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행랑아범

by IndigoB


노인이 손에 든 횃불이 안개를 가르며 마치 도깨비불처럼 흔들렸다. 다리를 다쳐 쩔뚝거리는 아버지를 부축하고도, 행랑아범은 마치 제집 앞마당을 걷는 사람처럼 험한 바위 틈새를 쏙쏙 잘도 빠져나갔다. 한참 동안 좁다란 틈을 따라 돌아 들어가자 거대한 폭포가 나타났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폭포 소리가 온 산을 뒤흔드는가 싶더니, 눈앞에 하얀 물줄기가 장막처럼 펼쳐졌다. 노인은 망설임도 없이 그 물줄기 뒤편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 자, 조심해서 들어오셔유. 여그는 산신령님 기운이 꽉 들어차 있어서 삿된 것들이 감히 얼씬도 못한당게유.

폭포를 지나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바깥의 그 오싹한 한기는 온데간데없고 묘하게 뜨끈한 온기가 내 볼을 확 감쌌다. 동굴 깊숙한 곳에 한 무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큰아버지댁에서 도망친 노비들 같아 보였다. 억척스럽고 덩치가 큰,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남자 장정 둘과 잔뜩 긴장한 기색을 보이는 아낙 둘, 그중 한 아주머니 품에 꼭 안겨 있는 코딱지만 한 아기까지 모두 다섯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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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들은 이내 입술을 앙다물고는, 마치 목숨보다 귀한 보물이라도 지키려는 사람들처럼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쳐다봤다. 그 다부진 표정들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 옷자락을 더 꽉 쥐었다.


행랑아범이 동굴 한구석으로 아버지를 데려가 조심조심 눕히더니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아버지가 바위 아래로 떨어질 때 접질린 발목에 부목을 갖다 댄 후 헝겊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뜬금없게도 아버지가 치료해 준 제비를 떠올렸다. 다른 이를 시켜 마실 물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행랑아범이 그제야 한시름이 놓였는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위 옆에 기대고 누운 아버지 곁에 나도 쪼그려 앉았다.


누군가 떠다 준 물을 아버지와 함께 나눠 마시고 나니, 순간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행랑아범이 입고 있던 옷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연이어 품에서 비단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꺼냈는데, 그것은 꽤 묵직해 보이는 보따리였다. 그런데 그걸 푸는 노인의 손끝이 어쩐지 떨렸다. 궁금한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마침내 보자기 매듭이 스르르 풀리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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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갓난애 머리통만 한 시커먼 구슬이 들어 있었는데, 그냥 검은 게 아니었다. 깊고 깊은 밤하늘을 뭉쳐놓은 것 같은 구슬 속에서 보랏빛 불꽃같은 게, 마치 살아있는 듯 소용돌이치며 번뜩거리고 있었다. 그 기괴한 빛을 보고 있자니 눈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나만큼 놀란 표정을 짓던 아버지가 행랑아범을 노려봤다.

- 아니, 행랑아범... 이게 대체 뭐여? 자네가 시방 이걸 훔쳐서 형님 집에서 도망친 거여?


아버지는 그새 다리의 고통도 잊어버렸는지 눈을 뚱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행랑아범은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힘없이 푹 꺾었다가 이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 작은 서방님! 이건 제가 훔친 게 아니라 일루 되찾아온 것이구먼요. 놀부, 큰 서방님이 욕심에 눈이 멀어갖고서, 산신령 호랑이가 지키던 성소에 무작정 쳐들어갔당게여. 감히 용수산 심장이나 다름없는 이걸 함부로 훔치는 바람에 산맥이 시방 죄다 뒤틀리고, 산의 정기(精氣)가 새카맣게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요...


엥? 이게 무슨 소린가? 노인이 흥분해서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내 가슴이 방망이질 치듯 쿵쾅거렸다. 큰아버지가 산신령 호랑이의 물건에 손을 댔다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단순히 재물을 훔쳐 도망친 노비들이 아니라, 정기가 죽어가는 산의 저주를 막으려고 이 검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구슬을 목숨 걸고 지켰단 말인데... 갑자기 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행랑아범은 구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와 나를 가만히 뚫어지게 쳐다봤다. 노인의 움푹 팬 눈가에 뭔가 알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이 뒤엉키는 듯했다.

- 근디 작은 서방님, 용순 애기씨까지 데리고 이 험한 델 우치케 올라왔습니까요? 산길도 뒤틀리고 안개까지 오져서 도저히 사람 다닐 데가 못 되는디 말입니다요.

행랑아범의 짧은 물음 뒤 잠시 동굴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멀리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폭포 소리가 그 빈틈을 메우려는 듯 더욱 사납게 울려 퍼졌다. 나는 빈 물그릇을 손에 쥔 채, 우리가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아찔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짓누르며, 부목을 댄 채 뻗어 있는 다리를 한참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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