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의 기억

by 인디

엄마를 보면 말뚝에 매어놓은 코끼리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어린 코끼리를 말뚝에 매어 놓으면 어른 코끼리가 되어서도 여전히 말뚝에 매인채 도망가지 않는다고 하지요. 작은 말뚝이 어린 코끼리에게 새겨놓은 불가능에 대한 기억은 어른이 된 코끼리의 가능성마저 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엄마는 가난으로부터 쉽게 포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원하는 것을 가져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끝내 가지고 싶지 않게 됩니다. 욕구도 풀과 닮아 자꾸 밟아주다 보면 결국 돋아나지 않게 되는 것처럼요. 욕구가 사라진 곳을 채운 말은 그저 ‘괜찮아’ 였습니다.


엄마의 괜찮아는 제 기분을 괜찮지 않게 하곤 했습니다. 여행 중, 10년즘 전에 처음 장만했던 선글라스가 부러져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장에 가서 구경해 보자는 제안도 어떤 게 마음에 드냐는 물음에도 엄마는 고개만 저었습니다. 제가 임시로 테이프로 붙여둔 선글라스를 끼고 괜찮다고만 하는 엄마가 답답했습니다. 결국 엄마는 대형마트에 파는 싸구려 선글라스를 하나 골랐고 저는 ‘멋없는’ 엄마한테 잔뜩 심통이 났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고 엄마는 제 곁에서 묵묵히 걸었습니다.


재미없는 영화처럼 이런 하루는 그냥 빨리 끝났으면 싶은데 스페인의 해는 참 길었습니다. 저녁 9시는 되어야 사그라질 저녁 볕을 쐬러 작은 마음을 추슬러 저녁 산책을 갔습니다. 엄마는 이리 가보자, 저기로 가보자고 저를 이끌어 한적한 공원과 작은 골목길을 누볐습니다. 담장 안 활짝 핀 자목련에 아직 피지 않은 등나무 꽃봉오리에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며, 그래 이거면 됐지 싶었습니다.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사지 않아도 마치 동네 주민처럼 어슬렁거리는 한가로운 저녁. 이 사치스러운 방학을 갖기로 한 것만으로도 엄마에겐 말뚝의 경계를 벗어나는 말뚝을 뽑아내는 흔드는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괜찮단 그 말도 어쩌면 진심이겠죠.


가족이라도, 연인이라도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깜짝 놀랄 만큼 스스로가 생소한 날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군요,라는 인정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저는 자주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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