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돌산과 맞바꾼 멍에

by IndigoB

큰아버지는 한참 동안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연신 담배 연기만 뿜어댔다. 방안을 가득 채운 희뿌연 연기 너머로 보이는 두 눈동자는 마치 주판알을 튕기듯 쉴 새 없이 좌우로 굴러가고 있었다. 당장 이 넓은 집안일을 누가 다 해낼 것이며, 코앞으로 다가온 한 해 농사 준비는 어찌할지 머릿속으로 셈을 따지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콧방귀도 안 뀌었을 제안이었겠지만, 노비들이 몽땅 달아나버린 지금의 큰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던진 '거래'는 거절하기 힘든 미끼와도 같았다.


곁에서 눈치를 살피며 제 입에 인절미를 밀어 넣던 큰어머니가 참다못해 큰아버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찔렀다.


- 아따, 영감! 뭐라고 글케 재고 따지고 앉아 있대여? 시방 부엌에 불 때줄 사람도 읎어서 내가 이 두 손에 직접 물을 묻히고 있구먼! 저깟 돌산, 범 나오는 험한 산은 그냥 줘버리고 일꾼부터 구해야 허지 않겄소잉? 허이고, 시방 내 코가 석자인디, 망설일 게 뭐 있다구!

큰어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깨자, 큰아버지가 마지못한 듯 헛기침을 '큼큼' 크게 내뱉으며 아버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버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마주 보았다. 큰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이긴커녕 아버지의 등은 대나무처럼 곧게 펴져 있었다.

- 으흠! 오냐, 알겄다 이놈아. 니가 하도 간절허게 비니께... 대신! 분명히 말혀두는디, 니놈이 산에 갔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든 어떻든 절대 내 탓 허믄 안 되야. 알겄냐? 딴소리 허지 말어!

큰아버지의 으름장에 아버지는 작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암요, 형님! 걱정은 붙들어 매쇼잉. 내일부터 당장 저랑 안사람, 우리 큰애들 싹 다 데리고 올 텐께, 그런 걱정 허지 마시고, 형님은 그냥 뒷짐 지고 구경만 하쇼잉.

아버지는 드디어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 깊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몸이 움찔 떨렸다. 큰아버지 댁의 고된 집안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런 약속을 덥석 하시는 걸까.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처지에 우리 식구들 모두를 이 무시무시한 집의 종살이로 밀어 넣으시는 아버지가 낯설고 무서워 자꾸만 가슴이 콩닥거렸다.

큰아버지는 투덜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지 한참 후 손에 뭔가 들고 나왔는데, 그건 누렇게 변하고 모서리가 해진 종이 한 장이었다. 가운데 정갈한 글자가 빽빽이 적힌, 용수산의 토지문서였다. 큰아버지는 그것을 내밀려다 말고 다시 제 가슴께로 끌어당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이 땅문서 말이여! 내가 관아에 가서 명의를 고쳐줄 텐께, 니도 약속 어기면 안 돼야! 내일 해 뜨자마자 너희 식구들 오지 않으믄 우리 사이 거래는 읎던 일인겨. 그리고... 또 일러두는디, 나중에 내 원망하지 말어. 그 돌덩어리 산에 대해선 이제 난 신경 끊을 거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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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두 손을 뻗어 토지문서를 받들었다. 종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보물을 건네받는 듯,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문서를 접어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것을 되찾았음에도 아버지는 기뻐서 웃지도, 큰아버지에게 굽실거리며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꾹 누를 뿐이었다.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어머니가 마지못해 싸준 인절미 보따리를 품에 안은 내 마음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가 땅문서를 되찾은 건 기쁜 일이지만, 나는 자꾸만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당장 내일부터 그 고생을 어떻게 다 할까.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온갖 허드렛일을 할 어머니와 논밭 일을 하느라 힘든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굽은 등이 생각나서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 아부지, 진짜로 괜찮으시겄어요? 큰아버지가 우리를 가만둘 리가 없잖애유. 돌산 하나 돌려받자구 온 식구가 거기서 손발 닳도록 일해야 허는디... 그 산이 대체 뭐라고 우리 식구들을 다 고생시키시냐고요!

나는 아버지 뒤를 따르며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달빛에 비친 개나리 꽃봉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 용순아, 남한테 뺏긴 걸 도로 찾을라믄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여. 어차피 보릿고개로 끼니 거를 판에, 큰아부지 집에서 일하믄 양식이라도 얻을 수 있잖여. 그렁게 너무 걱정 허들 말어. 그리고, 용수산은 그냥 돌덩어리 산이 아닐거여. 니 할아버지가 굳이 그 산을 이 아비에게 물려주신 건... 필시 뭔 연유가 있을 것잉게.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보통 때처럼 기운이 없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단단해서 더 겁이 났다. 저 너머 어두운 산에 무엇이 있기에 평소엔 말 한마디 못 하던 아버지를 저렇게 고집스럽게 만든 걸까. 그 고집 때문에 고생길에 오를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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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어둠 속에서 용수산의 가파른 실루엣이 거대한 괴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한밤에도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우리가 있는 곳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잠자던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일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던 그 험한 산이 우리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줄까,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큰아버지 집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었다. 문득 서늘해진 내 기분과 다르게 그날따라 초봄 밤공기는 이상하게 훈훈했다. 그 따뜻함이 되레 무서워 나는 품 안의 인절미 보따리를 꽉 껴안으며 아버지의 느린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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