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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dianjina Sep 22. 2017

열다섯 하루키를 만난 나는 서른이 되었다

기사단장 죽이기, 무라카미 하루키, 2017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글을 쓰는 수십년의 시간은 수많은 하루키스트들을 낳았다. 취향과 기호, 세대가 전혀 다른 이들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 아래 쉬이 공통분모가 된다. 그의 소설은 전 세계적인 팬덤을 지닌 대중소설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하루키만의 독특한 환상성은 장편 소설에서 빛을 발한다. 이는 많은 이들이 지루해않고 끊임없이 그의 소설을 찾는 이유다. 그러나 몰입은 쉬울지라도 그의 문장을 즉각적으로 해석하기란 어렵다. 이야기가 끝나고 혹은 책장을 덮고 충분히 곱씹고 나서야 마침내 '의미'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키 소설은 독서의 연장으로서 읽고 난 이후의 행위가 더욱 중요하다. 이야기를 찬찬히 곱씹다 보면 서사를 따라가는동안 다가가지 못한 의미들이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저는 때때로 그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좁고 어두운 장소에, 완벽한 침묵 속에, 혼자 버려지는 것 말이죠."(멘시키)
진실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독을 가져오는지.(나)


<기사단장 죽이기>로부터 천천히 다가온 의미는 '상실'과 '고독'이다. 주인공인 나, 멘시키, 마리에 라는 세 명의 인물은 모두 본질적으로 고독을 지향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경험을 지녔다. 그리고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숨긴 채 죽음을 앞둔 유명 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또한 과거 전쟁의 역사에 희생당하며 연인과 동생을 잃었다. 이야기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자면 '나(주인공)'는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세계에서 그림 속 기사단장(이데아)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그 소멸이 시발점이 되어 고독과 상실로 점철된 세 사람은 비로소 극복의 걸음을 걷게 된다. 주목할 점은 기사단장이 소설 속에서 스스로를 '이데아'라 칭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정의에 따르면 이데아(관념)란 '사물들의 본성 속에 고정된 원형들'이다. 결국 기사단장(이데아)은 우리 모두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상실의 아픔 혹은 고독의 원형으로 해석된다. 또한 '내(주인공)'가 실재하지 않는 기사단장을 죽이는 행위는 곧 상처의 극복을 위해 치뤄야 하는 의식을 상징한다.


그 지역을 돌아다니던 시기에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지극히 고독하고, 서글프고, 답답한 심경을 안고 있었다. 여러 의미에서 스스로를 상실해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여행을 이어가며 수많은 낯선 이들 틈에 섞여 그들의 일상 속 여러 장면을 통과했다. 그것은 그때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과정에서 몇 가지를 바리고, 몇 가지를 건졌다. 그 장소들을 지나온 나는 그전과 조금이나마 다른 인간이 되었다.(나)


<기사단장 죽이기>의 모티프가 된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줄리언 반스는 그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인생의 목적이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했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나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의 상실감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유독 하루키가 써낸 고통의 문장들을 곱씹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와 같은 하루키스트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소설 속 의미나 은유를 전부 읽어내지 못할지라도 그의 문장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자신 안의 비밀스런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하루키가 그리는 인물 만큼이나 나 또한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것이 줄리언 반스의 말처럼 상실로 축적된 인생을 받아들이고 고독이 우리 안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체념하는 과정이 아닐까. 상실의 시대는 한시적일 수 없는 영속적인 삶의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또 한 번 삶의 처연한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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