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꼭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검지 손가락 끝이 바닥에 떨어진 곰방대를 가리키며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귀신 들린 사람 같아 보여서 소름이 쫙 돋았다. 핼쑥한 얼굴에 눈발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허공을 젓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아부지, 정신 차리셔요! 여기서 사고 치면 우리 다 죽어여!)
초조해진 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궁리를 하던 찰나, 마루 한구석에 놓인 개다리소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웬 커다란 사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투명한 물이 찰랑찰랑 넘칠 듯 담겨 있었다.
(그려, 즈거여!)
나는 망설임 없이 대접을 덥석 집어 들었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물결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더 지체했다간 아버지가 정말로 뭔일을 낼 판이었다. 나는 보폭을 크게 벌려 마당으로 성큼 뛰어내려 가며, 일부러 발을 헛디딘 척 몸을 아버지 쪽으로 휙 날렸다. 그와 동시에 대접에 담긴 물줄기가 뱀처럼 날으더니 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 아이코, 아부지! 워메, 이를 어째!
사방으로 물보라가 확 튀고 아버지가 그 자리에 대못이 박힌 듯 우뚝 멈춰 섰다. 눈두덩에서 뺨으로, 어깨에서 가슴팍으로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눈가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쓱 닦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대체 이게 웬 물벼락인가 싶어 흔들리는 그 눈동자라니! 나는 대답 대신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도리질하며 애걸했다. '제발, 아부지. 성깔 더러운 큰아버지랑 싸워봤자 우리만 손해예여.'
- 아부지 목마르실까 봐 물을 가져오다가, 그만 발이 제멋대로 꼬였네여. 송구해유, 아부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칠칠치 못한 척 능청을 떨었다. 뒤에서 아버지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떡메질만 하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그제야 홱 뒤돌아보더니 배꼽을 잡고 넘어갔다.
- 저, 저 꼴 좀 보소! 잔칫날에 물벼락 재수 한 번 옴팡지게 걸렸구먼, 푸하하핫!
- 큭큭, 작은서방님, 이걸로 낯짝 좀 닦으시오. 지금 꼴이 딱 오뉴월 비 맞은 똥개 같소!
큰어머니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희끄무레한 면포를 벗어 던져주었다. 아버지는 멍청히 서 있다가 그 천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면포를 낚아채 아버지의 어깨와 몸뚱이를 벅벅 닦아냈다. 날이 아직 쌀쌀한데 고뿔이라도 걸리면 약값은 누가 대나. 보따리를 풀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버지 몸에 칭칭 둘렀더니, 아버지는 순식간에 누더기를 감은 허수아비 꼴이 되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급한 불은 껐으니 한시름 놓였다.
- 큰어머니, 저기… 아부지 마실 물 좀 다시 떠 오게 부엌에 쪼까 들어가도 될까여?
- 뭐, 그러던지. 대신 물독 말고 다른 거 건드리지 말어!
- 네네, 걱정 붙들어 매셔요. 물만 딱 뜨고 번개처럼 나올게여!
- 괜히 딴짓 하다 들키믄 혼구녕을 내줄것이니께 알아서 혀!
단단히 겁박하는 큰어머니의 눈총을 뒤로하고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구수하고 달큼한 밥 냄새가 내 코를 납치해버렸다. 아궁이 위 가마솥이 뽀얀 연기를 내뿜는데, 내 배는 주제도 몰라보고 꼬르륵 소리를 쩌렁쩌렁 내질렀다. 가마솥 옆 국솥에선 고깃국 냄새가 진동했다. 입안에 침이 폭포수처럼 고였다. 참말로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까슬한 보리쌀조차 없어 맹물로 배를 채우는 우리 집과 달리, 이 집 부엌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자기 배만 불리겠다고 쌀로 떡까지 치는 큰아버지는 정말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양반이다 싶었다. 얄밉다 못해 배가 살살 아파왔다.
(에잇, 딴생각 허지 말고 물만 떠서 나가야제! 저 마귀 할멈한티 걸리믄 진짜 경을 칠것잉게!)
나는 마음을 다잡고 물독에서 물 한 사발을 펐다. 밥 냄새에 홀려 가마솥 뚜껑을 열어보고 싶은 유혹을 숨까지 참아가며 간신히 이겨냈다. 그런데 부엌을 빠져나와 마당을 가로지르던 순간, 문득 이상한 점이 내 머리를 툭 쳤다.
(요러케 대궐같은 집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그 둘 말고는 왜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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