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 (리가텔 성소 제단 장식의 일부), 13세기 후반, 카탈루냐 국립미술관, 바르셀로나
#1.
이처럼 있어야 할 것만 있는 그림이 또 있을까. 아기를 낳은 마리아는 누워서 쉬고 있다. 누에고치처럼 생긴 약간 길쭉하고 둥그스름한 것이 이부자리다. 마리아 옆구리쯤엔 친절하게 MARIA라고 써놓았다. 그 옆의 요셉은 앉아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데, 이 시큰둥해 보이는 자세가 요셉이 태어난 아기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표현 방식이다. (그래도 이 요셉은 눈은 뜨고 있는데, 어떤 그림에선 아예 졸고 있다) 요셉의 머리엔 역시 JOSIP이라고 써놓았다. 그림 오른쪽 귀퉁이 프레임을 뚫듯 천사가 나타나고, 왼쪽 위엔 아기 예수의 구유가 있다. 제대로 된 방을 못 구해서 소와 나귀가 사는 곳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 (아기 예수의 얼굴 부분은 소실됐다)
#2.
13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지방(반도의 북동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성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찾아가는 성지순례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프랑스 남쪽, 스페인과의 국경 지역의 피레네 산맥에서 시작해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은 순례자들이 늘 지나다녔고, 이들이 기도할 수 있는 작은 성당들이 길 위에 세워졌다. 이 그림이 있었던 아라곤 지역의 마레 드 데우스 드 리가텔 성소 santuari de la Mare de Déu de Rigatell 역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3.
이 작은 건물은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좀 그럴 정도로 작다. 보통 성소라고 부른다. 이 작고 심플한 장소 안에 역시나 작고 심플한 제대가 있다. 그 제대를 장식하는 방식이, 나무판 위에 그림을 그려 제대 앞부분에 붙이는 거였다. 이 예수 탄생은 그 나무판의 일부다. 중앙엔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을 알리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고,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나고(역시 오른쪽 위 프레임을 뚫고. 깜찍하다) 동방박사 셋이 등장한다.
#4.
이 제단 정면 장식은 현재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에 있다. 20세기 초, 카탈루냐 고유의 문화를 중요시하고 유적을 발굴하는 등의 붐이 일었을 때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시골에 흩어져 있던 중세 회화들이 바르셀로나로 모였다. 작품들이 소실되는 것을 방지하고 관리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5.
카탈루냐 미술관은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언덕, 번듯한 장소에 웅장하게 서 있다. 바르셀로나 가는 사람은 다 아는 분수 쇼 역시 미술관 앞 계단에서 펼쳐진다. 내가 아라곤과 카탈루냐 깡시골까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한 장소에서 편안하게 로마네스크 회화를 만날 수 있는 고마운 곳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들을 볼 땐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800년 가까이 지난 다음에도 번듯한 도로도 없는 산기슭에 세워진 작은 돌 성당. 작은 나무 문 하나, 제단 위 창문 하나.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만나기 위해 몇백 킬로미터를 걷는 순례자들에겐 고어텍스 신발도 바람막이 아우터도 택시 서비스도 없었다. 비, 바람, 산짐승, 도적, 배고픔, 추위를 피하고 견뎌내며 걷다 만나는 작은 성소는 얼마나 그들에게 위안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나는 작은 그림은 얼마나 그 풍광과 어울리는가. 있어야 할 것만 있는 작고 단순하고 명확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