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나름 7월호: 더브릭스 이혜린 편
기고자 소개
이혜린
2019년 결성된 ‘The Bricks’의 대표로, 자살 예방을 소재로 한 스토리 어드벤처 게임인 <30일>을 제작했다. 국내 양대 마켓에서 10만 다운로드를 달성하는 등 메시지 뿐만 아니라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더브릭스는,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게임'을 목표로 활동 중이다.
※ 게임 <30일>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게임으로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게임으로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3년 전 나는 ‘당연히 그렇다’ 고 대답했다.
게임의 본질은 ‘목표를 성취하는 경험’이다. 현실과 닮은 가상의 세계에서 어떤 목표를 이룬다면 그 과정과 경험은 기억에 강렬하게 남을 것이다. 강렬히 남은 기억은 현실에서 유사한 상황을 만났을 때 게임에서의 경험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플레이했던 게임의 목표가 ‘사회에 이로운 어떤 것’이면, 게임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대학을 다닐 때 접했던 임팩트 게임(소위 시리어스 게임으로 불리는)의 경험과, 게임 기획 전공수업에서 들은 “게임은 종합 예술” 이란 문장은 졸업 작품을 만드는 내내 머릿 속에서 맴돌았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메시지를 담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 여정을 함께 할 팀원을 모으고자 대학 졸업을 유예한 채, 대학연합게임제작동아리에 가입해선 서툴게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소재를 찾기가 막막해서 “대한민국의 사회문제”를 검색했다. 그 때 1면에 나온 기사는 ‘하루에 44명이 자살하는 대한민국의 자살 실태’. 기사를 읽자마자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는, “그들의 죽음을 미리 막을 수 있었다면.”이라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살.. 예방.. 게임?
<30일>을 처음 만드려 할 때를 떠올려보면, 자살 예방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공대생이 감히 어려운 주제를 택해버렸다고 생각한다. ‘30일’이라는 기간도 뚜렷한 근거가 있던 것이 아니라, “30일 정도를 지켜본다면 주변 인물과 사망예정자 사이 라포(rapport, 상호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에 충분치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설정했다. 타인이 개입한다면 누군가의 자살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는 게임의 메인 아이디어 또한 단순 가설일 뿐이었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
<30일>을 만듦에 있어 내게 준비된 것이라고는 학부시절의 게임 개발 경험, 취지에 공감해준 팀원들, 그리고 강력한 의지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살이라는 소재를 함부로 다루고 싶지 않았고, 유경험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세심한 접근법을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생생한 현장 자료와 자살하려는 심정에 대한 이해, 자살 예방에 대한 올바른 방법과 미디어에서의 자살 언급 시 유의사항 파악 등 조사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했다. 수많은 자료에 더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최선과 진심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관련 자료를 공부하고, 관계자를 인터뷰 하고, 고시원들을 답사하며 자살 예방 생명지킴이 강의를 수강했다. 그럼에도 부족할 수 있는 부분에는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께서 선뜻 도움을 주셨고, 개발이 2년차에 접어 들었을 때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서 시나리오 자문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살 예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공대생은 서투르게나마, 그러나 진심을 다해 <30일>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자살 예방 게임 <30일>
자살위기자는 사회적 욕구가 좌절된 괴로움을 끝내고 싶음과 동시에 살고 싶다 소망하는 양가성을 보인다. 대부분의 자살사망자는 사망 전에 실은 누군가 자신을 말려주길 바라듯 자신의 자살 의사에 대한 신호를 보낸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30일 뒤 자살을 택하는) 주인공 최설아는 로얄고시원에 거주하는 3년차 장수 공시생으로, 자신은 타인에게 짐이 된다 느끼며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는 인물이다. 설아는 공시 합격에 대한 부담, 가족들의 경제 상황에 대한 채무감, 꿈과 현실에 대한 갈등 등 대한민국 청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민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설아는 의식주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며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만으로는 삶의 동기를 찾을 수 없다. 설아가 처한 사회적 고립 상태는 설아가 삶에 좌절감을 느끼고 자살을 택하는 이유가 된다. 1평짜리 고시원에서 살아가며 생기는 각종 스트레스와 함께 환경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도 설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박유나가 등장한다. 같은 건물에서 생활하는 고시원 총무 유나는 설아가 무의식 중에 드러내는 자살 위기 신호를 파악하고, 고독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매일 소통하며 설아에게 응원과 위로를 건넨다. 유나의 존재는 설아에게 어떤 의미일까. 사실 고시원 입주민과 총무는 크게 관계되거나 서로 소통할 일이 아주 드문 관계이다. 업무적으로만 엮여 있는 적당한 거리의 두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절대고독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존재는 특별한 존재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나 가족, 이웃, 혹은 공동체 구성원 등 그 누구든지 단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갖고 작은 노력을 들인다면, 그 사람은 누군가의 자살 예방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30일>의 플레이어는 모두 유나가 된다. 그들은 플레이타임 내내 설아를 구하는 생명지킴이가 된다.
<30일>은 유나의 이야기 외에도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시원’ 하면 흔히 떠올리는 수험생 유나뿐만 아니라 고시원을 삶의 터전으로 지내는 다양한 삶이 있다는 사실과, 창문과 스프링클러 부재로 인해 인명피해를 남겼던 화재 사건에 대한 경각심, 고시원 환경을 더 좋게 만들고자 노력해온 ‘금촌 고시원’의 실제 사례들 등. 서로 관계가 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고시원 입주민들이 각자의 사정 속에 설아에게 건네는 따스한 관심은 설아에게 사람과의 유대감을 만들기도 한다.
힘들어하는 지인에게 <30일> 속 따스한 말을 건네 본다면, 그의 힘든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의 신호를 알아채고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사회는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This War Of Mine>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봤다면, 누군가가 남긴 휴대폰 속 단서를 따라간 끝에 그가 데이트폭력의 피해자였다면, (잃어버린 전화기: 로라의 이야기), 영문 모르게 납치되어 감금된 성매매 업소에서 도망쳐보았다면(MISSING), 이 모든 과정을 내 손으로 게임을 통해 경험했다면 어찌 인상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계속해서 보편타당한 가치들을 ‘게임’을 통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앞으로 더브릭스가 만들어갈 차기작들은 <30일>과는 다른 소재, 다른 접근이겠지만 <30일>에 다했던 진심을 잊지 않을 것이고,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