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거래 해보시렵니까?

by IndigoB

도망친 노비들이 뭘 얼마나 훔쳐 달아났는지 형방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큰아버지의 대답은 영 시원치 않았다. 평소 같으면 "감히 어떤 놈이 내 금쪽같은 재산을!" 하고 불같이 화를 냈을 텐데, 웬일인지 은자 몇 냥에 패물 조금, 쌀 한두 가마니 정도라며 말끝을 흐리는 게 많이 이상했다. 대신 큰아버지는 당장 수족처럼 부릴 일꾼이 없어 앞길이 막막하다는 하소연만 목소리 높여 늘어놓았다.

이제 막 봄이 되어 농사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 소작농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겨울 내내 꽁꽁 얼었던 땅을 일궈낼 장정들을 먹이고 소여물을 쑤어줄 사람은 다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안방 문밖까지 들려오는 큰어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에 나까지 마음이 묵직해졌다. 평생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아랫사람 부리는 재미로 사셨던 두 분이니, 당장 눈앞이 캄캄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 영감님하고 부인께서 얼마나 애가 타실지 저도 잘 압니다요. 허지만 그놈들을 시방 바로 잡아 오긴 좀 힘들겄구먼요. 요새 대감님들 댁마다 이런 일이 줄줄이 터지는 바람에, 관아에서도 손이 모자라 아주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입니다요.

형방의 말에 참다못한 큰어머니가 대화 속에 홱 끼어드셨다.


- 아니, 현감 나리가 해결을 못 해주시믄 우린 인자 어쩐대요? 관아만 믿고 있었는디, 이래 억울허고 기가 막힐 데가 어디 있소!


- 부인, 참말로 드릴 말씀이 없구먼요. 우리도 나름대로 허느라고 허는디, 사건이 워낙 한꺼번에 터져부랑게 한계가 있습지요. 그나마 형편이 나은 댁들은 벌써 추노꾼을 따로 구혀서 도망간 놈들을 쫓고 있다 합니다요.

- 어허, 임자는 가만 좀 있으소! 형방, 내 이런 맥 빠진 소리나 들을라고 관아에 고한줄 아시오? 현감 나으리가 이러시믄 안 되지. 그동안 챙겨드린 정성이 얼만디!

큰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형방이 손사래를 치며 달래기 시작했다.


- 영감님, 우리가 손 놓고 있겠다는 게 아니랑게요! 제발 노여움 좀 가라앉히쇼잉. 제가 돌아가서 현감 나리께 다시 잘 말씀드려 볼 텐게요.


방 안이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그때 형방이 도포 소매 안으로 '짤그랑' 소리가 나는 뭔가를 얼른 밀어 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문간에 비켜 서 있던 아버지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버릇처럼 헛기침을 '흠흠' 하며 마당으로 내려갔다. 멍석 위에 주저앉아 있던 포졸들이 허겁지겁 일어나 그 뒤를 따랐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울상인 얼굴로 대문 앞까지 쫓아나갔다.


두 분이 형방을 보내고 돌아와 대청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큰아버지는 속이 타는지 곰방대를 찾아 불을 붙이고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더니, 그제야 아버지를 곁으로 불러 앉혔다. 무슨 일인지 설명하려는 찰나, 성미 급한 아버지가 먼저 입을 뗐다.


AI 이미지 생성 - Google_Nano Banana


- 아니, 형님! 그런 큰일이 있으믄 진즉 말씀을 하시지, 이 아우 속을 요로코롬 태우셨소잉? 그라믄 시방 이 큰 집에 두 분 말고는 아무도 없단 말씀이여요?


- 허어, 기어이 다 엿들었고만. 오늘따라 네가 유난히 별나게 구는구나. 여하튼 대충 알게 됐다니 허는 말이다만... 내 속이 시끄러워 죽겄응게, 너까지 들쑤시지 말구 어여 싸게 돌아가거라. 니 식구들 먹을 떡이나 좀 챙겨갖고, 이잉?


- 그라요, 서방님.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형님 속 뒤집지 말고 얼른 가셔요잉. 용순아, 너 용순이라고 혔지? 떡 좀 싸줄 텐게 아부지 모시고 어여 가거라.


큰어머니가 떡을 챙겨준다는 말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아버지 댁에 도둑이 들었든 노비가 도망을 갔든, 사실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당장 우리 식구들 끼니 걱정이 태산인데, 그저 고소하고 맛난 떡을 받아 갈 생각에 신이 날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생각이 좀 다르셨던 모양이다. 평소처럼 허허 웃으며 물러나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가 공기를 순식간에 차갑게 얼려버렸다.


- 저한테 말입니다, 형님. 형님하고 저하고 둘 다 득이 될만한, 솔찬히 괜찮은 생각이 하나 있는디... 형님, 저랑 거래 한번 해보시렵니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큰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옆얼굴이, 오늘따라 내가 알던, 착하고 어리숙한 아버지 같지 않아 조금 무서워졌다.






​#소설 #동양판타지 #재해석 #전래동화 #창작소설

이전 14화14. 닫힌 문 너머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