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수호자의 피

by IndigoB

행랑아범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내 머릿속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코앞에서 그 신비한 구슬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그 얘길 믿기가 어려웠다.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그냥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 이 가파르고 험한 용수산을 지키던 수호자였다니. 할아버지는 평생 산신령 호랑이를 모시며 산의 정기를 돌보셨고, 행랑아범은 그 밑에서 할아버지를 보필하던 심복이였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성소 입구를 단단히 가로막은 바위 문은 아무나 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할아버지의 핏줄, 그러니까 수호자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의 손이 닿아야만 비로소 반응을 하는 신비로운 문이었다.


- 작은 서방님, 용수산 심장인 이 구슬은 아무나 건드리는 게 아니여유. 산신령 호랑이님께서 허락하신 수호자 피가 흐르는 분만 성소 문을 열 수 있당게요.


행랑아범의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낮게 울려 퍼졌다. 나는 겁이 나 아버지 팔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머리에 망건을 두른 아버지의 야윈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깡마른 체격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욱신거리는 옆구리와 다친 다리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아버지가 그 험한 성소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 우덜 같은 놈은 성소 입구 근처까지만 가제, 그 문턱을 넘을 재간은 눈 씻고 봐도 없구먼요. 큰 서방님은 애저녁에 신령님을 배신하고 구슬을 훔쳐부러서 인자 문이 안 열릴 것이고... 오직 작은 서방님만이 그 문을 열 수 있을 거여요. 작은 서방님만 이 산을 살릴 마지막 희망이어라.


행랑아범은 보랏빛이 번뜩이는 구슬 보따리를 아버지 앞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아버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보따리 틈새로 삐져나오는 그 기괴한 빛을 응시했다. 나는 산신령 호랑이의 노여움이 구슬 안에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만 같아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크게 결심한 듯, 떨리는 손으로 그 묵직한 운명을 품에 안았다.


- 아부지, 나도 할아부지 손녀딸 아녀요. 근게 나두 따라갈라요!


내 갑작스러운 말에 동굴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제 이런 일엔 이골이 났다는 듯 호기롭게 나서는 날 보며, 아버지는 깜짝 놀라 나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지지 않고 아버지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나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하는 열세 살이고, 몸속에는 분명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행랑아범이 내 비장한 표정을 보더니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맞구먼요. 애기씨도 대감님 귀한 핏줄인게 그 몸속에도 수호자 기운이 흐르고 있지요. 서방님 다리가 시방 요 모양이라 힘드실 텐디, 애기씨 맑은 손길이 성소 문 여는 디 도움이 될지도 몰러요.


결국 아버지는 내 손을 꼭 맞잡았다. 아버지 손은 거칠고 차가웠지만, 나를 쥐는 힘만큼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행랑아범과 장정 둘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앞장섰다. 동굴 구석에서 아기를 품에 안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우릴 배웅하던 아주머니 얼굴이 횃불 잔상처럼 내 눈가에 남았다.


우리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쏟아지는 폭포수 장막을 헤치고 행랑아범 일행이 은신하던 동굴을 빠져나왔다. 동굴 밖은 산신령의 분노가 서린 듯 시커먼 안개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길을 따라 아버지 손을 더 꽉 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또 다른 동굴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조금전까지 머물렀던 동굴보다 훨씬 입구가 크고 넓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 기세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찰나, 갑자기 등 뒤의 폭포 소리마저 집어삼킬 것처럼 우렁찬 포효가 산맥을 뒤흔들었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안개 너머로 집채만 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두 눈은 횃불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를 꿰뚫어 보았고, 거대한 앞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온 산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것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다.


AI 이미지 생성 - Google_Nano Banana 2


앞서 걷던 행랑아범과 장정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두 손을 대고 납작 엎드렸다. 순간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아버지와 나는 옴짝달싹 못한 채 벌벌 떨었다. 오금이 저리고 심장이 서늘해지면서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호랑이는 우리 일행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휘돌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우리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듯 콧구멍을 벌렁거렸고, 귀를 앞으로 쏠았다가 뒤로 젖혔다. 그리고 행랑아범과 아버지 사이를 파고들어 더욱 집요하게 아버지와 나를 살폈다. 얼룩무늬 털로 뒤덮인 등이 꿈틀거리며 우리 몸 주위를 둥글게 감쌌다. 호랑이의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칠수록 두려움은 극에 달했고, 내 눈은 빠질 듯이 점점 커졌다.


(아이고, 시방 우린 여그서 싹 다 죽는 거여? 어뜩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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