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_뉴욕
마법천자문 책을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어 보는 너희는 특별히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너희가 더 아기였을 때 너희의 최애 동화는 [방귀 시합]이었는데. 방귀로 서로에게 절구를 날려버릴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던 너희가 생각나. 나에게도 애정이 식지 않는 동화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공주와 완두콩]이야. 콩으로 진짜 공주인 지 알아내는 기발함도 재미있었고, 푹신한 침대 밑의 작은 불편함을 알아채는 예민함을 갖추고 신세를 진 집주인에게 불편해서 잠을 설쳤다고 말하는 솔직하고 당당한 공주가 매력 있었거든.
크리스마스를 맞아 Macy’s 백화점에는 동화책 테마의 창문 장식을 선보이고 있었어. 백화점 옆을 걷다가 [공주와 완두콩]의 한 장면으로 꾸며져 있는 창을 우연히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콩 한 알 위로 겹겹이 쌓인 매트리스 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공주의 모습을 반짝이는 뉴욕 한복판에서 만나다니 어찌나 반갑던지. 하지만 뉴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백화점의 그 창문도, 센트럴 파크도, 브루클린 다리도 아니고 난생처음 먹어본 스테이크도 아니었어.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자 시간이 멈춘 듯 도로에 멈추어 서던 수많은 자동차들이었어.
사이렌 (사람들을 유혹하는 노래를 부르는 신화 속 Siren이 어원이야)이 본연의 힘으로 도로 위의 자동차들을 멈춰 세운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건, 그만큼 우리나라의 사이렌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방증하는 것일 테니 사실 씁쓸한 일이지. 위급한 환자를 실은 구급차가 병원에 늦게 도착해 골든 타임을 놓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접할 때면 그 장면을 떠올리곤 해. 우리는 모두 바쁘고 누구보다 급하니까 누가 더 급한지 식별하기 어렵게 되었거든. 아마 미국처럼 바쁨의 우선순위를 법규로 정리해 두고 순서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되게 벌금을 매겨야 할지도 몰라.
다들 바쁘지 않은 한가로움을 좋아할 것도 같지만 둘러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고. 아마 대부분 바쁨은 사회의 인정이고, 가치의 증명일 테니까. 너희는 하루 종일 놀아도 더 놀고 싶은데, 우리는 언제부터 여유가 생기면 마음 한편이 초조해지게 되었을까. 하루 종일 웃고 놀기만 해도 괜찮은 너희를 상대하는 게 사실 가끔은 버거워도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앞으로 바빠지기만 할 너희의 미래를 미리 위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