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험한 그곳

by IndigoB

큰아버지가 현감 나리를 만나러 관아로 떠나고, 큰어머니가 방 안에서 천장이 떠나가라 코를 골기 시작한 정오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장작을 패다 말고 슬그머니 지게를 짊어졌다. 땔감을 해오겠다는 핑계였지만, 그 눈빛은 산 너머 어딘가를 향해 번뜩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청마루 쪽을 한 번 살피더니, 뒷마당 쪽문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예민하고 영특한지 잘 몰랐다. 나는 이미 부엌문틈으로 아버지의 수상한 행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쪽문을 나서자마자,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뒤를 밟았다. 마을 어귀를 지나 용수산 초입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바위 뒤에서 쑥 튀어나와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았다.


- 아이고, 깜짝이야! 오메, 용순아! 너 시방 여그가 어디라고 따라오냐? 얼른 집으로 안 돌아가야!


아버지는 뒤로 나자빠질 뻔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당돌하게 아버지를 쳐다봤다.


- 아부지 혼자 어디를 글코 급하게 가요잉? 땔감 하러 가는 길치고는 너무 멀리 온 거 아녀유? 나 안 데려가면 시방 바로 뛰어가서 큰 엄니한티 아부지가 도망갔다고 다 말해버릴 거구만요!


내 으름장에 아버지 얼굴이 흙빛이 됐다. 아버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황급히 내 입을 손바닥으로 막으려 했다.


- 아따, 요놈 보소! 목소리 좀 낮춰라잉. 큰일 낼 놈이구먼. 여그가 어데라고 따라온대냐... 하이고, 미쳐부러.


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 더니, 이내 결심한 듯 내 손목을 꼭 쥐었다.


- 좋다. 대신 너 여그 온 거 절대 비밀잉게! 너는 시방부터 아부지 망을 좀 봐줘야 쓰겄다. 누가 뒤에서 따라오나, 아님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오나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혀잉. 알겄냐?


그렇게 나는 망을 보기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용수산 깊은 골짜기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산은 마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험악했다. 중간 지점에서부터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았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버지는 품속에서 웬 종이 같은 걸 꺼내 들고 이리저리 방향을 잡으려 애썼다.


- 아부지, 여그는 길이 읎잖애요. 발 잘못 디디면 그대로 황천길인디, 대체 뭘 찾으려고 이러는 거요잉?


- 나도 모른당게! 그냥 네 할아버지가 주신 이 지도가 가리키는 곳이 여그뿐인디... 일단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잉.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할아버지에게서 받았다는 지도 대로 그저 막연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하지만 산은 몹시 냉혹했다. 한낮인데도 울창한 바위 그늘 때문에 등 뒤가 오싹했고,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산안개가 순식간에 발치를 집어삼켰다.


- 아부지, 안개가 너무 심허요! 한 치 앞도 안 보인당게유!


- 아따, 요놈의 날씨가 왜 이랴? 용순아, 내 옷자락 꼭 붙들어라! 놓치면 큰일 난다잉!


안갯속에서 우리는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올라가려고 발을 떼면 낭떠러지고, 내려가려고 하면 커다란 바위가 앞을 막았다. 설상가상으로 바닥이 젖어 있어 미끄러웠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위태롭게 바위를 타다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 어이쿠! 용순아!


- 아부지!


우리는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 골짜기 깊은 곳으로 처박혔다. 뾰족한 돌부리에 옷이 찢기고 살이 긁히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나를 감싸 안으며 굴렀지만, 골짜기 바닥에 닿았을 때 아버지는 이미 다리를 심하게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방은 절벽으로 가로막혔고, 위로는 짙은 안개가 뚜껑처럼 덮여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산속의 한기는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호랑이 울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 아부지... 나 너무 무서워유. 우리 여그서 죽는 거 아니여요?


내 물음에 아버지는 다친 다리를 움켜쥐고 신음을 참으며 나를 달랬다.


- 걱정 마라잉... 아부지가 있쟎냐... 어흑, 아부지... 도대체 이 산에 뭘 두신 거요잉? 이 자식놈 요러케 고생시키실라고...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때였다. 저 멀리 안개 너머에서 희미한 주황색 횃불 하나가 일렁였다. 그것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뿌연 그림자가 우리 앞에 우뚝 섰다. 나는 괴물이라도 나타난 줄 알고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그림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게 누구여? 이 험한 산 골짜기에서 뭐 허는 거요!


등불이 가까워지며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덥수룩한 수염에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아버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AI 이미지 생성 - Google_Nano Banana


- 아니... 자넨 행랑아범 아녀! 형님 집에서 몰래 도망쳤다더니, 왜 여그 숨어 있는가!


그는 바로 큰아버지 댁에서 노비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했다던 그 행랑아범이었다. 행랑아범은 사방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더니, 혀를 찼다.


- 아이고, 작은 서방님! 시방 산맥이 뒤틀리는 시간이라 길 모르는 사람은 절대 못 나갑니다요. 우선 제 거처로 가십시다. 여그서 밤 지샜다가는 산 기운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요.


행랑아범은 아버지를 부축하고 나를 이끌며 안개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노인이 왜 도망자가 되어 이 험한 용수산에 숨어들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어둠만이 답을 줄 듯 말 듯 우리를 깊숙이 인도하고 있었다. 발치에 감기는 축축한 안개는 마치 무덤 속에서 뻗어 나온 손길처럼 끈덕지게 발목을 잡아끌었고, 멀리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우억, 우억 소릴 내며 골짜기를 타고 음산하게 흩어졌다.






​#소설 #동양판타지 #재해석 #전래동화 #창작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