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는 한참 동안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연신 담배 연기만 뿜어댔다. 방안을 가득 채운 희뿌연 연기 너머로 보이는 두 눈동자는 마치 주판알을 튕기듯 쉴 새 없이 좌우로 굴러가고 있었다. 당장 이 넓은 집안일을 누가 다 해낼 것이며, 코앞으로 다가온 한 해 농사 준비는 어찌할지 머릿속으로 셈을 따지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콧방귀도 안 뀌었을 제안이었겠지만, 노비들이 몽땅 달아나버린 지금의 큰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던진 '거래'는 거절하기 힘든 미끼와도 같았다.
곁에서 눈치를 살피며 제 입에 인절미를 밀어 넣던 큰어머니가 참다못해 큰아버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찔렀다.
- 아따, 영감! 뭐라고 글케 재고 따지고 앉아 있대여? 시방 부엌에 불 때줄 사람도 읎어서 내가 이 두 손에 직접 물을 묻히고 있구먼! 저깟 돌산, 범 나오는 험한 산은 그냥 줘버리고 일꾼부터 구해야 허지 않겄소잉? 허이고, 시방 내 코가 석자인디, 망설일 게 뭐 있다구!
큰어머니의 앙칼진 목소리가 정적을 깨자, 큰아버지가 마지못한 듯 헛기침을 '큼큼' 크게 내뱉으며 아버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버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마주 보았다. 큰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이긴커녕 아버지의 등은 대나무처럼 곧게 펴져 있었다.
- 으흠! 오냐, 알겄다 이놈아. 니가 하도 간절허게 비니께... 대신! 분명히 말혀두는디, 니놈이 산에 갔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든 어떻든 절대 내 탓 허믄 안 되야. 알겄냐? 딴소리 허지 말어!
큰아버지의 으름장에 아버지는 작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암요, 형님! 걱정은 붙들어 매쇼잉. 내일부터 당장 저랑 안사람, 우리 큰애들 싹 다 데리고 올 텐께, 그런 걱정 허지 마시고, 형님은 그냥 뒷짐 지고 구경만 하쇼잉.
아버지는 드디어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 깊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몸이 움찔 떨렸다. 큰아버지 댁의 고된 집안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런 약속을 덥석 하시는 걸까.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처지에 우리 식구들 모두를 이 무시무시한 집의 종살이로 밀어 넣으시는 아버지가 낯설고 무서워 자꾸만 가슴이 콩닥거렸다.
큰아버지는 투덜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지 한참 후 손에 뭔가 들고 나왔는데, 그건 누렇게 변하고 모서리가 해진 종이 한 장이었다. 가운데 정갈한 글자가 빽빽이 적힌, 용수산의 토지문서였다. 큰아버지는 그것을 내밀려다 말고 다시 제 가슴께로 끌어당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이 땅문서 말이여! 내가 관아에 가서 명의를 고쳐줄 텐께, 니도 약속 어기면 안 돼야! 내일 해 뜨자마자 너희 식구들 오지 않으믄 우리 사이 거래는 읎던 일인겨. 그리고... 또 일러두는디, 나중에 내 원망하지 말어. 그 돌덩어리 산에 대해선 이제 난 신경 끊을 거잉게.
아버지는 두 손을 뻗어 토지문서를 받들었다. 종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보물을 건네받는 듯,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문서를 접어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것을 되찾았음에도 아버지는 기뻐서 웃지도, 큰아버지에게 굽실거리며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꾹 누를 뿐이었다.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어머니가 마지못해 싸준 인절미 보따리를 품에 안은 내 마음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가 땅문서를 되찾은 건 기쁜 일이지만, 나는 자꾸만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당장 내일부터 그 고생을 어떻게 다 할까.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온갖 허드렛일을 할 어머니와 논밭 일을 하느라 힘든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굽은 등이 생각나서 자꾸만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 아부지, 진짜로 괜찮으시겄어요? 큰아버지가 우리를 가만둘 리가 없잖애유. 돌산 하나 돌려받자구 온 식구가 거기서 손발 닳도록 일해야 허는디... 그 산이 대체 뭐라고 우리 식구들을 다 고생시키시냐고요!
나는 아버지 뒤를 따르며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달빛에 비친 개나리 꽃봉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 용순아, 남한테 뺏긴 걸 도로 찾을라믄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여. 어차피 보릿고개로 끼니 거를 판에, 큰아부지 집에서 일하믄 양식이라도 얻을 수 있잖여. 그렁게 너무 걱정 허들 말어. 그리고, 용수산은 그냥 돌덩어리 산이 아닐거여. 니 할아버지가 굳이 그 산을 이 아비에게 물려주신 건... 필시 뭔 연유가 있을 것잉게.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보통 때처럼 기운이 없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단단해서 더 겁이 났다. 저 너머 어두운 산에 무엇이 있기에 평소엔 말 한마디 못 하던 아버지를 저렇게 고집스럽게 만든 걸까. 그 고집 때문에 고생길에 오를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멀리 어둠 속에서 용수산의 가파른 실루엣이 거대한 괴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한밤에도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우리가 있는 곳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잠자던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일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던 그 험한 산이 우리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줄까,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큰아버지 집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었다. 문득 서늘해진 내 기분과 다르게 그날따라 초봄 밤공기는 이상하게 훈훈했다. 그 따뜻함이 되레 무서워 나는 품 안의 인절미 보따리를 꽉 껴안으며 아버지의 느린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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