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다녔던 회사는 소수로 구성된 교육 관련 컨설팅 업체로, 상호 유대감이 높으면서도 자유로움은 독려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발성'을 중요시하는 성향이 큰 터라, 특히 그곳을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일하다 뭔가 막혀 답답하거나 오랜 작업으로 지쳐간다 싶을 땐 휙~ 일어나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놀다 와도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대표님께서 그걸 독려하기도 하셨고 때론 카드를 쥐어주기도 하셨었죠. (쓰면서 보니 정말 좋은 회사였네요! ^^)
그래서 지금 근무하는 곳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기억 중 하나가 굉장히 또렷합니다. 당시 동료 상담샘들은 어떤 과제를 가지고 골머리를 앓은 지가 꽤 오래되어 상당히 지쳐있던 때였어요. 아직 이직한 지 얼마 안 됐던 저는 무거운 분위기에 함께 압도되기 싫거니와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들어 별생각 없이 "그럼 우리 일단 나가서 좀 걷죠?!"라고 제안을 했더랬죠. 마치 예전 직장에서처럼 요. 저의 이 말에 정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래졌던 그 샘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전히 아무 생각 없이 천진난만하게 "뭐 어때요~좀 걷다 와요, 우리"라고 말하는 저를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 샘들은, 회사 건물 사이사이를 천천히 한 바퀴 걸으면서 '이랬던 적 처음이다', '머리도 좀 맑아지는 거 같고 좋다'라고 얘길 했더랬죠. 그러면서 정작 고민하던 일과는 무관한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신나게 하고 돌아왔던, 그 건물 사이사이에서 봄바람이 시원했던 그 어느 날 말이에요.
그리고 그 골치 아픈 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나지가 않습니다. 워낙 옛일이 되어버린 탓도 해봐요. 그래도 그날 사무실에 내내 앉아 있으면서 지치고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동료들이 그 잠깐의 사내 산책을 상당히 흡족해하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표현해 주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납니다. '거봐라, 내 말 듣길 잘했지?'라며 제가 제법 생색냈던 기억도 또렷한 걸 보면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마음이 많이 지치고 힘겨울 때가 있으시죠? 축 처져서랑은 극도의 피로감이 느껴지고, 주변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냉담해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점차 내가 계속 잘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고, 그간의 성취감도 의미 없이 느껴지면서, 이렇게 열심히 해서 뭐 하나 싶은 마음도 들고 말이에요. 많이들 들어보셨을 번아웃(Burn out), 즉 심리적 소진 현상입니다. 너무 열심히 달려오다 보니, 몸과 마음이 완전히 나가떨어지기 직전의 녹초 상태.
이렇게 소진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하는 최선의 치유책은 사실 하나밖에 없습니다. '휴식'. 너무 하얗게 불태웠기에 곧 가루로 사라질 지경이니 그전에 딱, 잠시 멈춰 쉬어줘야 하는 겁니다. '과연 쉬어도 되나?'의 불안도, '내가 못나서 이러는 건 아닐까?'의 자책도 다 내려놓고 말이죠.
다행히 그 불안과 자책의 다리도 건너 "그래, 일단 좀 쉬자!"며, "나를 위한 여행이라도 우선 다녀오자!"라고 마음먹으신 분들이라도 이제 다음의 곤란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딜, 어떻게 가는 게 좋지???
오늘 정작가와 소개드릴 마음 여행지는 바로 그에 대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곳이고요, 키워드는 앞서 제 기억을 토대로 말씀드린 것과 같은 '환기'입니다. 한자로는 바꿀 환(換), 기운 기(氣). 즉, 탁한 공기를 빼고 맑은 공기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죠.
답답하고 무겁기만 한 공기를 빼내려면 일단 창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창문의 상태입니다. 내가 소진되어 있을 때 나의 창문은, 마치 잘 찢어지는 창호지로 만든 창살문처럼 누가 침 묻힌 손가락으로 쑤욱 누르기만 해도 쉬이 찢어질 정도로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의 나의 창문이 이중 방범창처럼 튼튼해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에요.
따라서 창문을 열긴 열되, 내 창살문의 상태를 잘 인식하고 어느 곳 하나 찢어지거나 긁히지 않게 가능한 조심스럽게 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심리학적 용어를 덧붙이자면, 자기 보호행동(self-safeguarding behavior), 즉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 여행의 최우선은 '안전'입니다.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안전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다음의 원칙을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 일정 : 여행 루트나 타임 테이블은 좀 여유롭게, (2) 장소 : 너무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 번잡스럽거나 시끌벅적하지 않은 곳으로, (3) 관계 : 평소 입 바른 소리를 핑계로 비난을 일삼거나 이기적인 대상, 혹은 나와 너무 성향이 다르거나 내가 되려 챙길게 많아 피곤한 여행 메이트는 제외하고-차라리 혼자가 편하다면 혼자-, (4) 비용 : 얼마의 돈 아낀다고 또 에너지를 들이지 말고 돈 조금 더 써서 풍족하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합니다. (5) 음식 : 그 지역만의 맛이 있으면서도 몸을 보할 수 있는 음식이 많은 곳.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은근히 뜨끔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이미 소진을 느낄 정도로 열심히 달려오신 분들일수록 평소에도 늘, 언제 어디서나 '열심히, 잘, 완벽하게'를 추구해 왔을 경향이 높습니다. 그러니 쉬자고 하는 여행인데도 자동적으로 또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이미 너무 지쳐있는 상태인데, 제대로 쉬어보겠다며 무리해서 여행 계획을 짜고 한껏 꽉 채워 돌아다니면서 결국엔 더 지치게 되는, 안 쉬느니만 못 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기게 되는 거죠.
나의 처지고 무겁기만 한 공기를 쓰윽 빼내주는 여행, 그러나 지금 내 지칠 대로 지친 창문이 다른 무언가에 찢기지 않게 최대한 안전하게 지켜주는 여행, 그리하여 조금은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내 코끝, 손발, 머리카락까지 휘~ 부드럽게 들어와 머릿속도 시원하고 개운해지는 여행. 그런 '안전한 휴식'이 충분한 여행을 하셔야 합니다. 자, 그럼 그런 여행지로, 정작가의 안내대로 떠나볼까요?
1. 대숲에서 힐링하고, 떡갈비로 보신하는 담양 여행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 번아웃에 빠지면 모든 일에 의욕도 사라지고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피로감이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변 박사의 조언대로 살며시 마음의 창문을 열어 맑은 기운을 다시 채워 넣는 ‘안전한 휴식처’로 떠나볼까요.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한 푸른 대숲을 산책하다 보면 바닥 끝까지 소진되었던 에너지가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답니다. 먼저 추천하는 여행지는 전라남도 담양입니다.
푸른 숲을 걷는,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 길
담양은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 길이 유명한 여행지이지요. 죽녹원은 한겨울에도 초록색 대나무가 끝없이 펼쳐져 푸른 쉼을 선사합니다. 대나무는 음이온이 많이 뿜어져 나오는 식물로 유명한데요, 대숲을 걷는 동안 몸 안에 건강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에요.
죽녹원 안에는 여러 갈래의 대숲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답니다. 걷다 쉬어가라도 정자도 세워져 있구요, 숲속에서 족욕도 즐길 수 있답니다.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죽림욕을 즐기는 동안 폐부 깊숙이 스미는 청량감이 맑은 기운을 전해줍니다. 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은 또 얼마나 달달한지. 죽녹원 맞은편에는 최고 수령이 300년에 달하는 오래된 숲인 관방제림도 있으니 함께 걸어보세요.
옛 24번 국도변에 줄지어 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담양군의 자랑거리이죠. 2,000여 그루의 늘씬한 나무들이 초록빛 터널을 이룬 황홀한 풍경을 선사한답니다. 약 8.5km에 달하는 도로에 키 큰 나무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데요. 그저 걷기만 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아름다운 길이랍니다.
메타세쿼이아 길 건너편에는 메타프로방스라는 프랑스의 프로방스를 본떠 만든 거리가 있습니다. 시원하게 뿜어내는 분수를 비롯해 아기자기한 카페와 베이커리, 공방, 소품샵 등이 있어 잠시 쉬어가도 좋답니다.
감성을 되돌려주는, 딜라이트 담양
딜라이트 담양은 지난해에 문을 연 미디어 아트 전시관입니다. 담양의 지역 자원들을 테마로 환상적인 미디어 아트를 만들어냈는데요, 감성마저 모두 고갈되어 뭘 봐도 무덤덤한 상태라면 한 번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져 있던 감성을 다시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줄 마법 같은 공간이거든요.
대나무 숲 너머엔 거대한 달이 걸려 있고, 수많은 청사초롱이 거울에 반사되어 별빛처럼 흐르는 환상 동화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답니다. 눈과 귀로 전해진 감각이 벅찬 감동이 되어 온몸을 휘감아버리죠.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바닥까지 철철 흘러내는 폭포수가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기도 하고, 바닥부터 천정까지 라벤더 숲길이 이어진 초현실 세계에 푹 빠질 수 있어요.
여기선 굳이 무엇을 느끼려고 노력하지는 마세요. 그저 눈에 보이는 만큼 보고, 들리는 대로 들으면서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놓아보세요. 그렇게 즐기는 것만으로 메마른 감성을 적시기에 충분합니다.
당신은 육류파? 면류파? 아니면 건강식파?
자, 이번엔 몸을 보신하러 떠나볼까요! 담양에는 식욕을 돋우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답니다. 육류파에겐 담양 전통 음식인 떡갈비를 추천합니다. 부드럽고 달달한 떡갈비에 대통밥 하나면 금세 한 끼가 뚝딱 비워집니다. 대통밥은 속이 빈 대나무에 쌀을 넣고 밥을 지은 것을 말하는 데요 대나무의 고장인 담양에서 먹을 수 있는 별미랍니다.
면류를 좋아한다면 국수거리를 가봐야죠. 관방제림 입구 쪽에 국숫집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데요. 날씨 좋은 날 나무 그늘 아래서 국수 한 사발 후루룩 들이키면 그것만큼 맛있는 게 없답니다. 담양의 국수는 진하고 깔끔한 멸치 육수가 정답이죠. 여기에 푹 끓여낸 계란 한 알 곁들이면 아주 보약이랍니다. 그래서 이름도 약계란이에요.
건강을 생각한다면 약초 밥상이 제격이지요. 주인장이 산에서 직접 캐온 약초를 발효시켜 만든 장아찌를 뷔페처럼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답니다. 단 남기면 안 되어요. 식사 후에는 직접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요, 정성껏 밥을 지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자는 속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2. 바다와 책방의 조합, 그리고 시장에서 보신하는 제주 여행
숲보다 바다가 취향인 이들에게 추천하는 여행지는 제주도입니다. 현재 내 상태를 잘 이해해주는 여행 메이트와 함께 해변을 걸으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눠도 좋고, 혹여나 혼자 걷는다 해도 결코 외롭지 않을 겁니다. ‘자연을 벗 삼아’라는 옛 선인들의 말씀이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쉴 새 없이 오고가는 파도와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과 눈 맞추다 보면 쳐져 있던 기분도 봄눈 녹듯 사라져버릴 거에요.
해변과 해안 절벽 산책길
제주도는 동서남북을 둘러가며 유명한 해수욕장과 해변들이 펼쳐져 있지요. 너무 북적거리는 곳에 있으면 남은 에너지마저 모두 소진될 수 있으니 조금 한적한 해변을 걸어볼까요. 제주시에서 가까운 이호테우해변은 새하얀 모래밭은 아니지만 해변 뒤에 작은 숲도 있고, 예쁜 포토존인 말 등대도 가볼 수 있는 곳이랍니다. 특히 해질녘이 아름다운데요, 봄철엔 해변 근처에 보랏빛 버베나 꽃밭도 조성되어 꽃놀이도 즐길 수 있답니다.
남원큰엉은 해안가 절벽을 따라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어 걷기 좋은 곳이랍니다. 이곳에선 망망대해 같은 너른 바다를 마주하게 됩니다. 파도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려오는 산책로에는 쉬어가기 좋은 벤치들이 있어 바다 멍을 즐기기에 최고랍니다. 김밥 한 줄, 물 한 병 챙겨들고 홀로 가벼운 피크닉을 즐겨도 좋을 거예요.
동쪽 바닷가 마을인 세화리는 해변을 품고 있는데요, 주변에 예쁜 카페와 밥집들이 많아 한가로이 머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모래밭이 곱고 수심이 얕아 맨발로 해변을 거니는 맛이 있답니다. 하지만 바위들도 많으니 조심해서 다녀야 합니다. 투명한 물속에 발을 담궈 보세요. 기분이 맑아지면서 입가에 엷은 미소가 절로 떠오를거에요.
개성 넘치는 나만의 취향저격 책방
한껏 바다의 기운을 느끼고 돌아왔다면 이번엔 감성을 채우러 떠나볼까요. 요즘 책방 투어가 인기인데요, 제주에도 작고 예쁜 서점들이 정말 많답니다. 대형서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주지요.
서점마다 개성 있게 꾸민 큐레이션은 고갈되었던 영감의 문을 다시금 톡톡 두드려 줍니다. 흔한 베스트셀러 말고, 다양한 작가들의 시선과 이야기들이 녹아 있는 책들을 둘러 보다 내 취향저격 책을 만나게 되면, 마치 머릿속에 종이 울린 것 마냥 정신이 깨어나는 경험도 얻게 될 거예요.
여행자들의 참새 방앗간,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제주도에는 먹어봐야 할 게 참 많죠. 흑돼지도 맛봐야 하고, 갈치조림, 고등어회, 고기국수, 몸국, 물회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답니다. 별미 주전부리들도 놓칠 수 없죠. 이것저것 모두 맛보고 싶다면 시장이 정답입니다.
특히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은 여행자들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인기 있는 장소랍니다. 오후 5시 무렵부터 먹거리 가판대가 문을 여는데요, 흑돼지꼬치구이, 한치빵, 꽁치김밥, 전복구이 등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주전부리와 한 접시 회 등 부담 없이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이 많아요. 시장 뒤편에는 야시장이 열려 독특한 퓨전 음식들도 만날 수 있답니다.
* 정작가: 정은주 여행작가. 우연한 기회에 여행 기자가 되었다. 몇 년간 여행 신문과 여행잡지 『트래비』에서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다 돌연 사표를 내고 1년간 캐나다로 떠났다. 이후에도 언제든 기회만 되면 집 밖을 떠돌 궁리를 했다. 지금은 취재차 들른 제주도에 반해 수년째 눌러살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캠핑카를 집 삼아 전국을 떠도는 게 꿈이다. 현재 다수의 매체에 글과 사진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커플여행 바이블』, 『제주가자』, 『차 없이 떠나는 제주여행 코스북』, 『교과서가 쉬워지는 제주여행』등이 있다. 모든 여행 사진을 전담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 오늘도 '여행 중'이다. 여럿이 함께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