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나에 대한 무모하고 대담한 희망

by 인디

흔히 상대 앞에서 온전한 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는 표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는가. 온전한 나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협적인가. 온전한 나에는 내 최고의 모습뿐 아니라 더 높은 비중으로 최악의 나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모순 집합체인 내가 가장 편안한 상태를 유지한 채 누군가에게 민낯을 드러내놓고 있으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고매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삼키시라고 대접하기에 날 것의 내가 너무 형편없어서는 도리가 아닐 테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인정해 주고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고, 어떤 모습이라도 수긍해 달라는 나의 요구는 상대에게 큰 도전인 만큼, 그런 대우를 받으려면 나 역시도 상대에게 동일한 수준의 대우를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도 내 작은 그릇에 넘칠 정도로 큰 각오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대에게 그만큼의 인내를 내어줄 만큼의 여유가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 결국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인을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최대한 인정하고 존중한다 정도일 텐데 그것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에 대한 해답일까. 희생이나 양보,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관계가 가능할까. 결국 관계 안에서 가능한 것은 타협과 양보로 적절하게 커스텀 된 ‘온전에 가까운 나’ 정도일 테고, 고집스럽고 못났지만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는 건 그저 혼자일 때뿐이 아닐까. 고독 속에서 온전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상태값 밖에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변변치 않은 온전한 나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 곱씹어 보다가, 함께 하기 위한 나에 대한 조율이 자발적이고 기꺼운 것이라면 그리고 변화 역시 그러하다면 그것도 내가 선택한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강요된 희생이나 자포자기한 굴복이 아니라 ‘자의적 선택에 의해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나’라는 포괄적인 의미로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게다가 나라는 존재는 적응하고 변화하는 생명체가 아닌가. 결국 온전한 나는 끊임없이 업데이트가 불가피하다.


지금의 나에 미지수 스펙들까지 포함이라니 왠지 더 더부룩하게 느껴지는 듯 하나 결국 거기에 희망이 있다. 나라는 사람이 현재와 미래 어느 시점에서든 완벽할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길 역시 변화 가능성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많은 부분 못났지만 노력하고 변화할 의지가 있는 나라면 대단히 기껍지는 않아도 그렇게 재앙까지는 아닐 거다. (그럴 거다. 그렇겠지..?) 내부 동기만으로도 스스로를 발전시켜 가는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평범한 나는 결국 함께 속에서 더 나은 버전의 온전한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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