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
# 아재개그
식당에서 양갈비를 야무지게 뜯는다. 참 맛있지만 벌써 좀 가벼운 음식이 먹고 싶다. 야심 차게 채소 샤슬릭을 시켰지만 다 떨어졌다고 한다. 젠장. 채소가 떨어지다니 다들 나랑 같은 마음인 걸까. 계산을 하려는데 어김없이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 북 아니면 남? 지금껏 많이 들어봤지만, K-Culture로 전 세계 젊은이들의 마음을 훔쳐 쥐락펴락하는 시대에 이 질문은 아재개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제발, 알잖아. 북한 사람 본 적 있니? 되물으니 안다며 멋쩍게 웃는다. 나도 그들을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다. 여행 중에 만났던 스웨덴 부부가 있었다. 남편분은 트럼프를 향한 내 애정도를 - 트럼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 적어도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 간단히 테스트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었다. 그는 꽤나 오래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었고 한국 경제나 정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 자연스레 북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한국에서의 나는 미사일 연습 정도가 아니면 북한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않고 지낸다. 무뎌진 탓인지 사실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되려 바깥의 시선을 만나다 보면 내가 북한에 대해 어떤 마음과 생각을 품고 있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고 말을 주저하게 된다.
# 잔돈
이곳에서는 동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1-2천 솜(Som) 정도의 잔돈도 잘 주지 않는다. 처음엔 숙소에서 2천 솜을 안 거슬러 주길래 잔돈은? 잔돈 없니? 하며 귀찮게 굴었다. (나중에 준다더니 주지 않았다) 이후 식당에 가보니 뒤에 따라붙은 몇 천 단위 솜을 받지 않고 계산해 주었다. 당연히 그때는 그저 의젓하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나왔다. 애매하게 달랑거리는 천 단위 솜은 상시로 올리거나 버려진다. 때론 내가 버리고 때론 그들이 버리면서 균형을 맞춰가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쪼잔하게 굴었다.
# 샤히진다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 이렇게 아름다운 묘지를 세워주면 어떨까. 누군가가 그런 수고를 해줄 리도 없지만 내가 고마워할 리도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그럼에도 죽은 후에도 무언가를 남기고 기억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뭘까. [코코]에서처럼 기억되지 않으면 사후 세계에서마저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라면 조금 더 이해가 가능할까. 한 묘 안에서 세명의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뭔가 의식을 지내듯 노래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성인이나 왕가의 후손이신 거예요? 그들이 누구든 덕분에 이곳이 단순히 과거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종교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리적으로 분명 불가능한, 신과 가까운 곳이라 믿는 곳에서 신에게 닿도록 노래하고 기도하고 공간을 어루만지는 사람들이 이곳을 과거에서 현재로 끌어온다.
# 구글맵
샤히진다에서 나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레기스탄 광장에서 비비하눔을 지나 샤히진다까지 닿는 너무 쉽고 빠른 멀쩡한 길이 있다. 나는 구글맵의 안내에 따라 인적 드문 골목길을 꼬불거리며 왔더랬다. 그나마 구글맵은 더 돌아가야 한댔는데 그럴 리 없다는 마음으로 샤히진다 앞 횡단보도를 찾아서 길을 단축시킨 나 자신이 뿌듯했더랬다. 심지어 어제저녁을 먹은 식당이 폐업했다고 뜬다. 믿을 수가 없어 길을 바꿔 그 식당을 지나쳐간다. 멀쩡히 장사 중이다. 진심 구글맵이랑 한 판 붙고 싶을 때가 있다.
# 아프라시압
7-14세기 고대도시가 있었던 이곳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러 오는 곳이라 했다. 아무것도 없으니 지킬 것도 없다. 덩그러니 반쯤 열린 문을 지나면 딱히 길도 없는 광활한 터가 나오고 무엇을 봐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걷는다. 걷다 보면 보이는 괜한 구멍도 파인 흙이나 경사면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건가 싶다. 그 위에 내 마음대로 고대도시를 세웠다가 부쉈다가 한다. 어쩌면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진흙벽으로 세워졌을 고대의 도시를 다시 복원시켜 본다 한들 진짜가 아닐 테고 이렇게 시간에 풍화되어 무로 돌아가도록 두는 게 순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 경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물으면 망설임 없이 황룡사지터를 고른다. 기단과 터만 남은 그곳은 유난히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을 맞으며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이 참 좋았더랬다. 이곳에 방목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양처럼 나도 자유롭게 고대도시의 기억 위를 쏘다니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문을 지나 현실로 돌아간다.
# 차
여기선 끼니에 대부분 차가 따른다. 홍차나 녹차라는 간단한 선택지뿐이지만 무엇을 고르든 한 잔이 아니라 포트를 준다. 이상하게 포트로 된 차를 받으면 한국인 정신에 사로잡혀 뽕을 뽑으려 한다. 그래서 한 잔만 먹어도 될 것을 괜히 바쁘게 잔을 채워가며 식사를 한다. 그렇게 두어 번의 식사를 마치면 카페인에 익숙지 않은 심장은 하루 종일 빠르게 뛰는 느낌이다.
# 환전
비가 온다. 12시가 지나니 비가 좀 잦아들어 오늘로 미뤄뒀던 건축물들을 보러 슬슬 나와본다. 입장료를 낼 현금이 부족해서 atm을 3군데 돌았지만 카드가 동작하지 않는다. Technical reason이라고만 뜨니 네 탓인지 내 탓인지 구별이 어렵다. 다른 지역에서는 잘 되었었으니 네 탓을 해본다. 조금 가진 달러를 환전이라도 하려고 은행에 가니 점심시간이다. 처음엔 점심시간인지 모르고 은행에 자꾸 난입하려고 해서 어떤 할머님이 친절하게 먹는 시늉으로 가르침을 주셨다. 30분을 기다려 40달러를 환전한다. 언제부터 가지고 있던 달러인지 모르지만 챙겨 온 나를 칭찬해 본다. 나에게 보기 드문 준비성이었다.
+ ) AI한테 atm 먹통에 대해서 토로했었는데 그 이후에 뭘 물어도 자꾸 너 절약모드니까, 가성비 추천, 무료 스폿, 이런 말을 사족으로 붙여서 주절거린다. 공부 되게 잘하는데 사회성 없는 친구랑 대화하는 건 이런 기분일까.
# 레기스탄
사진 좀 찍어줄 수 있니. 아까부터 나를 보며 우물쭈물하던 여성이 드디어 용기를 내어 말을 건다. 카메라를 들고 혼자 여행하는, 만만해 보이는 관상의 여행자는 사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 한국인에게 한 장은 정 없음 이니까 위치를 바꿔서 두 장을 찍고 핸드폰을 돌려준다. 날이 어두워져 출구를 찾지 못해 함께 헤매며 이야기하게 된 이 여성은 모로코에서 왔다고 했다. 이곳에 오는 게 꿈이었어,라고 말한 그녀는 9년 전에 사마르칸트의 사진 한 장을 보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9년이 지나 드디어 여기에 왔다고 했다. 2시간 전에 도착한 후 빨리 이 광장을 보고 싶어서 달아나온 참이었다. 그럼 내가 사진 더 찍어줄게.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오늘은 붉은 달이 뜬다고 했다. 내심 붉은 달이 뜬 사마르칸트를 기대했지만 나에게 그런 행운은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꿈을 이룬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니 멋진 밤이었다. 그녀의 기쁨으로 반짝이는 눈빛이 내가 레기스탄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었다.
# 엽서
부하라의 어떤 모스크 앞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파는 남자가 있었다. 꽤 마음에 들었지만 우즈벡에 도착한 지 이틀째라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그런데 부하라를 떠나고 나서도 그 가판대가 계속 생각나는 거다. 역시 느낌을 따라 그냥 샀어야 하는데. 인연이 닿았지만 인연이 없는 엽서라고 생각하기로 했음에도 이곳에서 파는 뻔한 이미지들을 볼 때마다 그 가판대를 떠올렸다. 그게 뭐든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면 조금은 괴로워진다.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구경 다니는 건 그렇다 쳐도 찾는 시간이 길어지면 조바심마저 나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흔히 파는 엽서지만 막상 마음에 드는 엽서를 찾기는 쉽지 않다. 사마르칸트는 우즈벡 최고의 관광지임에도 (혹은 최고의 관광지라서?) 그저 비슷비슷한 기념품 샾에 비슷비슷한 관광지용 엽서만 늘비하다. 타슈켄트로 공을 넘겨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들른 작은 아트샵에서 드디어 마음에 드는 엽서를 발견한다! 기분이 좋아져 답지 않게 이 엽서가 이 도시에서 파는 것 중 가장 예쁘다고 주인에게 너스레마저 떤다. 엽서 몇 장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역시 집착에마저 장점이 있다며 혼자 흥얼거린다.
+ ) 갑자기 좀 아쉬운 마음이 들길래 부하라의 교훈을 받잡아 빗길을 다시 되짚어가 더 샀다. 왠지 나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부끄러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주인에게 친구 것을 사러 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