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심는다
이별이 결별이 되었을 때, 지금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머리끝까지 차오를 데로 차오른 각기 다른 생각의 블록들을 바닥에 쏟아버린다.
역설이 눈에 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느낌을 느낀다. 힘이 빠진다. 눈을 뜨고 숨을 내쉬는 것도 모든 것을 부정한다. 세상에서 사라지면 느낌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묻는다. 인식하는 내가 있기에 세상이 존재하는 거냐고, 내가 죽으면 나도 세상도 사라지냐고 묻는다. 상상한다. 제한속도를 무시하고 어딘가를 향해 바삐 가는, 걱정 없어 보이는 저 비싼 차 위로 뛰어드는 죽음을...
두말한다. 아니지 아니야. '나'의 인지력이 사라지고 심장의 고동이 멈춰도 도로 위에 흩뿌려진 피를 닦을 누군가는 있겠지. 누군지 몰라도 개고생 하겠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인생 최고의 트라우마를 선물하겠지.
깨어진 관계가 원망스럽지도 밉지도 않다고 미화시킨다. 힘닿는 곳까지 사랑했다고... 속이 후련하다고... 그런데 눈이 퀭하고 마음이 시리다. 많이 아프다고 속 깊이 아려오는 심장이 말한다.
이 지경에도 삶을 가동하는 톱니바퀴는 멈출 줄 모르고 여기저기 맞물려 돌아간다. 애써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근육이 빠지는 것인지 살이 빠지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체중이 줄어든다. 입맛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일상. 하지만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렵다. 사람들을 보는 것도 그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어렵다. 아무렇지 않은 듯 어설픈 연기로 하루를 보내기가 어렵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익명성 사이로 도망 다니려 해도 걷는 것도 어렵다. 어렵다. 어려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집 벽에 기대어 앉아, 이대로 집의 일부분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다. 강하게. 또 강하게... 아무 이유 없이 집이 되어서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과 감정을 갖지 않고 그냥 있는다. 그냥. 그냥. 그냥.
느낌표 하나. 무서운 영화를 상상한다. 실체가 없는 공포보다 실체가 있는 것이 조금은 덜 무섭지 않았나. 이별을 마주하기로 한다. 마트에 간다. 500원짜리 지점토 3개를 산다. 소리 없는 울음으로 오래도록 주물러 빈 토기를 만든다. 오븐에 굽는다. 구멍을 흙으로 메우고 씨앗을 심는다. 그리고 이름을 붙인다. '기억의 단지'라고...
진동소리가 들린다. 문자를 본다. 번거로운 과정으로 고생했지만 그네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단다. 고생했단다. 의미의 의미를 더하는 문자 앞에서 생각한다. 정말 이 하루의 종지부를 찍는구나.
허리가 아프다. 서 있기 어려운 아픔이다. 시간의 평행봉 위에 간신히 서 있던 몸이 기어이 균형 잃고 떨어진다. 삐거덕삐거덕 긴긴 비명이 들린다. 젠장 어떻게 돼먹은 게 침대도 아프냐.
한 낮과 한 밤이 유유히 지나갔지만 생각의 블록들을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