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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Nov 06. 2018

페인트

칠장이 아저씨

사람은 다들 그렇게 쉽게 잊혀진다. 우리 집 지을 때부터 아버지가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 가시기까지 거의 30년이 넘도록 우리 집 페인트 칠이며 유리창 갈기를 도맡아 했던 칠장이 아저씨는 이제 성도 이름도 없이 그저 칠장이 아저씨로만 기억에 남았다. 구레나룻이 있었던 아저씨지만 늘 면도를 하고 다녔는데 면도를 했어도 구레나룻이 있던 턱이며 볼에는 구레나룻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어서 때로는 멋있게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텁수룩해 보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이런저런 연장들이 담긴 페인트 통이며 줄자랑 톱도 있었다. 유리를 자를 때 쓰는 금강석 커터도 있었는데 인조 다이아몬드가 박혀서 유리에 금을 낼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 전까지는 아저씨가 유리를 자르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눈금이 새겨진 철자를 대고 스윽 금을 그은 뒤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놋쇠 대가리 부분으로 유리 한쪽을 톡 치면 유리는 투명한 소리를 내며 둘로 갈라졌다.


그렇게 아저씨는 유리를 갈아 끼우러 왔고 때로는 집 외벽을 새로 칠하러 왔고 그리고 때로는 마룻바닥에 니스 칠을 하러 왔다. 아저씨가 일하러 올 때면 늘 힘찬 목소리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삼십 대 초반쯤 우리 집에 처음 왔던 아저씨가 오십 줄에 들어설 즈음 다시 우리 집에 무슨 일인가를 하러 왔을 때 나는 갑자기 아저씨가 많이 늙었다는 생각을 했다. 턱 밑 살이 축 쳐졌고 볼 살이 줄어 있었다. 여전히 구레나룻은 약간 멋져 보였지만 목소리에 힘은 많이 빠져 있었다.


이제 우리 집은 아직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명절이나 집안 일로 고향에 갈 때 집 앞을 지나칠 때면 가끔 우리 집에 살던 때가 생각난다. 연한 하늘색 페인트를 칠하려고 나이프로 오래된 칠을 정성껏 벗겨내던 모습과 함께 서걱서걱 거리던 소리마저 떠오른다. 오래된 집에는 오래된 소리들이 살고 있다. 오래된 장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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