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허락된 자

by IndigoB

(아이고, 시방 우덜은 여그서 싹 다 죽는 거여? 어뜩 혀!)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 옆에 선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동굴 안을 채웠다. 행랑아범과 장정들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갤 숙이고 있었다.


호랑이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거대한 몸집이 움직일 때마다 얼룩무늬 털이 꿈틀거렸다.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호랑이가 코를 벌렁거리며 아버지의 냄새를 맡았다. 식은땀에 젖은 아버지 이마에 호랑이의 뜨거운 숨결이 스쳤다. 아버지는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 채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숨길 수 없었다. 입에서 이빨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호랑이가 이번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심장이 쿵쾅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호랑이의 눈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겁에 질려 파랗게 질린 얼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


호랑이가 나를 킁킁거렸다. 거친 수염이 내 뺨을 스쳤다. 호랑이의 숨결은 짐승의 냄새와 함께 알싸한 쇠 냄새가 났다. 호랑이는 나를 아주 오랫동안, 구석구석 살폈다.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듯, 혹은 아주 소중한 것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바로 전과 같은 날카로운 공포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가슴 한구석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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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호랑이가 갑자기 거대한 앞다리를 서서히 굽히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이 낮아지더니, 호랑이는 마치 절을 하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발 앞에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그 오만한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순간, 동굴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아버지도, 행랑아범도, 장정들도 모두 호랑이의 행동에 얼어붙었다. 산의 주인, 신령님이라 불리던 그 거대한 호랑이가 나에게, 고작 열세 살짜리 계집아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호랑이를 내려다보았다. 호랑이의 넓은 등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위엄이 나를 에워 감쌌다.


호랑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한 번 더 깊이 쳐다본 후, 서서히 몸을 돌렸다. 호랑이의 황금빛 눈동자가 동굴 안쪽, 시커먼 어둠 속에 숨겨진 거대한 돌문을 향했다. 그 문은 할아버지의 후손에게만 반응한다는, 성소의 입구였다.


호랑이가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는 위협이 아니었다. 마치 "가자"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홀린 듯 호랑이를 따라 발을 떼었다. 그러자 아버지도, 행랑아범과 장정들도 조심스럽게 우리 뒤를 따랐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어둠은 깊어졌지만, 호랑이의 거대한 등은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성벽 같았다. 호랑이가 앞장설 때마다 어둠이 걷히고, 험난했던 동굴 길이 평탄해졌다.


성소 입구의 돌문 앞에 도착했다. 거대한 돌문은 떡하니 버티고 서서 우리를 가로막았다. 아버지가 떨리는 손을 뻗어 문을 만졌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함께 열어라!)


호랑이가 으르렁, 하는 소리가 내게 사람의 목소리로 들렸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어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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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이 문에 닿는 순간, 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문 너머로 눈부시게 밝고 따뜻한 빛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누군가 머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꼭 할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로 옆에서 호랑이가 흐뭇하게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이제 막 산신령 호랑이의 시험을 통과한 듯한 후련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마치 그 시험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속 두려움을 이겨내고, 수호자의 사명을 깨닫게끔 했다. 엎드린 호랑이의 경외심 가득한 눈빛을 가슴에 새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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