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_방비엥
내 생계를 책임지는 진짜 어른이 되면 친구를 만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 마음의 여유는 차치하고 취향이나 가치관이 꽤나 형성된 이후라 서로를 고르는 기준도 까다로워지고 무엇보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유연성이 둔해질 테니까. 그런데 ‘직장에서 나는 손과 머리만 쓰는 기계다’ 생각하며 감정을 덜어내려 해도 (어쩌면 당연히도) 동료들에게 먼지 같은 일상의 마음이라도 쌓여가더라고. 일주일에 5일을, 하루에 9시간 이상을, 꼬박 몇 년을 보내고 나면 그렇게 소복이 쌓인 마음이 어찌나 묵직해지는지. 느리지만 자연스럽게 친구가 생겼어. 나는 우리를 코코넛과 자두라고 칭했어. 친구는 겉으론 차고 무뚝뚝한 인상인데 알고 보면 누구보다 부드럽고 유연한 사람이었고 나는 겉으론 밝고 쾌활하지만 거리를 더 좁히려고 하면 반드시 경계에 부딪히는 사람이었거든. 그 친구는 많은 낮, 왠지 겉돌던 나와 점심을 함께 해주었었고 많은 밤, 책을 읽고서 함께 걸어 주었지. 그 덕에 나의 반지하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웃음이 가득했어. 내가 퇴사하던 날은 더 좋은 데로 가라며 보라색 운동화를 선물해 줬어. 같은 직장이라는 소속감이 사라지면 쉽게 느슨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관계도 친구가 되면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라오스 여행은 그렇게 내가 어른이 되고 만든 첫 친구와 함께였어.
라오스에 도착하고 (지금은 훨씬 이동이 편해졌지만) 오랜 시간 버스로 달려 방비엥에 와서도 덜컹이는 쏭태우를 타고 블루라군까지 찾아갔어. 나는 나무에 걸린 밧줄을 타고 몸을 던지는 다이빙의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수영을 못하는 친구는 내 꼴을 비웃으며 물가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어. 물장구를 치다가 돌아봤는데 친구가 안 보이는 거야. 두리번거리니 친구가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어. 다행히 곁에 있던 사람들이 미끄러져 물에 빠진 친구를 도와줬지만 내가 물가로 헤엄쳐서 가던 그 순간이 얼마나 슬로모션으로 느껴졌는지. 마치 새우잠의 꿈속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팔다리가 어찌나 무겁던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에 더 이상의 물놀이는 포기하고 루앙프라방으로 갔어. 매일 똑같은 야시장에서 비슷비슷한 무늬의 파우치를 붙들고 어떤 걸 살지 세기의 고민을 했고 전통 공연을 보러 갔다 졸지에 무대에 끌려 올라가 덜컹거리며 춤도 췄지. 너무 달다고 투덜대면서도 폭우를 뚫고 크레페 원정을 떠나기도 했고 토사를 잔뜩 품고 쿨럭거리며 흐르는 메콩강을 바라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참 많이도 했어.
어쩌면 친구의 여행은 내 기억만큼 재미없었을지도 몰라. 어디선가 만난 여행자가 아시아 최고의 여행지로 꼽은 걸 기억하던 내가 라오스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다정한 마음에 흔쾌히 따라와 줬던 걸 거야. 아직 방송에도 나오기 전이라 그저 생소한 나라 라오스를, 구불거리는 산을 넘어 방비엥을 그리고 질척이는 흙길을 달려 블루라군까지 말이야. 나는 그 이후로도 더 좋은 계절에 더 발전한 라오스도 여행했지만 라오스 하면, 그 친구와 함께 여행했던 날들을 떠올려. 그때의 사진을 보면 흐린 날로만 가득한데 말이야. 그렇게 장소를 압도하는 사람의 힘을 알려주었던 그 친구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난 잘 몰라. 어떤 친구들은 불만이 없어도 싸우지 않아도 그냥 멀어지기도 해. 그에 대한 어른의 이유는 (아니 변명은) 뭔가 복잡해 보여도 또 막상 들어보면 죄다 시시할 테지만. 그리곤 희미해진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더 노력했다면 달랐을까, 하고 부질없는 가정법을 써보곤 하는 거지.
할아버지께서 (그러니까 너희의 증조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어. 서울로 오신 할아버지는 무료한 많은 시간을 아파트 벤치에 앉아 보내시곤 했어. 어떨 땐 혼자셨지만 자주 다른 할아버지와 함께였지.
- 할아버지 친구는 어디 사세요, 어느 날 할아버지께 여쭤봤어.
- 무슨 친구? 난 여기 친구 없다.
- 의자에 같이 앉아 계시는 친구요.
- 친구 아니다. 친구가 얼마나 어려운 건데.
그러게, 어쩌면 나는 너무 쉽게 생각했었지. 적적한 두 사람이 그저 의자와 시간을 공유한다고 해서 친구라고 부를 순 없는데. 또 어렵게 서로에게 친구 된 후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마음, 이해와 인정, 대화와 침묵을 필요로 하는지 말이야. 내가 아는 한 세상엔 참 공평하게도 공짜는 하나도 없더라고. 그래도 분명한 것은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