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고양이 피쿠스와 90일을 지내야 하므로 여행을 미리 다녀와야 했다. 피쿠스라면 대환영이지! 피쿠스는 연두와 호두를 모두 너그럽게 받아준 신사 아닌가. 고양이 알러지 쯤이야 약 먹으면 되니까, 하고 흔쾌히 대답을 하고 나서 곧 깨달았다. 고등어녀석이 와 있는 동안 우린 여행을 못 가고, 그러다 보면 여름이 끝나갈 것이고, 가을엔 내가 한국을 가야 할 것 같으니, 우물쭈물하다간 올해 우린 아무 곳도 못 갈지도 모른다.
시간은 빠듯하고,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까의 시간을 고려하고, 안 가본 미술관에 가보고 싶은 나의 욕망과 자동차로 이동 가능한 거리의 목적지를 찾다보니 말라가가 있었다. 그래, 못 가본 까르멘 티센 미술관도 가보고, 까와 호두가 해변에서 놀 동안 나는 다른 박물관들을 봐도 좋겠다. 바닷가가 있는 도시라면 까도 좋다고 하겠지.
아침형인간과 야행성인간, 늦잠꾸러기 늑대과 동물이 함께 묵을 수 있는 숙소는 의외로 많다. 물론 선택의 여지가 줄고 가격이 올라가지만, 가격 차이는 말라가 중심지까지의 거리를 포기하면서 메꾸었다. 그래서 말라가 근처의 해변도시 또레몰리노스에 침실과 거실과 부엌이 분리된 아파트를 구했다. 동물 환영에 바다가 바로 보이는 원룸형 숙소도 많았지만 생활리듬이 완전히 다른 우리에겐 불가능. 20킬로미터 거리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늑장부리는 까와 호두를 남겨놓고 나 혼자 우버 불러서 말라가 가는 상상을 했다. 결국 우버는 한 번도 이용 안했고, 둘을 떼어놓고 나 혼자 말라가에 가지도 않았다)
코스타델솔 해변의 말라가 근처 작은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던 또레몰리노스는 한때 유럽 젊은이들 사이에서 여름, 해변, 파티의 상징이었고, LGBT들의 휴식처였다. 아직 프랑코가 집권하던 60년대에 이미 코스타델솔 지역 처음으로 게이바가 문을 연 곳이고, 지금도 지중해의 태양을 즐기려 찾아온 휴양객들 사이사이 긴 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남성이 또각또각 발소리를 울리며 걸어가고 평범한 회사원 차림의 중년 남성 둘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밤늦게 호두 똥책을 나간 까는 고객을 잘못 고른 젊은 남성의 은근한 호객을 받기도 했다.
아파트 주인이 집 근처 무료 주차할 수 있는 곳을 왓츠앱으로 알려줬고, 우린 오후 8시쯤 도착할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주인에게 직접 열쇠를 건네받는 숙소의 단점이다. 늦게 도착하면 미안해진다. 그러나 번호키 달랑 알려주고 마는 숙소보다 인간적이라 더 좋아한다) 그리고 우린 놀랍게도 8시 5분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늦잠꾸러기들을 일찍 재우고 일찍 깨운다.
2. 구글맵을 보고 코스를 대략 정해놓는다. 중간 목적지를 정하고 내비엔 중간목적지를 넣는다. 목적지가 너무 멀면 교통정체 등이 반영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3. 점심은 간단히 먹는다
4. 시차 계산을 잊지 않는다. 포국과 스국은 한 시간 차이가 있다.
5. 목적지 근처에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 퇴근길 교통정체, 고속도로와 시내 길이 만나는 곳 등의 번잡함, 긴 여정의 피곤함 등으로 헤매기 딱 좋다.
호세에게 열쇠를 건네받은 스페인의 8시는 아직 환했다. 짐을 풀고, 장 봐온 빵과 와인, 하몽, 샐러드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바닷가 산책에 나섰다. 가랑비가 내렸고 오렌지꽃 냄새가 바람에 함께 넘어왔다. 파도소리 바람소리로 웅성거리는 대서양에 익숙해진 내게 여름 여행자가 들이닥치기 전의 지중해는 고요했다.
포국-스국 국경
스국 들판의 롹스타
또레몰리노스 해변, 20세기초에 지은 신 무데하르 양식 저택 Casa de los Navajos. 내부수리중이라 멀리서 겉모습만 봤다.
안달루시아엔 거리로 면한 현관문을 열면 파티오가 있고, 식물로 장식해놓은 곳이 많다. 문을 열어놓는 곳이 많아 슬쩍 들여다보기 좋다. 전통과 거리가 있는 건물이지만 파티오 스피릿만은 유지해서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