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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중독자 Jun 08. 2020

괴물인가 분노하는 자인가

메두사의 여러 얼굴


미켈란젤로 메리지 (카라바조), 메두사의 머리, 약 1597, 우피치 갤러리, 피렌체


#1. 

한 때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이미지는 이 그림이었다. 아빠의 화집 한 페이지에 있는 괴물. 그걸 알고 오빠는 짓궂게 책을 펼쳐 내 얼굴에 디밀기도 했다. 다행히 착한 성품을 타고난 오빠는 나를 그리 심하게 괴롭히진 않았던 것 같다. 얼마 후에 내 공포가 저절로 사라진 걸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게 되면서, 어디선가 자료 사진으로 나온 그 뱀 머리를 한 여자를 보고 그 괴물이 메두사라는 걸 알게 됐다. 여자라는 것이 제일 큰 충격이었다. 난 남자 괴물일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니나다를까, 카라바조는 남자를 모델로 썼다고 한다)


#2. 

미술사를 공부하고, 그림에 대해 내 취향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푹 빠진 화가가 카라바조다. 두 달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 동안 카라바조 그림을 찾아다녔다. 누군가 타임머신을 타 1600년대 이탈리아로 가서 카라바조에게 사진이라는 것을 보여줬을 것임에 분명한 순간포착 능력에 반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의 줄지은 시퀀스 중 가장 충격적인 이미지가 무엇인지 선택하는 능력에 빠져벼렸다. 인공조명이 없던 시절, 카라바조는 어떻게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이미지들을 만들었을까. 


우피치 미술관은 조용했고, 춥지만 밝은 날이었고, 난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분이 마침 또 고등학교 후배라 함께 미술관을 걷고 있었다. 뱀 머리카락, 비명을 지르며 벌린 입, 선득한 눈,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 한때 나의 두려움은 그렇게 거기 있었다. 의외로 작았고, 의외로 평면이 아니었다. (방패 모양처럼 가운데가 약간 불룩하다) 조용한 우피치를 다시 가고 싶다. 


#3. 

메두사는 고르곤 세 자매 중 하나로,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출중한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아테나 여신의 분노를 사 머리카락이 뱀인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겁에 질려 돌로 변할 정도였다. 페르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에게 받은 방패를 맨들맨들하게 닦아 거울로 사용해 메두사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고 그 머리를 자르는 것에 성공했다. 당시 메두사는 포세이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잘린 메두사의 머리에서 떨어진 피에서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와 크리사오르(사람과 말이 형제 관계임. 응?스럽지만 실은 포세이돈의 여러 자식이 말로 태어남)가 태어났다. 훗날 아테나 여신은 페르세우스에게 받은 메두사의 머리를 자신의 방패 아이기스에 붙였다. 


#4. 메두사가 아테나 여신의 분노를 산 이유는 아테나 신전에서 포세이돈에게 강간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용 그리스 로마 신화에선 강간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메두사와 포세이돈이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이런 억울한 이야기가 있나. 당한 것도 억울한데 그로 인해 벌을 받다니. 


어쩌면 메두사는 정말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다. 굳이 사랑까진 아니더라도 포세이돈과의 섹스를 원했을 수도 있다. 여성의 욕망에 두려움을 느끼는 남자들이 메두사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이 프랑스 작가 엘렌 식수의 주장이다. 그래서인가 요즘은 메두사를 분노하는 여성, 분개하는 여성의 표상으로 삼기도 한다. 여성의 시각에서 본 메두사 이야기가 다시 만들어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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