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3

강릉으로 가는 자동차 뒤로 포근히 내려앉은 저녁에

by 한영애

아내와 강릉으로 가는 자동차 뒤로 저녁이 내려앉는다. 늘 내려앉았던 저녁이 이날 어찌 유독 달랐을까 싶지만, 내려앉는 저녁이 등뒤로 포근하다.


한 해의 수고를 뒤로 하고 낯익은 곳에서 낯익은 사람들과 마주하러 가는 길이 참 좋다. "여보, 올해도 수고 많았구먼. 둘째까지 대학 진학 잘 마무리하고, 아이들이 함께 살 집 잘 마련해 주고, 많은 일이 지냈구먼. 수고했어. 올해도". 그렇게 토닥토닥 아내의 수고를 이야기하고 가는 그 길이 정겹기만 하다.


얼마나 더 이 길을 가야 할까? 생각한 대로 잘 갈 수는 있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던 일들이 때로는 생각한 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그렇지만 무난히 아무 일 없이 하나둘씩 차례로 지나가고 마무리되기를 27년째. 이것도 진전인가 보다. 생각한 것과 너무 달랐던 결과들도 지나고 보니 나름 볼 만하다,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보니 추억이다 싶다. 때로는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지나는 것은 그저 시간인지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 잊고 싶지 않은 삶이다 싶다. 다시 돌아본다, 내가 그 지난 삶을 어찌 살았는지. 그저 살아내었지 싶다.


올해는 유독 아팠다. 아팠던 몸 보다 더 많이 아팠던 것은 어려서부터 간직했던 마음 속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이었다. 너무너무 가난해서 싫었던 어린 시절에, 친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살았던 나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다른 것이지만 모두가 하나쯤은 가지고 살지 싶어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긴 세월을. 그러던 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마음속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을 잔뜩 남겨 놓은 채, 4월의 어느 날 돌아가셨다. 주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헤어 나오지 못했을 그 4월에, 슬픔을 가슴에 가득 담아 놓고 동생들을 위로하고 아버지의 마지막 여인을 위로하며 내 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응급실 앞에서 아직은 또렷이 정신이 있으셨던 그 시간에 얼마나 망설였을까. 결국은 그 시간에 응급실 복도에서 시간만 보냈던 그 4월에. 그러던 그 달에, 아버지가 아무 일 없듯이 가셨다. 황망이러라. 그 느낌이 내게 남은 모습은 그저 황망이러라. 가장 큰 것을 내려놓아야 했었는데 지나고 나니 알았다. 내가 그것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을.


2022는 해결되지 않고 엉켜있는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 찬 숫자로 남았다.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 내 나라를 기웃거리며 남의 나라도 내 나라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산지가 벌써 8년이네. 그 시간 동안 자라는 것도 있었고 떠나는 것도 있었고 멈추고 묻어야 할 것도 있었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잃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고. 누린 복으로 따지자면 남 못지않았던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지났음을 알게 되었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 앞으로 20년만 살자. 어찌 그게 내 마음대로 될까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정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20년에 닿는 때쯤 되면 손주들이 십 대는 되어 있지 않을까? 300평 땅에 내 집을 짓고 그곳에 애들이 와서 놀고 가는 시절쯤 되어 있으려나? 2층집 다락방에 둘째 소원대로 비스듬한 창문을 달아주고 그곳에 그 아이의 추억을 남기면 그때쯤 될라나? 그 땅에 집 말고 작은 시골 병원을 지어 놓고 큰 딸아이에게 맡겨 볼라치면 그때쯤 될라나? 남은 해 들을 5년 단위로 나누어 보았다. 각 5년 안에 내용들을 하나씩 채우고 나니 알게 되었네. 20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 줄.


혼자 걸을 수 있을 때, 힘이 있어 무엇이든 번쩍번쩍 들어 옮길 수 있을 때 강원도 산골짜기, 사람 손이 잘 안 닿는 그곳에 너른 땅을 사서 울창한 숲 아래 편에 예쁜 학교를 짓고 세상의 흐름에서 비껴 있는 아이들을 모아 인생을 나누려면 얼추 15년은 걸리지 싶다. 땅도 사야 하고, 맘 맞는 사람들 함께 해야 하고, 그곳에 땅을 일구어 학교를 지으려면 얼추 15년은 족히 걸리지 싶다. 돈 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그것도 내 나이 생각하면 정말 얼마 안 남았네.


시간을 역으로 돌려 살 수 있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5년 단위로 나눈 20년이 한 자락이다. 그 한 자락에 나는 오늘도 한 움큼을 살아간다. 한 움큼의 시간이 이렇게 소중한 시간일 줄 미리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싶다. 한 움큼의 시간 속에 너를 만나고 있는 이 시간이 그냥 숨 한 번들이 쉬었다 내 쉰 거다, 20년 동안이라면. 나는 이 시간을 너에게 사용한 거다. 숨 한번 들이쉬고 내 쉰 정도의 시간이지만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너와 보내는 거다. 2043은 한 움큼의 시간들이 모여 금방 달아버릴 거다. 만질 수도 없고 남길 수도 없는 공기처럼 금방 사라질 거다. 아파하지 말자,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