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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중독자 Apr 11. 2020

스페인 조각가와 고통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스 Gregorio Fernández, 누워 있는 그리스도 Cristo Yacente, 1628-31, 세고비아 대성당


#1. 여행자들이 잘 선택 안하는 방식이지만 내가 언제부턴가 로망을 품고 있기도 하고 차차 해보고 있는 여행이 대도시 근교 도시에서 숙박하기다. 리스보아 근처의 신트라, 마드리드 근처의 똘레도 같은, 큰 도시에서 당일로 다녀오기가 가능한 작고 예쁘고 관광객들이 많은 도시에서 숙박하는 거 말이다. 신트라처럼 관광객이 바글바글한 도시에서 그들이 쫙 빠져나간 다음은 얼마나 고즈넉하고 멋지겠는가. 


#2. 그 로망을 처음 실현한 곳이 세고비아다. 사실 마드리드에 살고 있을 때 (당연히) 당일 여행으로 다녀온 적이 몇 번 있었다. 세고비아에서 숙박을 해본 건 마드리드를 떠나고 나서였다. 우리집에서 마드리드까지 차로 갈 때, 하루에 충분히 갈 만한 거리이지만 어디라도 중간에 하룻밤 묵고 싶었고, 세고비아 구시가지의 한 고풍스러운 호텔이 아무 조건 없이 개와 함께 묵을 수 있었다. 역시 밤에 보는 세고비아는 멋졌다. 고즈넉하고, 바르엔 현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 한잔과 따빠를 먹고 있었다. 크. 좋구나. 


#3. 그 세고비아 대성당엔 누워 있는 그리스도 조각이 있다. 우아하고 미끈한 몸 위에 대조되는 붉은 피와 상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다 넘어졌을 때 생겼을 멍 자국까지 선명한, 내겐 너무나 스페인스러운 조각. 

대개 서양 고전 조각을 생각하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같은 흰 대리석 조각을 떠올린다. 그러나 대리석이라는 재료가 워낙 비싼 재료이기도 하고, 그 돌을 잘 다루는 조각가의 인건비가 비쌀 뿐더러 워낙 드물기 때문에, 유럽에서 만나게 되는 조각의 상당 부분은 나무 조각이다. 그리고 그 표면은 대개 채색이 돼 있다.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스는 십자가에서 죽은 뒤 내려져 눕혀진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피에타의 예수는 너무 미화됐는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그 피에타는 너무 아름다워서 사실 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싶다) 그리스도의 몸은 나무로 조각한 다음 채색을 했고, 채 감지 못한 눈은 크리스탈,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는 상아, 고난을 다 겪어낸 손톱은 소뿔, 옆구리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송진, 손발의 못자국 상처는 코르크와 가죽을 사용했다. 



#4.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스의 작품 대부분이 소장된 스페인 국립 조각 미술관은 바야돌리드에 있다. 스페인의 다른 조각가 살시요의 작품들이 모여 있는 무르시아와 함께, 나의 조각 여행 리스트 앞자리에 적혀 있는 곳이다. 우리집에서 한 300km정도 떨어진 곳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 글은 다섯 달 전쯤에 썼다. 지금이라면, 게다가 오늘이라면 유례 없는 사태로 고통받는 스페인 사람들과 이 글을 올리는 오늘이 성 금요일(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망한 날)이라는 것, 셧다운 상태로 지내는 부활절 등과 얽혀 더 마음 복잡한 글을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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