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검은 깃털

by IndigoB

열린 돌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빛은 봄날 오후, 우리 집 툇마루에 앉아 있을 때 내리쬐던 따스한 햇살 같았다. 눈이 멀 정도로 번쩍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꺼풀 위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온기가 느껴졌다. 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잡고 빛의 소용돌이 안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코끝을 스친 건 퀴퀴한 동굴의 이끼 냄새가 아니라 이제 막 땅 위로 솟아난 싱그러운 풀내음이었다.


- 아부지, 여그 좀 보셔요. 꼭 산이 잠들어 있는 방 같어요.


성소 안 모습은 참 신기했다. 천장에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옮겨놓은 듯 별처럼 반짝이는 돌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고, 벽면에는 붓으로 휘갈겨 쓴 낙서 같으면서도 사람 모양을 닮은 문양들이 은은한 청동빛을 내뿜으며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섭고 축축한 구덩이일 줄만 알았는데, 이곳은 누가 매일 같이 정성스레 빗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티 하나 없이 정갈했다.


우리는 홀린 듯 중앙에 놓인 커다란 돌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어른 주먹만 한 동그란 구멍이 가운데에 파여 있었는데, 비단 보자기 안에서 자꾸만 맥동하며 뜨거워지던 보랏빛 검은 구슬이 그 구멍을 마주하자마자 제멋대로 웅웅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꼭 오랫동안 헤어졌다 엄마를 찾은 어린 아기처럼 말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보자기를 풀어 구슬을 꺼내고 움푹한 구멍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딱' 하고 구슬이 제자리에 안착하는 순간,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기분 좋은 떨림이 전율처럼 쫙 퍼져 나갔다.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덥고 답답한 공기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고, 어디선가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우리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곁에 서 있던 호랑이 신령은 거대한 앞발로 지면을 한 번 짓눌렀다. 낮은 울림이 동굴 바닥을 타고 내 몸속으로 전달되었다. 그것은 산이 나에게 보내는 엄중한 인사 같았다. 그 무거운 진동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동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 용순아... 시방 다 된 거냐, 잉? 산이, 이 산이 도로 숨을 쉬는 것이제?


그러더니 품 안에서 소중하게 간직해 온, 군데군데 손때가 묻은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할아버지가 임종 직전,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며 건네주셨다던 지도라고 했다. 나와 함께 용수산에 올라오면서 아버지가 한시도 손에 놓지 않고 들고 있던 그것이었다. 아버지는 제단 옆에 놓인 나무 책상 위에 지도를 펼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산의 형상을 벽에 새긴 그림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버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 여기 좀 봐라, 용순아. 너희 할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지도에 그려진 선이랑 여그 벽에 새겨진 산맥의 결이... 어쩜 이리 똑같냐잉.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아시고, 우덜을 여그로 부르신 거여. 암, 글코 말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낡은 저고리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아버지는 맏형인 놀부, 큰아버지에게 '빚'이라는 명목 아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토지와 재산을 억울하게 강탈당했다. 당장 굶고 있는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에 야금야금 빌린 게 대부분이었다. 제때 갚지 못해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침내 토지문서까지 몽땅 빼앗겼다. 돈 앞에선 아무리 형제라 해도 인정사정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야멸차고 매정한 큰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빼앗기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게 바로 그 지도였다. 물론 큰아버지는 그런 지도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지도를 살피던 아버지 옆으로 내 시선을 잡아끄는 작은 석함 하나가 보였다. 뚜껑도 없이 먼지만 조금 쌓인 투박한 돌 상자였는데, 그 안에 담긴 물건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까맣고 보드라운 깃털이었다.


보통 까마귀나 까치 깃털은 무미건조한 검은색인데, 이건 꼭 깊은 밤하늘을 한 조각 떼어내 담아둔 것처럼 오묘하고 푸른 광택이 감돌았다. 내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 깃털을 만져보자, 손끝에서 찌릿한 느낌이 정수리까지 전달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혀... 왜 일케 낯설지가 않은겨?)


나는 홀린 듯 깃털을 코끝에 대고 숨을 들이켜 보았다. 아주 희미하지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냄새가 숨어 있었다. 봄날의 비 젖은 흙 내음, 마당 구석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노란 민들레 향기... 무엇보다, 다리가 부러진 채 아버지 손바닥 위에서 가냘프게 떨던 그 작은 생명의 온기가 섞인 냄새였다.


- 아부지, 여그 좀 봐 보란게요. 이 깃털 말이여요.


- 잉? 그게 왜, 용순아?

- 이거, 우덜 집에 왔던 그 제비 깃털 같어요. 아니, 제비 깃털이라고 하기엔 너무 보드라운디... 자꾸 그 제비 생각이 난당게요. 꼭 그놈이 여그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버려요.


내 말에 아버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셨다.


- 뭐라고? 용순이 너, 솔찬히 긴장했는가 부다. 고 제비 녀석이 어케 이런 신성한 곳에 들어온다냐? 그놈은 진작에 남쪽으로 가서 잘 묵고 잘살고 있을 터인디... 얼른 나가서 큰집에 있는 너으 어매랑 식구들부터 챙겨야 쓰겄다. 싸게, 싸게 채비하자. 그나저나 시방 낮이여, 밤이여?


나는 깃털을 가슴께에 깊숙이 품었다.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하고 낯선 기운이 스멀스멀 솟아올라 왔다. 그게 원래 내 몸속에 있던 기운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 깃털이 나를 보호하고 행운을 줄 것 같은 막연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성소 안에서 느꼈던 그 포근한 느낌은 돌문을 나서는 순간 조각조각 부서졌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행랑아범 일행과 우리는 서둘러 폭포가 가로막은 출구를 향해 발을 재촉했다. 성소의 정기가 완전히 회복된 줄 알았지만, 되레 동굴 안 감각들이 이상하리 만큼 예민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동굴 벽면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고, 멀리서 들려오는 폭포 소리가 유난히 더 사납게 울렸다. 문득 뒤돌아보니 산신령 호랑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 손을 뼈가 아플 정도로 꽉 잡고 폭포의 거센 물보라 사이로 몸을 던지듯 정신없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박제가 된 듯 굳어버리고 말았다. 쏟아지는 물보라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시커먼 옷을 입고 칼을 찬 남자들이었다. 그 수가 족히 열댓 명이 넘어 보였다. 너럭바위를 포위하듯 촘촘히 에워싸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반질한 비단옷을 입고 입꼬리를 비죽거리는 큰아버지가 서 있었다.


- 어이구, 이게 누구여. 내 아우 흥부 아니여? 나무 하러 나간 놈이 깜깜무소식이더니 어째 여그까정 올라와설랑, 좋은 구경 혼자만 허느라고 고생이 많구만! 큭큭.


그 목소리는 폭포 소리를 뚫고 기분 나쁘게 내 고막을 찔렀다.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 형님... 시방 여그가 워디라고 올라오신 거요?제가 나무를 혀서 싸게 내려갈라고 혔는디요.


- 염병 허고 있네! 네 눔이 뭔 생각으로 울 집 일을 해주고, 용수산을 달라고 혔는지 인자 알겄당게. 거짓부렁 허고 자빠졌지 말고 순순히 내 말 들어, 잉?


놀부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시커먼 복면을 쓴 남자들이 길을 터주었다. 그 뒤에서 포박당한 채 질질 끌려 나오는 사람들을 본 순간, 내 심장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멎어버렸다.


- 어무니! 오라버니! 언니!


바닥에 무참히 꿇려 앉은 건 우리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다. 큰아버지가 이 깊은 산속까지 쫓아와 식구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아버지와 날 협박하고 있었다. 잽싸게 우리를 앞서 가던 행랑아범과 장정 둘은 이미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AI 이미지 생성 - Google_Nano Banana 2


큰아버지는 허리춤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단도를 꺼내 우리 어머니의 목 근처에 가져다 댔다. 어머니는 겁에 질려 하얗게 변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없이 아버지의 눈을 쳐다봤다.


- 흥부야, 고집 피우덜 말고 순순히 그 구슬이랑 싹 다 내놓그라잉. 안 그라믄 니 마누라 목청에서 피 솟구치는 꼴을 시방 보게 될 것잉게.


거친 물줄기가 바위를 때리는 굉음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인질로 잡힌 가족들이 끙끙 대는 소리가 폭포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내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억울해서인지, 아니면 무서워서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 아이일 뿐이었다. 그저 눈앞에 날 선 칼날이 너무나 무서워 두 눈을 감고 온몸을 벌벌 떨 뿐이었다.


그때, 내 품 안에 넣어둔 검은 깃털이, 마치 내 심장 박동에 반응하듯 기이하리만치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깃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가슴팍을 타고 뜨겁게 번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아주 낯설고도 강한 불꽃의 시작이었다.








제 글이 좋았다면 라이킷,

다음 글이 기대된다면 구독,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는 댓글로 남겨주세요 :)

IndigoB's Brunch Story


#소설 #동양판타지 #재해석 #전래동화 #창작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