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슈켄트
# 말
분명히 기차앱에서는 기차에 2인과 1인의 좌석이 있어서 야심 차게 1인 좌석을 예매했는데, 막상 기차에 타니 6인짜리 컴파트먼트다. 내가 봤던 건 꿈인가 싶다. 뭐든 어떠리. 모로 가도 타슈켄트로만 가면 된다. 컴파트먼트의 유리문을 열지 못해 이리저리 시도하고 있으니 안에서 나의 마임 공연을 지켜보시던 분들이 문을 열어주신다. 할머님이 날 쳐다보며 무언가를 물으시고 주변 분들과 토론 모드다. 자기소개 시간이구나, 한국에서 왔습니다. 신사분이 내 배낭을 번쩍 들어 짐칸에 올려주신다. 라흐맛. 어느 나라에 가든 적어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는 현지어를 써보려고 노력한다. 근데 주문을 외우는 거 같아 말맛이 좋은 인사(아살로무 알라이쿰)는 막상 하려면 입에서 안 나온다. 아쉽다. 할머님이 계속 무언가를 말하셔서 번역기를 실행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우즈벡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계셨다. 왠지 소통이 전혀 안되더라니. 우즈벡어와 러시아어가 지층처럼 겹겹이 쌓인 이곳의 현재를 보면 과거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같다.
# 지하철 1
타슈켄트의 지하철 발권기는 마초였다. 천 단위 솜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즈벡의 정산 세계관과 정확히 맥을 같이하며 정확한 돈이 아니면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겠다 선언했다. 넣은 지폐를 구출하고자 취소라도 하고 싶은데 취소 버튼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직진이다. 우즈벡 전화번호를 주면 잔돈을 그리로 보내준다지만 여행자가 전화번호가 있을 리가. 뒤로도 앞으로도 진행할 수 없다. 그 화면에 멈춘 채 뒷사람들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냥 숫자를 마구 눌러 넣어주니 진행이 가능하다. 내가 유연성이 부족했다. 개찰구에서 어렵게 발권한 QR티켓을 태깅하려 보니 NFC가 되는 카드를 태깅하고 타도 된다. 정보가 부족하면 손발이 고생한다.
# 지하철 2
타슈켄트의 지하철은 언제 타도 붐빈다. 좁고 어두워 더 붐벼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사람들의 교통수단이기도 하지만 냉전시대의 산물이라고 한다. 핵전쟁에 대비한 방공호 기능까지 갖추면서도 역사에 이념과 사상까지 불어넣은 색다른 문화적 작품이다. 이색적으로 꾸며진 역들이 있다기에 여기저기 돌아다녀 본다. 지하철역에 이렇게 테마를 주어가며 꾸미고 심혈을 기울이다니 구소련인들은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었군 싶다. 게다가 우주테마는 당시에 그들이 우주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게 해 준다. 그들의 미감에 입을 틀어막으며 놀랄 것까진 아니지만 작명센스가 마음에 든다. Xalqlar Do‘stligi(민족의 우정), Paxtakor(면화 노동자)에서 Kosmonavtlar(우주인)까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이다. 안내 방송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번 역은 민족의 우정역입니다. 다음 역은 우주인역입니다. 하고 혼자 중얼거려 본다. 뭐지, 멋진데?
# 지하철 3
지하철역에서 싸우는 연인을 봤다. 둘이 서서 무언가를 심각하게 얘기하다가 여자가 가버리니까 남자가 따라가서 팔을 잡았다. 둘이 다시 무언가를 얘기했다. 잘 화해하시라고 마음속으로 빌며 지나친다. 이다지도 다른 문화에서 백만 가지 다른 이유로 싸우겠지만, 우리는 모두 참 보편적인 감정을 공유하며 산다고 생각한다. 싸울 사람이 없어 좋은 나는 날이 따스해 공원 벤치에 누워있다. 타슈켄트 사람들의 삶의 조각들이 스쳐가는 걸 그저 지켜본다.
# 한국
한국의 대기업 전광판이 아니라도 가끔 한국을 발견한다. 아프라시압 유적지에 덜렁 놓여있던 표지판에서도 Korea라는 각인이 있었다. 찾아보니 한국에서 발굴에 참여한 곳이라 한다. 비비하눔의 휴지통에서도 태극마크와 한글을 발견했다. 우즈벡의 문화재 관리를 위해 후원한 흔적이라고 한다. 세계적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는데 기꺼이 한국의 우수한 기술과 자본과 인재들의 노력이 함께 녹아있다니 마음이 좋다. 미술관에 들렀다가 우즈벡 이민 2세대로 추청 되는 예술가의 작품을 만났다. 한국과 우즈벡의 닮은 삶의 모습을 교차해 그린 작품이 많다. 어떤 작품은 잉크를 먹처럼 사용해 수묵화 같은 느낌도 든다. 분명 내가 아는 풍경들인데 낯선 곳에서 만나니 다시 찬찬히 뜯어보게 된다. 그림들에선 두 나라에 대한 애정과 온기가 가득 느껴져 내 마음도 뭉근해진다.
# 음식
이곳에 와서 고기 베이스의 음식만 먹다 보니 지나치게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계속해본 게 언젠지 싶다. 그 다양한 고기들 속에서 되려 기억에 남는 음식은 호박삼사(samsa)와 체리잼이다. 사실 체리도 잼도 좋아하지 않는데 부하라 가정 숙소에서 아침으로 내어주셨던 체리잼은 체리의 과육이 그대로 살아있는 신선한 잼이었다. 윤기 있는 검붉은 잼 속에서 체리를 하나하나 집어먹으면서 따뜻한 차를 마시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그런 체리잼은 만나기 어렵겠지만 타슈켄트를 떠나기 전에 호박삼사는 꼭 다시 먹어야지.
# 여성의 날
길에 왠지 꽃이 넘쳐난다. 꽃으로 장식한 곳들도 꽤 보인다. 생각해 보니 곧 3월 8일, 여성의 날이다. 예전에 폴란드 여행 중 길을 걷다가 튤립을 한송이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땐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지만 꽃 한 송이에 기분이 들떴었다. 작년에 엄마랑 여행할 때도 독일의 한 마트 직원분께서 엄마와 나에게 꽃을 한 송이씩 주었었다. 엄마가 활짝 웃으며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이동 중이라 정신이 없어 기차에 올라탔을 땐 이미 없어져 있었지만. 구소련 문화권에서는 여성의 날을 봄이 오는 것과 함께 축하한다고 한다. 원래는 빵과 평화를 외치던 여성의 파업이 혁명의 불씨가 되고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라지만, 노동절이 노동운동에서 출발해 지금은 그저 소중한 휴일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 상징만 남은 것이겠지. 그게 뭐든 단지 여성임을 축하받는 느낌도 좋고 상기된 사람들의 얼굴이나 들썩이는 분위기도 괜히 설렌다. 빼빼로든 삼겹살이든 서로 축하할 날을 만들어 누구라도 재밌으면 그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거 아닌가 싶다.
# 룸메이트
씻고 돌아오니 누가 호스텔 방의 문을 잠갔다. 새벽에 입국해 지친 몸으로 당도한 여행자가 뒤늦게 문을 열며 미안해한다. 우리는 이층 침대에 배정되었는데 나도 처음 겪는 굉장한 높이다. 조심스레 내려오는데 한세월 걸렸음을 안다. 그녀는 새로운 전공을 공부하며 일주일 전에 세계 여행을 시작한 참이다. 사마르칸트에 가고 싶었지만 근시일 내의 기차는 모두 매진이고 비행기 티켓은 너무 비싸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6일이나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벚꽃시즌의 일본에 가기 전에 상하이에도 가고 한국에도 가야 하니 기차표를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사마르칸트는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겠지, 하며 웃는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디에나 유럽인들이 있다, 어디에나! 근데 이상할 정도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볼 수 없었고 그녀가 내가 목격한 첫 유럽인인 것 같았다. 우리는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는 유럽인의 비인기 지역으로 둘만의 결론을 도출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여행에서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오래전 여행 중인 브라질 소녀 둘을 만난 적이 있었다.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탐색 겸 여행 중이라고 했다.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슨 공부가 하고 싶은지, 공부가 하고 싶긴 한지 생각해 보고 있다고. 당시에 나는 갭이어(gap year)의 존재도 잘 몰랐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었다. 나에 대해 고민해 볼 시간이라니, 그런 게 필요하다곤 느꼈어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쩌다 재수라도 하면 남들에 뒤쳐진 것 같은 마음에 전전긍긍하도록 키우는 나라의 사람에게 얼마나 숨통 틔이는 말이었던지. 비단 돈이 아니라 시간에 인색한 우리는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에 난색을 표한다. 심지어 ‘허투루’에 대한 정의가 모두 다를 텐데도 말이다. 내가 건너 알던 한 소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아버지께 ‘천산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천 개의 산을 오르며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당연히 그 희망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날 아버지는 아들의 신박한 개소리에 기가 막혀 약주를 잔뜩 하셨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가끔 천산대를 꿈꾸던 이상적인 소년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한다. 살면서 백산이라도 올랐을까.
# 엽서
사실 나는 엽서를 모으는데 찾을 수가 없네. 자연스럽게 초르수 시장에서 엽서를 사려고 했는데, 발견이 지체되자 하루의 일행에게 엽서 집착증을 고백한다. 그녀는 검색해 보니 서점에 가면 찾을 수 있다며 광기 서린 나를 안심시킨다. 서점이 많다고 해서 찾아간 우주인역 근처에는 일요일이라 닫은 서점이 태반이다. 우여곡절 끝 근처 가게에서 괜찮은 엽서를 겨우 발견했는데 너무 비싸다. 그녀는 나에게 너무 비싼데 정말 살 거야?라고 속삭인다. 눈이 돈 나는 우즈벡의 마지막 날이라며 손에 쥔 엽서를 더 움켜쥔다. 그녀는 작은 컵과 소서를 보여준다. 심지어 두 개를 합친 가격이 엽서보다 싸다. (이 가게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래도 살 거야?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이 정도 바가지를 써줄 순 없다 싶어 엽서를 내려놓는다. 그녀는 공항에 있을 거라며 날 또 안심시킨다. 사마르칸트에서 샀으니까 하며 대충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옷을 구경하러 간 편집샵에 엽서가 보인다. 너무 신이 나서 가격을 물으니 주인분이 오늘은 여성의 날이니까 선물이라고 한다. 작은 열쇠 장식품도 예쁘게 포장해서 나에게 건넨다. 여성의 날이니까 이것도 선물이야. 여자인 게 기뻤다.
# 동행
혼자일 땐 무한의 자유를 누리지만 일행이 생기면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을 도전하게 되는 즐거움이 있다. 초르수 시장에서 나오며 나는 오늘 여기 말곤 딱히 계획한 게 없다고 하자 그녀는 일본 정원에 가고 싶다고 한다. 그녀를 따라나서며, 진짜 일본 느낌은 아닐 거라고 그녀의 기대치를 낮춰 놓는다. 하지만 그녀가 곧 일본에 가서 비교해 볼 수 있을 테니 선행 학습이다. 와보니 노력은 느껴지지만 뭐 당연히 일본과는 아직 멀다. 그래도 잉어가 돌아다니는 연못 옆에 누워 일본을 느껴본다. 어디선가 우즈벡의 흥겨운 음악이 들려온다. 저 음악만 없어도 좀 더 일본 같을 거야. 둘이 웃는다. 정원을 나서다가 호수에서 현지인들이 잔뜩 타고 있는 자동차 보트를 본다. (일본 정원 컨셉 어디 갔냐고요) 흥미를 보이는 그녀와 타보기로 한다. 거위를 무서워하는 그녀와 거위를 피해 도망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몰랐다. 음식에 민감하고 잦은 배앓이를 해서 현지식에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그녀가 나를 따라 삼사를 먹어 본다. 엽서와 아무 상관없는 그녀가 엽서광을 따라 엽서 헌팅에 나선다. 현지의 드레스 쇼핑 같은 건 관심도 없는 내가 그녀를 따라가 드레스 고르는 걸 돕는다. 이색 음료를 즐기는 그녀를 따라 러시안 커피도 마셔본다. 우리는 오늘 서로의 하루에 많이 간섭했고 새로운 경험을 주고받았다. 일본에 가기 전 서울에 들른다는 그녀는 내가 한국에 없어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서로의 인생에 다시 나타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그녀로 인해 조용할 뻔했던 우즈벡에서의 내 마지막 날이 왁자지껄하게 빛났다. 우리는 기쁘게 작별의 포옹을 하며 서로의 여행길에 용기와 모험을 빌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