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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중독자 Apr 10. 2020

가고싶은 곳, 보고싶은 그림

마티아스 그뤼네발트(회화) 니콜라우스 하게나우어(조각), 이젠하임 제단화, 1512-16, 운터린덴 미술관, 콜마르


#1. 직접 본 그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는 계획은 수정했다. 포르투갈 국가 비상사태로 모든 미술관이 문을 닫았으니 리스보아에 있는 그림을 볼 수도,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에 있는 그림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올 여름에 시칠리아에 가서 금빛 모자이크를 직접 보는 것이라든가 매년 전시 일정을 잘 맞춰서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 되었다. 집에서도 늘 할 일이 많은지라 코로나 블루 같은 것에 빠질 겨를이 없었지만 과연 언제 여행을 가서 새로운 그림을 볼 수 있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이르자 조금 우울해졌다. 그래서 가보고 싶은 곳의 보고 싶은 그림에 대해서도 글을 쓰기로 했다. 


#2. 그렇게 해서 고른 장소와 작품이 콜마르에 있는 이젠하임 제단화다. 십자가형 장면의 예수가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채 몸을 비틀고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데 같은 제단화 여러 장면 중 수태고지나 부활 장면은 너무나 선명한 밝은 톤이라 그 조합이 뭔가 괴이스러워 보였기 때문에 마음을 주지 못했달까. 요즘 3-4세기의 안토니오 성인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이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젠 직접 가서 보고 싶은 그림 목록에 올려 놓았다. 제단화 날개를 닫았을 때, 한 번 열었을 때, 두 번 열었을 때의 세 가지 모습이라는 점에 끌렸고 내 눈에 어울리지 않는 그림들이 한 제단화 안에 함께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는 걸 알게 됐다. 조각 작품도 그동안은 눈여겨보지 못했다.  

이젠하임 제단화. 닫았을 때


이젠하임 제단화. 한 번 열었을 때. 특별한 날에만 열었다고. 


#3. 이 작품은 안토니오 수도회가 자리잡은 이젠하임 수도원을 위한 제단화다. 안토니오 수도회는 중세 유럽에선 흔한 질병이었던 ‘안토니오의 불’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했다. 안토니오의 불이라는 병은 호밀에 기생하는 곰팡이인 맥각균에 중독되어 걸리는데, 마비, 환각, 경련 등의 증상을 겪다가 사지 말단부까지 피가 돌지 않으므로 괴저로 인해 사지를 절단하기까지 악화되기도 했다. 중세 유럽에선 호밀 재배와 소비가 높았고 특히 맥각균은 춥고 습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안토니오의 불은 주로 중부 유럽을 강타했다. 특히 팔다리에 화끈거리는 느낌이 드는 증상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지옥불이고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1070년 안토니오 성인의 유해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프랑스 동남부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 오게 되는데, 안토니오의 유해가 이 병을 낫게 해준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이 질병을 ‘안토니오의 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안토니오 성인은 3-4세기에 사막에서 홀로 기도하며 살던 은수자 성인인데, 악마들이 나타나 그를 유혹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안토니오가 겪은 각종 악마의 유혹과 이 병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환각을 비슷한 것으로 보고 맥각균 중독과 안토니오 성인을 연결시킨 것도 분명하다. 성 안토니오의 유해가 프랑스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귀족이 기적적으로 병이 낫자, 수도원을 짓고 안토니오의 불을 치료하는 병원을 설립했다. 15세기에 안토니오 수도회 병원은 370개가 넘을 정도였다. 안토니오의 불은 저렴한 호밀빵을 주식으로 삼았던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걸리던 병이었고, 병원의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밀이나 다른 곡물로 된 식사를 하면 나았다. 돼지 기름과 각종 허브를 섞어 연고를 만들어 성 안토니오의 물, 프랑스 비엔느 지방의 와인을 성 안토니오의 포도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18세기에 이르러 밀이 호밀을 대부분 대체하게 되면서 안토니오의 불 환자가 줄고 안토니오회 수도원-병원 숫자도 줄었다. 


#4. 이젠하임 제단화의 예수는 그래서 온 몸이 상처로 뒤덮여 있다. 안토니오의 불에 걸린 환자와 같은 증상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에 못박힌 고통도 엄청나겠지만) 십자가형을 그린 부분 양 옆엔 안토니오의 불에 고통받는 환자들의 수호성인인 안토니오 성인과 화살을 맞은 세바스티아노 성인이 보인다. 세바스티아노는 페스트를 막아주는 수호성인이다. 제단화를 두 번 열었을 때 안토니오 성인이 악마에게 괴롭힘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우리가 보기에 오른쪽 패널. 회화 부분), 안토니오 성인 아래편에 몸에 상처가 나고 부어 있는 환자가 보인다. 이젠하임 수도원에 있던 제단화는 프랑스 혁명 때 자리를 옮겼다가 1852년에 콜마르의 운터린덴 미술관에 자리잡았다.  

이젠하임 제단화. 두 번 열었을 때. 



#5. 이 제단화가 닫혀 있는 모습, 한 번 열린 모습이 보고 싶다. 두 번 열어서 조각이 되어 있는 모습도 보고 싶다. 지금은 이젠하임 제단화를 복원 중이라고 하는데, 복원이 끝나면 콜마르에 가서 이 앞에서 입 벌리고 넋을 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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