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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아는 사람 May 30. 2021

걷기에 속도를 더하다

걷다 보니 선명하게 보여

초등학교 시절 걸음걸이가 유난히 느렸던 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등굣길이다. 언니는 걸음이 느린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학교에 갔다. 걸음이 느려서 나의 걸음 속도에 맞추면 언니는 항상 지각이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던 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서 알았다. 언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동생이 그땐 얼마나 미웠을까. 언니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만 기억하고. 울면서 언니의 빠른 걸음에 맞추던 난 그 후로는 걸음이 느리지 않았다. 누구보다 빨라졌다.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정해진 점심시간 안에 학교에서 집까지 뛰어서 다녀오곤 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야 만 집으로 갈 수 있는데 그땐 어떻게 집에까지 다녀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수업시간 전에 도착해서 조금은 쉴 수도 있었다.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는 어른 걸음으로 아무리 빨라도 30분은 걸렸다.


중학교 때는 친구와 함께 등하교를 했는데 친구는 학교에서 스쿨버스를 타고 난 빠른 걸음으로 걷거나 뛰어서 나룻배가 다니는 뱃머리에서 만났다. 배를 타는 뱃머리까지 가려면 가뿐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뛰어야 했다. 친구가 탄 스쿨버스가 빨리 도착할까 봐 마음은 더 급해졌다. 그땐 몸이 가벼워졌는지 친구를 만날 생각에서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걸음도 빨랐고 잘 뛰었다. 이후 난 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항상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걸음걸이가 바쁘게 움직였다.


결혼 후에도 운전을 하지 못했던 나는 집 밖에 볼일을 보기 위해서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은 걸었다. 시장 갈 때, 은행 갈 때, 문구점에 갈 때도. 딸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양 손에 짐을 들고 많이도 걸어 다녔다. 아이를 제대로 못 업었다고 모르는 할머니한테 혼난 것도 걸어서 버스터미널에 간 날이다.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여유가 없었다. 마음보다 걸음이 앞섰다. 누구와 함께  걸으며 일부러 걸음을 맞추지 않으면 난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영업 업무를 하는 한 지인은 나를 보고 홍길동이라고 했다. 금방 시장 앞에서 봤는데 멀리 떨어진 학교 앞에서 만나고, 또다시 더 먼 곳에 있는 아파트 인근에서 만났을 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그 사람은 승용차를 이용해 이동을 하면서 여러 번 나를 본 모양이다. 


난 어느새 걸음이 빨라져 있었다. 여유 없이 걸었다. 걸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뭔가를 하려면 시간이 늘 부족했다. 미리미리 준비해야 했고 무거운 것은 들기 힘들었다.  느긋하게 걷는 걸음보다 빠르고 힘차게 걷는 걸음이 나에게 어울리게 되었다. 걷기는 나에게 많을 것을 보게 만들었다.


걸으면서 이른 아침 박스를 줍는 할머니를 보았고, 일용직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인력센터 앞에서 모여있는 절실한 사람들의 모습도 봤다. 어둠을 헤치며 우유 배달하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친구는 나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모습을 보이며 인사를 했고, 우리 아파트 옆 건물 경비아저씨는 만날 때마다 '돈 벌고 오는 사람은 좋겠다~'하며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밤새 술에 취해 아침까지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비틀거리며 걷다가 비탈진 블랙아이스 도로에서 미끄러져 순식간에 꼬꾸라지는 남자도 봤다. 편의점과 음식점, 술집 주변에는 밤새 먹고 마신 흔적이 쓰레기로 남아있다. 곳곳에 늘어나는 편의점으로 인해 인기가 떨어진 구멍가게 아저씨는 꼬박꼬박 문을 열어 드문드문 오는 손님을 기다린다. 손님 없는 시간 동안 가꾼 식물 줄기는 가게를 통째로 삼킬 듯 건물을 타고 쭉쭉 올라간다. 자동차 정비소 아저씨는 손님이 오기 전에 매일 아침, 호수를 들고 센 물줄기를 뿌려 바닥을 적신다. 보는 사람 마음까지 시원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이 모든 것을 걸으며 봤다.


왜 텅 빈 주차장에 앉아 있나 싶어 봤던 남자. 빌딩을 여러 채 가지고 있다는 건물주는 주차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월세를 주고 빌린 주차장에 자기 손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주차할까 봐 자리를 뜨지 못한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킨다. 돈 많은 건물주는 자기의 늙은 아내에게 건물 청소를 시키고 본인은 주차장을 악착같이 지키고 있다. 돈을 모을 줄만 알지 쓸줄 모르는 남자. 돈이 뭐길래, 그렇게나 욕심부리고 꼭 살아야 할까 싶다. 


걷다가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으며 이왕 맞은 거 흠뻑 젖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걸으니까 좋은 것이 많음을 알았다. 개업하고 폐업을 반복하는 가게들을 볼 수 있었고, 한정식으로 유명한 식당의 담벼락은 항상 봐도 높게만 보였다. 그 집의 상호가 바뀌면서 메뉴가 자꾸 바뀌는 걸 보니 이제는 그 집 자체가 인기가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생각의 끄트머리쯤 오면 벌써 집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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