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_아레키파
볼리비아의 ‘달의 계곡’은 지구가 아닌 듯한 풍경 속에서 지구인이 아닌 듯한 포즈들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다녀온 후에는 더 큰 추억을 만들어 주었어. 우리는 달의 계곡에 다녀온 후 서둘러 숙소에 맡긴 배낭을 찾아 저녁 버스를 타러 이동했어. 워크인으로 찾아가 머물렀던 허름한 숙소였지만 하루 종일 짐까지 맡아준 것에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고 다정하게 손을 흔들며 떠났지.
먼 길을 달려 국경을 넘어온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식사를 하러 나가려던 참이었어. 근데 친구가 당황한 목소리로 돈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친구는 배낭 앞 주머니에 남은 대부분의 현금을 다 넣어뒀었다 했고, 의심 가는 정황은 있지만 함부로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손 쓸 방법은 없었지. 둘 다 추가로 환전할 비상금도, 돈을 인출할 카드도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건은 나의 남은 여비를 가지고 어떻게든 이 여행을 이어가는 것뿐이었어.
길에서 잘 순 없으니 숙소는 어떻게든 구해야 하고, 이 멀리까지 와서 보고 싶은 것들을 희생할 순 없었어. 결국 줄일 수 있는 것은 식비였지. 마트에서 신중하게 고른,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멸균 우유와 대용량의 그래놀라가 이때부터 우리와 함께 하기 시작했어. 그나마 조식이 포함된 숙소에선 최대한 조식을 먹었지만 한 끼는 영양가 넘치는 그래놀라와 우유, 다음 끼는 고소한 우유와 그래놀라인 식이었지.
그 와중에 콘도르를 보러 가겠다며 야심 차게 2박의 투어를 나서기도 했어. 투어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함께였고, 강제는 아니었지만 가이드에게 추천받은 식당에 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가는 분위기였어. 하지만 식사 시간만 되면 우리는 따로 먹겠다며 홀연히 그들과 헤어졌고 으슥한 데를 찾아가 우유에 만 그래놀라를 허겁지겁 먹었지. 화나거나 우울하진 않았냐고? 아니, 정말 놀랍게도 매번 웃음이 터졌어.
콘도르를 기다리던 깊은 계곡의 새벽빛, 난다기보다 바람을 타고 떠오르던 콘도르들, 마야인들의 해골 더미, 가슴이 먹먹하게 펼쳐진 빛바랜 평야와 오래된 도시들. 먼저 귀국하는 친구와 헤어지는 날까지 허기 속에서 이어진 여정에서 우리는 멋지고 인상적인 것들을 제법 많이 봤지만, 그래놀라의 존재감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었어. 그때 먹은 그래놀라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래놀라 앓이를 했다고. 이후로 많은 그래놀라를 먹어봐도 절대 그 맛을 찾을 순 없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황당하거나 막막한 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참 달라지기도 해. 그리고 그런 일들은 곰곰이 뜯어보면 꼭 엉뚱하게 웃기는 구석이 있더라고. 뭣도 모르는 순진함으로 발발된 사건을 막무가내로 괭이로 막고 호미로 막아가다 보면, 점점 꼬여 만신창이가 된 채 끝내 결말에는 도착해 있으니까. 그러고는 이렇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심지어 약간 우쭐거리며 ‘내가 그때 왼 손엔 우유를 오른손엔 그래놀라를 쥐고 말이야’ 라며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는 거지. 생각해 보면 얼마간의 돈으로 이런 추억(이라 쓰고 무용담으로 써먹는다)을 얻다니 얼마나 행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