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의 공포

by 인디




친구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총기 넘치는 분이었는데 나이가 드시면서 혼자서 라디오를 켜는 것도 어려워하셨다고요. 버튼을 잘 못 눌러서 라디오가 고장 날까 주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사람의 용기는 매년 조금씩 작아져 결국엔 라디오의 버튼을 누를 만큼의 용기도 남지 않는 걸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일상적인 것을 무서워하면 왠지 심술이 났습니다. 핸드폰에 낯선 알림이 떴을 때, 티브이에 신호가 잡히지 않을 때, 엄마는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저를 부르기 일쑤였습니다. 그냥 뭐라도 눌러보지 그랬냐 물으면 엄마는 그러다 고장 나면 어떡하냐고 했습니다. 여행 중 새로운 대중교통 시스템을 맞이할 때면 뭐든 마구 눌러보거나 카드를 넣어보는 저를 보며 엄마는 매번 기겁했습니다. 카드가 안 나오면 어쩌려고, 돈이 막 빠져나가면 어쩌려고, 엄마의 수많은 만약 속에는 부정적인 일들만 가득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엄마의 인생도 환희보다는 실망이 더 많았을 겁니다. 소녀시절 장래희망부터, 영원할 줄 알았던 첫사랑, 피땀 흘려 일궈낸 자식 농사까지 연이은 실망 끝에 지금의 엄마가 있는 거겠죠. 유구하게 이어진 실망의 역사 안에서 그저 반사적으로 먼저 불행을 예상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용기의 크기는 그대로지만 그렇게 누적된 실망의 무게가 용기를 압도해 버리는 것이겠지요. 기꺼이 할 수 있는 게 적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는 몰라도, 저는 나의 노화보다 부모의 노화를 받아들이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엄마를 통해 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저에게도 버튼이 무서워지는 날이 올 거란 것이 두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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