의 취향이니 좋았다. 그가 씻고 난 뒤에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일부러 기다리며 냄새를 맡았던 건 아니다. 그냥 한 지붕 아래에 사는 흔한 여자일 뿐이다.
그는 집에서 음식을 해 먹지 않았다. 늘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부엌에서 꼼지락거리며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였다. 다른 음식은 하지 않았다. 할 줄도 몰랐고 내가 하면 맛이 없다. 배고파서 굶주림에 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뱃속을 채우는 것이 먼저지 맛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스테이크에는 쌈장만 한 소스가 없고 라면에는 김치만 한 것이 없다. 한국에서는 김치 먹는 걸 싫어해서 자취집에 김치가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은 김치뿐이다. 점심때면 마땅히 먹을 것이 없다. 그나마 저렴한 중국식당 볶음밥이 가장 입맛에 맞고 맛있다. 느끼한 음식을 매일 먹다 보니 집에 오면 자연스럽게 라면에 김치를 먹는다. 모델 청년이 부엌에라도 서성이면 "Do you know Kim-chi?"라고 수줍게 물어 보고도 싶고 젓가락을 들어 입속에 김치를 넣어주며 뭔가 로맨스를 꿈꾸고 싶지만 그는 부엌에 나타나질 않는다.
부엌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건장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한 번도 모델 청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오늘 처음 들었다. 그런데 낯선 목소리는 한 사람이 아닌 대화의 소리다. 이상하게 오늘 유독 지금 이 순간 냉장고에 있는 맥주가 먹고 싶고 숨이 가쁘도록 목이 마르다. 앞 방 청년이 보고 싶어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인 건 아니라고 머릿속은 냉정하게 이성을 부여잡고 있지만 가슴은 쿵쾅 거리며 설레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생각과 다르게 밖에 있는 냉장고 문을 붙잡고 있다. 앞 방의 청년과 전혀 다른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근육질의 상남자가 앞 방 청년과 정답게 요리를 하고 있다. 친구가 온 것일까? 터치가 미묘하다. 너무 자세히 쳐다볼 수 없었다. 상남자가 앞 방 청년의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이 뭐가 대수로워서 친구니까 그럴 수 있겠지 나도 내 친구 가슴도 만지고 엉덩이 만지니까.
친근함의 표시겠지 내 앞에서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주 돈독한 사이겠지 아무렇지만 그렇지 않은 척 별일 아닌 척 쿨한 척 내 이성에게 시치미를 떼며 침대에 앉아서 눈을 껌뻑거리며 급하게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신 탓인지 화장실이 가고 싶다. 문을 빼꼼히 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차마 부끄럽게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화장실 바로 옆에 부엌이 있으므로 조심할 수밖에 없다. 아직 그들의 소곤소곤 대화 소리가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문을 되도록 티 나지 않게 살짝 빼꼼히 열었을 때 나는 숨이 멎었다.
상남자가 앞 방 남자의 등 뒤에서 그를 안고 볼에 살포시 키스를 했다. 내 심장은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조용히 문 밖에 떨어진 이성과 심장을 주워 담고 문을 닫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달콤했다. 앞 방 청년은 그렇게 주말마다 데이트를 즐겼고 나는 방 안에서 가슴으로 울었다.
나는 동성연애를 혐오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도 존중받아야 하고 사랑할 권리가 있다. 그치만 내 자녀가 동성을 데려와 결혼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반대한다고 눕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흔한 말은 하지 말자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