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엔 제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10년 근속휴가를 받게 돼 보통 쓰는 휴가보다 좀 더 길게 쓰게 되었죠. 그참에 한 열흘 제주에서 지내면서 참 좋았습니다. 제주 is 뭔들, 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당시가 좋았던 건, 평소와 다른 3개의 '벗어남'에 있었습니다.
첫째,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제까진 회사에 다니면서 열흘 넘게 휴가를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긴, 이를테면 해외 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것도 있고요. 직장 다니며 그 정도로 긴 휴가를 한번에 쓰는 게 좀 부담스럽다 느끼는 과한 책임감이라면 책임감, 아니면 촌스러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노는 건 뭐 얼마든지 길게 놀 수 있겠더군요(ㅎㅎ). 참 좋았습니다.
둘째, 여행을 구상하면서 새삼스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제까진 혼자 긴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일치기나 하루이틀 밤 어딜 다녀온 적 정도야 있겠지만은 그것도 누굴 만나거나 뭣땜에 간 김이지, 진짜 여행으로 혼자만 다녀온 건 처음이더라고요. 늘 가족, 혹은 친구, 아니면 선후배와 함께였던 거죠. 그런데 와아. 혼자 노니 더 자유롭고 좋은 구석도 있더군요. 누구 눈치볼 것도 누구랑 맞출 필요도 없이 내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그때 그때 가고 싶으면 가고 아니면 안 가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아니면 안 먹어도 되고. 참 좋았습니다.
셋째, 원래도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 편은 아니나 그래도 '대충 오늘은 여길 가볼까?' 한두 곳 정도 정하고 움직였는데 한 열흘 다니다 보니 그런 대충의 계획도 틀어지는 때가 꽤 많았습니다. 비가 와서, 늦게 일어나서, 길을 잘못 찾아서, 시간 계산을 잘못 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다 보니 등등. 그럼 이제까지 계획했던 게 틀어지는 거니 그 순간은 참 당혹스럽기도 하죠. 그런데 웬걸요. 딱 그 순간만 지나면 그게 더 좋은 여행길이 되더라고요. 지금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예상 밖의 풍경, 기대 이상의 감동, 의외의 동네 맛집... 이것들은 오히려 그런 순간들에서 나왔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이런 벗어남, 혹은 일탈. 이것이 주는 효과가 뭘까요? 제 생각엔 의외성(unexpectedness)인 것 같습니다. 생각이나 기대, 예상과 전혀 다른 성질을 뜻하죠. 스탠퍼드대 조직행동론 교수인 칩 히스는 공저 <스틱!>에서 이러한 의외성을 '보통 그럴 것이다~ 라고 추측하며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도식을 깨부수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럴 때 '머릿속에 스티커처럼 착! 달라붙을' 정도의 임팩트가 생긴다고요.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의외성의 경험이 제법 있으실 거예요. 시간이 안 맞아 평소라면 안 봤을 영화를 보고난 뒤 "생각지도 않았는데 재밌군~", 어떤 사람의 예상치 못한 반응을 접한 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말해주니 오히려 더 심쿵했지 뭐야~", 업무를 다른 방식으로 해본 뒤 "별 기대 없없었는데 오히려 더 그렇게 하니 더 수월하더라고" 등등.
요즘 만사가 다 뻔한 것이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고, 영 재미 없게 느껴지신다고요? 그럼 여러분들도 눈 딱 감고 한 번 벗어남을 시도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렇다고 거창하고 클 필요 전혀 없습니다. 안전하게 작은 것,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봐도 좋아요. 매일 가던 같은 산책길 대신 살짝 다른 길로, 항상 쓰던 바디로션 대신 새로운 향의 바디로션으로, '저 사람은 늘 저렇게 짜증내'라는 생각 대신 '내가 한 말 중 짜증나게 한 게 있나?'로, 늘 먹던 류의 음식 대신 '이건 안 먹어본 스타일인데 한번 도전해봐?!', 요가센터에서 평소처럼 뒤에 앉지 말고 '오늘은 선생님 바로 앞에서 한 번 해보자'로 말이에요.
저처럼 여행도 좋은 계기가 될 거 같아요. 전 아직도 그 때의 '의외성'의 효과를 제법 누리고 있거든요. 여행 전 살짝 루즈하게 느껴졌던 일과 일상이 다시 좀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때론 제법 창의적인 생각이 스쳐 강의자료를 다른 플롯으로 접근해 만들어보기도 하고요, 열흘간 느꼈던 것들이 글감이 되어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도록 하게도 됐네요.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도 이 참에 아예 의외성이 있는 여행지를 알아보고 슬쩍 떠나볼까 마음 먹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정작가가 그런 곳을 안내해줄 거예요.
변 박사의 이야기처럼 어디서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이지요. 이런 기쁨이 사실 여행지 자체에 있는 건 아니지만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될 확률이 높은 곳들이 있긴 하죠. 아무래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나 정보가 많지 않은 여행지, 혹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밖의 상황들이 벌어지곤 하거든요.
변 박사가 제주도에서 좌충우돌하며 뜻밖의 재미와 감동을 얻은 것처럼 혼자 떠나거나 무계획적인 여행, 낯선 곳들에 대한 호기심들이 의외의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그럴 수도 있지 뭐. 오히려 이게 더 나아 보이는데?’ 하는 긍정적인 마인드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얼마 전 저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여행지들을 발견했는데요, 살짝 알려드릴게요. 어쩌면 저보다 여러분이 더 흥미진진한 여행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진주에서 담력 테스트 해보실래요?
진주,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십중팔구가 진주성과 남강유등축제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후엔 어디를 가지? 란 물음이 뒤따르게 마련이죠. 몇 달 전 진주를 다녀왔는데 저도 마찬가지 심정이었거든요. 진주성과 진양호 주변을 돌고 나니 마땅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더라구요.
그러다 우연찮게 월아산 숲속의 진주라는 곳을 듣게 되었어요. 순전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길을 나섰죠. 특별한 기대는 1도 없었습니다. 다만 숲이라니 좋은 공기나 마시고 오자 싶었죠. 하지만 안 갔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어요. 그곳에서 인생 최고의 스릴을 맛봤거든요.
월아산 숲속의 진주는 휴양림과 산림레포츠를 합쳐 놓은 친환경 여행지인데요, 처음 보는 시설이 있었답니다. 숲 위를 달리는 에코라이더였는데 아무런 정보 없이 일단 탑승했어요. 있으니 타볼까 하는 생각이었죠.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는데 외줄에 매달린 자전거를 타고 숲 위를 지나가는 내내 아찔한 감각만 느껴지더라구요. 앞차를 보내느라 잠시 정차해 있을 땐 심장이 쿵쾅쿵쾅 터져 나오는 줄 알았어요.
사전에 탑승 후기라도 읽어봤더라면 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랬다면 평생토록 이런 스릴감은 맛볼 수 없었을 테죠? 한 번 경험했으니 다시는 타지 않겠지만 그때 멋모르고 도전하길 잘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지루할 거라 생각했던 진주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얻은 여행이었답니다. 여러분들도 진주에서 또 다른 의의의 곳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라요.
함양에서 산꼭대기까지 모노레일 타보실래요?
함양엔 짚라인이 있다고 해서 출발 전에 미리 예약해 두었었죠. 처음 가보는 여행지인 데다 그리 이름난 지역이 아니어서 마찬가지로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착해서 보니 함양상림과 하미앙 와인밸리, 개평한옥마을 등 가 볼만한 곳들이 꽤 있었고 도시가 아담하고 깔끔해 마음에 들었습니다. 짚라인 시설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고 안전해 보였어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아뿔싸 모노레일이 반전이었습니다.
짚라인 탑승 한 시간 전에 와야 한다고 해서 좀 의아해했는데 알고 보니 산 정상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가야 하기 때문이었어요. 대봉산 꼭대기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데 외줄 타기 자전거보다 더 아찔아찔! 완벽한 급경사에 옆은 절벽이고, 얇은 레일 하나를 타고 30분 넘게 올라가는데 혹시라도 전기 동력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하며 혼자 온갖 상상을 다 했답니다. 그나마 올라갈수록 펼쳐지는 전경이 너무 멋져 잠깐씩 걱정을 잊을 수 있었지요. 탑승장까지, 그것도 1,200m가 넘는 까마득한 산 꼭대기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갈 줄은 꿈에도 몰랐죠.
대신 짚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시간은 너무 황홀했습니다. 산을 따라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가 된 것 같았어요. 놀라운 건 환갑을 훌쩍 넘기신 어르신들이 저희 보다 더 신나게 짚라인을 즐기고 계셨답니다. 익스트림 스포츠는 나이 들어선 즐기기 어렵겠다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통쾌하게 깨어지던 순간, 의외의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죠.
거창에서 추모의 마음을 가져볼까요?
거창은 함양과 합천 사이에 있는 소도시인데요, 왠지 작은 시골 마을일 것 같았어요. 여행작가라도 전국 시도를 모두 다 가본 것은 아니기에 이름부터 무척 낯설게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역시 함부로 단정해선 안 되는 거였죠. 거창은 함양보다 더 큰 도시였거든요.
감악산 풍력단지를 둘러보고 내려가는 길에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시내를 벗어난 곳이라 마땅한 곳이 없었죠. 지도를 보며 무언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다가 작은 마을 어귀에 들어선 길에 거창 사건 추모공원 표지를 발견했죠. 궁금증이 발동해 잠깐 들러보기로 했는데요, 결국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나오게 되었어요. 한 시간 넘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창 사건은 6.26 전쟁 중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700명이 넘는 마을 주민들이 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예전에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곳은 당시 희생 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인데요 역사교육관에서 사건의 전말과 이후 수습 과정 등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너무 안타까웠어요.
이처럼 의외의 곳에서 잊히거나 잘 몰랐던 역사들을 만나는 순간들이 있기도 합니다. 즐거운 여행길에 마음이 무거워질 수도 있었지만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답니다. 모두 우리의 일이니까요.
여행 중 맞닥뜨리게 되는 낯선 상황, 의도치 않은 장소, 뜻밖의 발견 등은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더 풍성하고 알찬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하니 일단 떠나보세요! 그 후의 일은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의 발걸음에 맡기면 된답니다.
* 정작가: 정은주 여행작가. 우연한 기회에 여행 기자가 되었다. 몇 년간 여행 신문과 여행잡지 『트래비』에서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다 돌연 사표를 내고 1년간 캐나다로 떠났다. 이후에도 언제든 기회만 되면 집 밖을 떠돌 궁리를 했다. 지금은 취재차 들른 제주도에 반해 수년째 눌러살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캠핑카를 집 삼아 전국을 떠도는 게 꿈이다. 현재 다수의 매체에 글과 사진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커플여행 바이블』, 『제주가자』, 『차 없이 떠나는 제주여행 코스북』, 『교과서가 쉬워지는 제주여행』등이 있다. 모든 여행 사진을 전담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 오늘도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