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법한 일

일본_오사카

by 인디

빈티지를 좋아하는 친구와 빈티지를 위한 여정에 나섰어. 일본에만 가면 멋쟁이 빈티지 의류들이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지. 별다른 조사 없이 즉흥적이었던 결정에 걸맞게 오사카의 빈티지는 사실 그렇게 대단한 규모도, 원산지(?) 다운 가격도 아니었어. 이럴 거면 부산에 갔지,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눈에 보이는 빈티지 가게는 빠짐없이 들어가 보는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말이야.


그렇게 빈티지를 부르짖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늦은 오후였어. 나름 빈티지 잡동사니로 묵직해진 가방을 오사카 역사의 물품보관함에 야무지게 맡겨두고 사진을 하나 찍어두었어. 그리고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 나섰지. 지나다가 본 카페에서 본 애프터눈티 세트를 체험해 보기 위해 친구를 따라나섰어. 여행에 동행이 있다는 건 이렇게 색다른 즐거움이 있기도 해. 혼자서는 하지 않았을 경험을 시도해 보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며 다른 친구에게 엽서도 쓰며 망중한을 한껏 즐겼지.


이제 슬슬 가볼까 하고 출발했는데 이런, 도대체 가방을 넣어둔 물품보관함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는 거야. (친구도 나도 길치지만, 나는 정말 길치지) 넓은 역사 안에 물품보관함은 한 군데가 아니었고 보관함을 대충 찍은 사진을 아무리 봐도 다 비슷비슷해 보였어. 여기인가, 저기인가 하며 잰걸음으로 찾아다니던 우리는 나중에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 겨우 가방을 찾아서 공항으로 나선 시각도 매우 빠듯한데 급행열차를 놓쳤어. 그때 택시라도 탔어야 하는데 둔해진 판단력으로 그냥 일반 열차를 타고 말았어. 최저가 비행티켓을 제공했던 항공사의 카운터는 우리가 도착한 시점에 이미 닫혀있었고, 실제 비행시간까진 시간이 꽤 있었지만 우리를 위해 카운터를 열어주진 않았어.


예기치 않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흔히 사람들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한다고 하지. 예기치 않은 나쁜 일이 생겼을 때도 똑같은 감각을 느끼게 되더라. 이거, 꿈인가? 여기서 다른 점은 불행을 맞닥뜨렸을 땐 최대한 빨리 생시임을 납득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허탈한 심정으로 오늘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하면 그냥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버리겠다, 고 선언하니 편도 비행 티켓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진 않았어. (멍청비용 지출에 마음은 퍽 어려웠지만, 하하)


사실 공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은 드물게 발생하지 않아. 여권을 잘 못 들고 와서 혹은 까먹고 와서 공항에서 긴급여권을 발급받은 이야기, 비행 날짜나 시각을 착각해서 혹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비행기를 놓친 이야기를 다양한 경로로 왕왕 들어왔지. 그럼에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오만한 착각은 어디서 왔을까. 확률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100%는 불가능할 텐데도 우리의 마음은 자주 확신에 기대어 실수해. 우주는 나 같은 오만한 인간을 싫어하는 게 분명하니, 한 번씩 슬쩍 밀어 미끄러뜨리는 거지. 그나마 짧은 노선의 편도 비행기 티켓 정도의 경고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야.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가 아니라 아, 나에게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비행기를 놓친 경험으로 각인된 이 생각은 불안을 깊게 하기보다는 되려 은근한 자유를 주더라. 내 실수로 망친 일에도 나 자신을 덜 잔인하게 몰아붙일 수 있는 변명이 되어 주기도 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당연하지만은 않게 받아들이는 감사의 계기가 되기도 해. 그런 의미에서 굉장한 우연을 뚫고 일어난, 내가 마무리하고 있는 건강한 오늘을 감사하며 자축해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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