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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Nov 11. 2024

패스트 라이브즈

두 번째 테제: 전이의 의미와 영향은 전이가 일어난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전이(transition)는 살면서 맞닥뜨리는 변화를 가리킨다. 인간 생애에서 ‘전이’라 함은 세세한 사건들 일일이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아주 크게 나누면 탄생-살아감-죽음, 조금 더 세분화하면 탄생-영유아기-아동기-청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 이렇게 틀 지워진 ‘발달 주기’ 안에서 많은 이가 변화라고 느끼는 특정한 경험들을 말할 수 있겠다. 


입학, 졸업, 취업, 결혼, 출산, 부모됨 이런 전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삶’ 안에서 기대하는 변화라고 통상적으로 이야기들 하는데 (과연...?) 이러한 변화 역시 개인이 어느 시점에서 겪느냐에 따라 의미와 영향이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마다 전이를 겪는 시기가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은 각자 삶을 돌아보며 여러 가정들만 해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십대 초입이 아닌 더 어린 시절이나 스무 살이 지나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다면, 첫 사회생활 경험 시기가 학부 졸업 전이 아니라 더 이후였더라면, 결혼을 이십 대 중후반이 아닌 사십 대 초반에 했더라면, 석사 논문을 다 마친 상태에서 출산을 했더라면 등등. 


한편으로는 이런 가정도 해볼 수 있다. 내가 일제 강점기에 스무 살을 맞이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했다면, 1990년대 중반에 대학을 졸업했다면 등등. 


물론 이런 가정은 지금 삶을 변화하는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한번씩 생각을 해보면, 내가 지금-여기에서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번 주제가 전이의 시기와 결과를 두고 예단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오도될까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생애주기 관점에서 언급하는 on time과 off time 개념은 사회적 통념/편견을 반영하여 당사자에게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러다 보니, 이 주제를 생각하면 나로선 결혼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지 모른다. 


언젠가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넌 운이 좋아서 결혼했다고 생각하지 않니?” 결혼이 내게는 멋모르고 한 것이라, 그러고 나선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으며 십 년 즈음 지날 무렵부터 이제야 좀 익숙해지는구나 싶었기에, 단 한 번도 그런 생각(결혼은 좋은 것, 그러므로 나는 운이 좋은 것이라는)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이 말이 계속 남아 틈틈이 곱씹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는지는 몰라도, 그때(이십 대 중후반이라는 시기와 서울이라는 거주공간)가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결혼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동반자가 같을지라도 그 시기 결혼한 것과 다른 시기 결혼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 듯 싶지만, 인간 삶을 이해하는 것은 이렇게 당연한 데서부터 시작하는지 모른다.


패스트 라이브스는 그런 맥락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시기, 관계의 전이가 일어나는 시기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진다. 공교로운 ‘시기’, 그것은  ‘인연’ 혹은 ‘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혼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론은 여느 낭만주의에 발을 걸친 것들이 아니라 지극히 ‘경제’적으로 이득을 따져 맺어지는 계약이라는 쪽이다. 무의식 중일지라도 내가 바라는 물질적 삶의 욕망을 더 잘 채워줄 수 있는 이와 결혼이라는 인연을 맺는다는 것. 어찌 보면 영화 속 노라는 그 특성을 잘 따라 결혼까지 이른 듯도 보인다. 그런데 한켠에서 계속 맴도는 장면은, 이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 첫 만남, 첫 대화, 첫 포옹과 같은 것이다. 



너무나 공교로운 ‘시기’아니인가? 왜 그때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있었나, 혹은 없었나, 하는. ‘계약’이라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해석은 사후에 일어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낭만적으로 두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생각도 슬며시 올라온다. 


그 감정은 둘만이 알기에, 그리고 지속되기에, 영화 속에서도 틈입할 자리가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결혼을 십 년 넘게 지속하며 자녀도 양육하는 나로선, 내 삶을 더 포장하려면 계약 대신 낭만에 방점을 두어야 해서 일까, 심정이 그쪽으로 계속 기운다. 


이렇게 영화를 보면 그렇다. 전생, Past Lives 같은 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지금-여기 삶에선 중요하지 않다. 이미 지나왔고, 각자 다른 곳을 향해 가니까. 그래서인지 개인이 겪는 전이 시점이 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 명제를 볼 때마다 이런 말이 떠오르나 보다. 


“So, what?”


우리의 삶이 운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맞춰진 것인지 그 사이에서 계속해서 되묻게 된다. 그 너머에 과연 자신의 의지가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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