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닫힌 문 너머의 진실

by IndigoB

아버지는 기어이 속 시원한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큰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쏘아보았다. 화가 치밀어 눈 밑이 울그락불그락해진 큰아버지는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곁에서 나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비는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만 딴 데를 향했다. 빈 그릇이 흩어져 있는 밥상 위, 널찍한 접시에는 뽀얀 인절미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당장이라도 집어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주변 어른들의 눈치가 보여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그때 큰어머니가 마주 앉아 버티고 있는 두 사람을 멀뚱히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상 위로 손을 내밀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오므려 떡고물이 잔뜩 묻은 인절미를 하나 집어 들었다. 쳐다보는 나에게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쩝쩝 소리를 내며 맛나게 먹는 모습이 참으로 밉살맞았다.


(뭣이 저래 진지한겨. 분위기 살벌허게 맹글지 말구, 그냥 요 인절미나 잡수믄 좋을 텐디...)


참다못한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떡 두 점을 한꺼번에 덥석 집어 호기롭게 입안에 넣었다. 그것은 두어 번 씹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찌나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잘도 넘어가는지, 삼시 세끼 인절미만 먹으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큰어머니의 식탐이 또다시 폭발했다. 지난 며칠 동안 거의 굶다시피 한 나보다 더 그녀는 접시에 수북이 쌓인 떡을 훨씬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는 모습이 무척 불안해 보였다. 그런 큰어머니를 지켜보다 문득, 그녀의 기이한 식탐이 큰아버지가 감추고 싶어 하는 '그 일'과 관련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뭐라 알아듣기 힘든 말을 홀로 웅얼거리던 큰아버지가 마침내 결심한 듯 겨우 입을 열었다.


- 그게 사실은... 사흘 전에 말이여...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어떤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생뚱맞은 소리에 흠칫 놀란 큰아버지가 하던 말을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봤다. 아버지와 나 또한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해 고갤 돌렸다.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 낯선 목소리는 대문 너머 집 밖에서 들려왔다.


- 뭔 집에, 내다보는 사람 하나 없는겨, 게 아무도 읎소! 이 댁에 변고가 있다 혀서, 조사차 관아에서 나왔응게 싸게 쫌 나와 보쇼잉!


갑자기 대문 너머에서 어떤 사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집안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신나게 떡을 먹던 큰어머니가 두 손을 탁탁 털며 문을 열러 나갔다. 삐거덕 소리를 내며 묵직한 나무 대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냉큼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챙이 좁은 갓을 쓰고 밑단이 조금 짧아 뵈는 단출한 도포를 입고 있었다. 두 눈 사이 좁은 미간에, 코 밑 인중과 아래턱에 숱이 적고 가느다란 수염이 돋아 있었다. 다소 경망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지닌 그의 뒤에 포졸 둘이 따라 들어와 남자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나란히 섰다.


AI 이미지 생성 - Google_Nano Banana


대문 밖에서 꽤 오래 기다렸는지, 남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난 얼굴로 자신을 관아에서 현감을 모시는 형방(刑房)이라 소개했다. 그는 곁눈질로 대청마루 위의 밥상을 훑더니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차례로 살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집주인을 찾는 눈치였다. 한참 뜸 들이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답답해 보였다. 어색한 정적을 깨고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튼 사람은 큰아버지였다.


- 아이고, 형방 나리! 먼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소잉. 제가 이 집주인, 이가(李家) 놀부 올씨다. 우선 안으로, 어여 드십시다.


- 오, 영감님이 이 댁 주인이시구랴. 현감 분부대로 서둘러 온다구 온 게, 이제야 왔소잉. 근래에 흉흉한 일이 자꾸 발생해 갖고, 거참!


이내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형방의 뒤를 따르려 하자, 큰아버지가 그 앞을 가로막아 섰다.


- 니가 낄 자리가 아녀! 저이가 가고 나믄 자초지종을 말해 줄 거니께, 넌 나서질 말어.


아버지는 단호하게 저지하는 큰아버지를 보고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수긍하는 고갯짓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큰아버지와 형방이 방으로 들어가고 방문이 닫혔다. 그새 큰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다가, 귀를 쫑긋 세우고 방 안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엿듣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간 두 사람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정신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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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해 아버지 곁에 바짝 붙어 서서 함께 엿들었다. 말소리가 뚜렷이 들리지 않아 웅웅 울리는 소리만 대충 들렸는데, 짐작건대 서로 근황을 묻고 답하는 내용 같았다. 나는 좀 더 잘 들으려고 문풍지에 귀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우리가 방문에 철썩 붙어 있던 그때, 바로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 엣, 에헴! 남의 얘기나 몰래 훔쳐 듣고, 부녀끼리 참 잘하는 짓이유! 거기 쥐새끼처럼 붙어섰지 말구 일루, 썩 나와보슈.


아버지는 민망한 듯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문 옆으로 물러났다. 나 역시 뒷걸음질을 치다 등 뒤에 바짝 다가와 서 있던 큰어머니와 어깨를 툭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찻상을 든 채, 어서 문이나 열라는 듯 눈짓으로 나를 재촉할 뿐이었다.


방문을 열자 큰어머니는 잽싸게 차와 떡이 차려진 다과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방 안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정면 벽에는 화려한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앞 한가운데에 큰아버지가, 맞은편에는 형방이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 요즘 현감 나리는 무탈히 잘 계시는지? 근래 경황이 없어 현감을 찾아뵌 지 한 달이 넘은 것 같소잉. 자, 어여 다과를 들면서, 저희 집에서 일어난 망측한 사건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요.


사건? 분명 사건이라고 했다. 나와 아버지의 눈동자가 동시에 번쩍이며 마주쳤다. 멀뚱히 서 있는 우릴 뒤늦게 발견한 큰어머니가 황급히 문을 벌컥 닫아버렸다. 하마터면 내가 문짝에 코를 박을 뻔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나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사건의 내막(?)이 궁금해 얼굴을 문에 바짝 붙이고 쪼그려 앉았다. 한편, 마당 한구석 멍석 위에 퍼대고 앉은 포졸 둘이 우릴 힐끔 쳐다보고 소곤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 제가 말입니다,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인디... 행랑아범은 제 부친 살아생전부터 이 집에서 일한 솔거노비(率居奴婢: 주인집에 거주하면서 가내 노동이나 경작을 하던 노비)였습지요. 여태껏 큰 말썽 없이 일해온 터라, 가장 믿고 집안 대소사를 맡겼었는디... 아니, 이 상것들이 한통속이 돼갖고 내 뒤통수를 칠 줄이야! 참말로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오!


- 흠, 본래 한 곳에 고인 물은 언젠가는 썩는 법인께. 영감님께서 그 노인을 너무 믿은 게 화근이라면, 화근인게지여. 쩝, 그나저나 놈들이 훔쳐 달아난 재물이 소상히 뭣이 있습니까요?


드디어 무슨 상황인지 명확해졌다. 엿들은 얘기로 미뤄볼 때 큰아버지가 믿고 부리던 행랑아범—나도 얼굴을 익히 아는 그 노인이—다른 노비들과 작당해 재물을 훔쳐 싹 다 달아났다는 게, 우리가 궁금해한 사건의 전말이었다.


평소 윗사람에 순종적이고 얌전했던 노인이 어째서 그와 같이 대담한 일을 벌였단 말인가. 지난 설 명절, 우리 식구가 모진 수모를 겪으며 쫓겨나다시피 할 때도 행랑아범은 우리를 그냥 보내지 않았었다. 그는 큰아버지 몰래 설 제사상에 올린 음식 일부를 챙겨 우리 손에 쥐여주었다. 노인은 음식 보따리를 건네며 '아랫것들이나 먹을 음식 찌꺼기'밖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머릴 조아렸다. 행랑아범의 그 따뜻한 마음에 물세례를 맞아 바들바들 떨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달아 고마움을 표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행랑아범은 할아버지에게서 '작은 서방님(아버지)을 잘 살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마음 여리고 물정 어두워 남에게 당하기 십상이었던 아버지를 할아버지께서도 일찍이 알아보셨던 모양이다. 행랑아범은 보잘것없이 가난한 우리 식구를 제 주인처럼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고, 되레 무엇이라도 더 챙겨주려 애썼던 사람이었다. 그런 고마운 노인이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평생 모시고 살던 집에서 몰래 달아났을까. 그것도 노비들을 몽땅 데리고 야반도주했다니. 아버지는 가늠하기 힘들어 혼란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분명 뭔 사연이 있는 거여. 아암, 무슨 이유가 있은께 그렇게 간 큰 짓을 벌였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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