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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Jul 20. 2019

나의 '인생 영어' 학습 여정

별거 없는데, 별게 좀 있긴 하다.

(엄청난 스압 주의) 모두가 영어를 쓰는 해외에서는 영어를 어떻게 공부했냐는 질문을 듣지 않을 줄 알았지만, 말레이시아는 '망글리시'를 많이 쓰다 보니, 현지인들에게 '영어를 어떻게 잘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들을 때가 가끔 있다. 말레이시아의 그것과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 혹은 완전한 문장을 갖춰 말하려는 나의 강박적 완벽주의 때문일 거라 추측해 본다.


다만, 나는 아직 영어를 내가 원하는만큼 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생활에 불편한 정도는 아니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 끝이 없는 것만 같다. 그나마 3년간의 해외 생활 덕에 영어 실력 유지에 도움은 됐다고 고백할 정도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란 게 막상 오래 쓰지 않으면 잊히기 마련이니까. 다만, 사람들이 꿈꾸고 그리는 '대단한 영어', 혹은 '완벽한 영어'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 아니다 보니, 항상 스스로에게 무언가 아쉬움은 든다.


그래서 혹시나 궁금할 독자 분들을 위해, 별거 없는 나의 영어 공부 과정을 이제까지의 인생길을 따라 쭈욱 적어보려 한다. 영어 공부를 했던 시기와 방법에 따라, 나의 영어 실력은 '가파른 계단을 뛰어넘듯' 크게 달라졌는데, 실패, 좌절, 성공과 아픔의 끝없는 반복을 통해 성장했던 나의 영어 실력, 지금부터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를 써 내려가 본다.


메모장에 대충 나누어 보니 유의미한 순간들이 무려 스물 다섯 가지 꼭지가 나온다. 과연 어떤 계기로 영어 공부를 즐기게 되었는지를 쭉 읽어나가면서 독자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 아무리 불면증이 있는 나라도 이 글을 쓰고 사나흘 정도는 기쁘고 뿌듯한 마음에 편히 발 뻗고 자는데 도움이 될 것만 같다.




1. 영어를 처음 알게된 나이, 초등학교 4학년.

엄마 덕분이었다. 선행학습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엄마 덕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됐는데, 단어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질리는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초중등 수준의 독해집을 공부하면서 세상의 지식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던 느낌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영어 학습 자체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영어를 알게 된 덕에, 내가 모르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됐다는 여정이 순수하게 즐거웠던 것 같다.


2. 처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중1 무렵.

선행학습을 조금 했던 덕분이었는지, 중학교 1학년 영어는-요즘의 중1 영어와 비할바도 아니지만-쉬웠다. 하지만 누구나 그랬듯, 수업 시간에 '27번 일어나서 36페이지 읽어봐'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나에게 오지 않길 바랐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하루 최소 70-100개씩 외웠던 영단어 암기는 무척 괴로웠다.


과연 요즘 아이들도 이런 방식의 공부를 할까 싶지만 '깜지'를 해가며 단어를 외웠고, 안 외워지는 단어를 수십 번 다시 쓰면서 외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단기적 '지식 암기'가 되었던들, 영어에 장기적 흥미를 갖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성적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구나, 정도의 깨달음.


3. 외고에 가고 싶었던 중3, 이름이 멋있어서?

여전히 시험 성적으로는 우수한 '영어'를 할수 있었지만, 영어를 유창하게 하거나, 영어를 영어로 사고하는 패턴은 1도 몰랐다. 뭐, 외우라는 거 외우고, 해석하라는 거 잘 해석하면 시험은 잘 보겠지, 정도였지만, 입에서 나오고 귀로 들리는 모든 말을 한국어 사고방식으로 이해했던 시기. 문장의 앞뒤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성문기초영어, 성문종합영어의-지금 생각하면 정말 '거지 같은'- 능통태인지 수동태인지, 여기서 갑자기 '아이엔지ing'가 왜 나왔는지, 과거완료, 현재 완료의 정의조차 제대로 와 닿지 않는 꽉 막힌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어머니 덕분에, 1년 남짓(?) -사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다녔던 ECC 어학원에서 나에게 가당치도 않은 '크리스'라는 이름을 써가며 회화수업을 했던 건 꽤 재미 있었고, 본능이었는지 이끌림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름이 쿨하다고 생각한(?) '한영외고'에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을 했다가 제대로 까였다. 너무 멀고, 통학도 불가능했던 뜬금없던 '치기 어렸던 생각'으로, 그냥 끝.


4. 수능 영어는 몰라도 내가 진짜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구나를 느낀 고교 시절.

고등학교에선 단어를 더 외웠다. 외우고 또 외우면서, 하루에 새로운 단어를 최대 150개까지 기계처럼 외워댔던 것 같다.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쓰고 입으로 말해보고, 잊어버리면 다시 쓰는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스프링 노트를 몇 개를 쓰고 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물론 공부는 죽어라 했으니 나름 성적은 괜찮았지만, 내가 영어를 정말 '유연하게 사고하면서'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가끔 길에서 만나는 외국인들과 대화하며 깨달았다. 하루에 150개씩 새로운 단어를 외는 게, 실상에선 한마디도 터져 나오지 않는 의미 없는 공부였구나라고.  


5. 지금도 생생한 기억, 기말고사 '돈까쓰' 사건

대학교 실용영어 수업은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어문학부여서 그랬는지, 해외에서 자라거나 살다온 아이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와.. 저 멋진 발음과 잠시도 쉬지 않는 유창함은 뭐람?' 기가 죽기에 충분했다. 나처럼 외국을 다녀오지 않은 아이들이 한 반에 절반도 안 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유창한 영어에 전공인 스페인어까지 원어민처럼 하는 애들 앞에서, 그야말로 '쭈구리'였던 나.


급기야 실용영어 수업 기말고사 인터뷰 시간에 '부모님이 뭐하시니?'라는 질문에 '식당을 운영하세요'까지는 그럭저럭 잘해놓고, '아 그래? 뭘 파시는데?'라고 물었을 때, '음......돈까쓰? (Pork Cutlet이라는 단어를 아예 몰랐던 시기)'라고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같이 테스트에 들어갔던 친구 두 녀석이 그걸 두고 몇 년을 놀려댔으니까.


6. 영어 회화 수업을 자발적으로 등록하다.

쉬지 않고 학교 다니기가 너무 힘들었다. 살인적이었던 사립학교 등록금은 그렇다 치고 거의 2시간이 걸려 통학을 하면서 수업을 듣고, 수업 후엔 1주일 내내 과외를 다니는 게 힘에 부쳤다. 그래서 '아 이러다간, 공부도 못하고, 돈도 못 벌고, 뭐 하나 제대로 못하겠구나' 싶어서, 동기들에게 '나 등록금이 부담돼서 휴학 좀 할게'라고 말하고는 과감하게 휴학계를 냈다.


소심하고 예민했던 내가 '1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긴 하지만, 복학할 때는 꼭 영어 잘해서 돌아올게'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는 건, 친구 중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처음엔 1개월을 빈둥거리며 그냥 쉬었던가. 너무 지루한 일상이 재미없어서, 중학교 이후로 한 번도 다니지 않았던 영어학원 회화 수업에 등록했다.


7. EBS 영어교육프로그램의 전설, 모닝스페셜.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휴학을 하고 1개월을 빈둥거리다 일부러 새벽 6시 수업을 등록했다. 매일 늦잠을 자면서 하루를 까먹는 게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졌던 탓이었는데, 웬걸. 그때 만났던 캐나다인 '마크' 선생님과 죽이 너무 잘 맞았다. '어라? 재밌네?'라고 생각하고, 1개였던 수업을 곧 2개로 늘리고, 3개월째 되어서는 4개를 들었다. 새벽 6시 반부터, 연속 4개의 수업을 듣는데도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을 정도로 영어가 너무 재미있었다.


단지, 수업 시간을 이래저래 짜 봐도 중간에 8시부터 8시 30분까지 텅 빈 시간이 생겼는데,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워크맨'을 가지고 책상에 엎드려 간식으로 아침을 떼우면서 주파수를 맞추다가 발견하게 된 EBS 모닝스페셜. 당시는 이보영 선생님과 아이작 더스트 선생님이 진행하실 때였는데, '와, 우리나라에 이런 영어 방송이 있어?'라는 '신대륙' 발견 정도의 놀라움을 느꼈다.


8. 모닝스페셜의 덕후가 되다 - 받아쓰기 시작

EBS 모닝스페셜을 매일 들었다. 국제뉴스부터, 영화, 미드, 음악, 취업 인터뷰, 퀴즈쇼 등 다양한 들을 거리를 제공했던 모닝스페셜 덕에, 나는 순식간에 'EBS 애청자'가 되었다. 당시 8시 25분쯤이 되면 항상 '청취자 POP QUIZ'를 진행하곤 했는데, 얼떨결에 걸었던 전화가 연결이 되면서, 이보영, 아이작 선생님과 즐겁게 대화도 나누고, 퀴즈를 맞히면서-그때 정답은 Live and let live였다-7만 원짜리 니베아 스킨케어 세트를 받고, 나는 '모닝스페셜'의 자발적 덕후가 되었다. (사람 참 간사하다)


매일 게시판을 들락날락거리며 청취자들이 쓴 영문 방송 소감을 읽고, 업데이트되는 뉴스 기사를 뽑아 읽고, 내가 마치 EBS스태프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올리는 영어 질문을 스스로 공부해서 댓글을 달아주고 '고맙다'라는 말을 듣는 게 그렇게 뿌듯했었다. 처음이었다. '아, 나의 이 미천한 영어 실력으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구나'를 느낀 건.


그 당시 모닝스페셜은 현존하는 방송 중 가장 어려운 영어 교육프로그램 중 하나였는데, 매일 방송이 끝나면, 당시 조연출이었던 스태프가 그날의 뉴스 기사와 진행자 분들이 애드리브로 나눈 부분을 받아써서 올려주셨는데, '이걸 혹시 내가 하면,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부족한 영어로 받아쓰기를 하고, 가끔 게시판에 내 결과물을 올려보곤 했다.


9-1. 영어 프로그램 덕에, 방송일을 하게 됐다고?

모닝스페셜을 시작으로 EBS의 모든 영어 방송을 들어보기 시작했다. 초급영어(이지 잉글리시), 중급영어(파워 잉글리시) 등 다양한 방송이 있었고,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물론 못 알아듣는 부분도 많았지만, 이때 처음으로 영어가 재미있고 탄력이 붙었다는 느낌이 들어, 매일을 꾸준히 듣고 따라 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닝스페셜 조연출님께 한통의 이메일이 날아왔다.


주혁 님, 제가 군대를 가게 돼서
조연출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혹시 모닝스페셜 조연출로
일해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세상에, 고등학교 때 꿈이 라디오 PD였던 내게, 모닝스페셜 조연출 제안이 왔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얘기하고-어차피 휴학한 프로 빈둥러에게 주어진 기적과도 같은 제안-바로 다음날 그분을 만났다. 당시 대부분의 인터넷 게시판은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과 비밀번호'등을 적어야 사연을 올릴 수 있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 청취자들을 위해 받아쓰기를 올려주고, 열혈 팬이 되어 댓글을 달아주는 나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아 연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좀 급하게 그만두게 되어 당장 다음 주부터 일해줄 수 있냐는 질문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네, 영광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 5시 반까지
우면동 스튜디오로 가면 될까요?

9-2. 하루 9시간 영어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막상 스튜디오에 가보니,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게 있었다. 영어교육프로그램 방송 스태프가 내가 몸담고 있는 방송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가끔 벌어지니, 청취자들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방금 무슨 방송사고가 난 것인지 '긴가민가'하는 느낌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뿐인가. 대학교 진학까지 7-8년 영어공부를 했지만, 대본에 없었던 애드리브 부분을, 100% 이해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이제 '내가 조연출'이니, 이전 조연출 님이 매일 올려주셨던 '뉴스 기사와 해석, 애드리브 부분의 딕테이션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애타게 기다리는 청취자들을 위해 최대한 빠르게. 첫날, 25분짜리 뉴스 코너를 다 받아 적는데, 무려 9시간이 걸렸다. 죽어도 안 들리는 단어는 정말 죽도록 들었다. 밤 10-11시가 되어서야 기사 번역을 올리는 일이 허다했다. 그걸 일요일만 빼고, 총 11개월 했다.


9-3. 괴로웠던 받아쓰기, 놀라운 받아쓰기의 효용.

허리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9시간을 앉아서 영어만 들으면 진짜 시쳇말로 하늘이 노래진다. 귀도 먹먹해진다. 처음 해본 영타는 오죽 느리지 않았을까. 아무리 검토를 다시 해도, 글을 올리고 나면 오타가 보였다. 가끔 청취자들이 '혹시 저기 쓰신 저 단어는 A가 아니라 B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매일 더 열심히 들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받아쓰기를 하던 9시간은 4시간으로 줄었고, 6개월이 지났을 때, 4시간은 2시간으로 줄었고, 9개월쯤 됐을 때, 2시간은 40분으로 줄었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게 될 때쯤엔, 25분짜리 클립을 알맹이를 채워서 그대로 받아 적는데 30분이면 충분했다. 그랬더니 웬걸? 한 번도 공부하지 않은 토익 LC가 495점, 즉, 만점이 나왔다. 덕분에 지금도 키보드 영타를 눈 감고도 엄청 빨리 칠 수 있는데, 이게 다 그때의 받아쓰기 덕분이다.


영어 받아쓰기가 진짜 놀라운 이유는 첫째, 제대로 듣고 써야 한다는 점, 둘째, 본인이 쓴걸 눈으로 확인하면서 놀랍게도 오탈자나 문법이 교정된다는 것, 셋째, 문법이 교정되고 그 문장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면, 실제로 말할 때도 문법 걱정없는 문장을 내뱉기가 쉬워진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걸 입으로 따라해 보면, 그야말로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가 동시에 학습된다는 데에 있다. 물론 고전적인 방식일 수 있고, 누구는 고리타분하다고 할수 있다. 단, 정말 한번만 꾸준히 해보면 안다. 왜 받아쓰기가 그렇게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10. 9.11 테러 뉴스를 가족들에게 통역하다  

모닝스페셜 조연출이었던 건 2001년 1월부터였는데 그해 9월쯤이 되어 듣기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졌다.  어느 날 9.11 테러가 발생했고, 모든 TV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현지 상황을 동시통역해 전달하고 있었다. 사건의 중대함이나 위급함으로 봤을 때, 이건 '내일 아침 소식으로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할 일이 아니었다.


같이 TV를 보던 부모님에게 당시 외신에서 전달되던 영어 자막과 음성을 통역해드렸다. '아, 방금 그 단어는 이 뜻이에요', '통역사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순서를 다르게 얘기한 것 같아'라면서. 누가 들으면 '영어에 미쳤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물론 동시통역 실력 수준이 될 정도였다고 절대 말할 수 없지만, 그저 '영어를 듣고, 이해하고, 말하고, 전달할 수 있다'는게, 가장 큰 뿌듯함이었던 것 같다.


11. 점수가 목적인 토익 공부는 죽어도 싫어 싫어.

영어 실력이 아주 조금 나아지고 나니, 영어 공부를 왜 하는가? 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끝없이 맴돌았다. 시험을 위해? 성취감을 위해? 아니면 대학교 공부에 더 도움이 되기 위해? 유학을 가기 위해? 등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실력도 좋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생각했던 단 하나의 키워드는 이거였다.


'시험이나 공부를 위해
영어공부를 억지로 하는 건 그만 하자.'

그냥 영어를 영어 자체로 공부할 순 없을까. 영어가 즐겁고 재미있어서, 답을 맞히는 공부보다는 일상에서 익히는 영어를 할 순 없을까. 그래서 토익공부를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토익을 잘 볼 순 없을까. 그냥 '국어'라고 생각하고 시험을 보면 안 될까. 그래서 진짜 어린놈이 고지식하지만 남들 다하는 토익 공부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냥 요령 익히지 않고 내가 아는 만큼만 시험 해보고 싶었다. 내 실력이 얼마나 늘었을지도 궁금했다. 내가 토익을 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유일한 방식은, 토익 시험 전 '모의고사 두 번 풀기'였다. 물론 종로에서 무척 유명하다던 학원을 1개월 다닌 적도 있었지만, 문제풀이 요령만 가르치는 영어 공부 방식이 너무 싫어서, 곧 그만두고 말았다.


12. 영어를 쓰는 관광통역사가 되고 싶어요.

영어에 좀 재미가 붙자, 이렇게 공부한 영어로 뭘 할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하고 설렜다. 그래서 얼떨결에, 당시 70만 원이나 했던 걸로 기억하는 관광통역사 자격증 학원에 등록했다. 매일 영어 독해를 하는 게 너무 지겨웠지만, 관광통역사가 되면 우리나라에 관광 오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들을 당당하게 소개해 줄 수 있겠다는 자긍심과 믿음이 나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광통역 자격증 시험에는 떨어졌다. 정말 비싼 수강료를 냈지만, 관광 상식, 역사, 지리 등의 시험까지 공부하는 게 진짜 고역이었다. 그때 나에게 남았던 건 '여전히 즐거운 영어' 그리고 '수업 끝나고 을지로, 종로를 누비며 함께 공부하는 좋은 사람들과 술 한잔 하는 재미'밖에 없었다. 비록 관광통역 자격증은 따지 못했지만, 지금도 '명예관광통역안내원' 자격증은 가지고 있다. 무료 자원봉사 개념의 자격증. 그때 영어 공부가 그 무엇보다 재미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13. 친구 따라 강남 가다 공군 통역병이 되다.

군대를 가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중, 카투사 KATUSA에 지원했지만 안타깝게 낙방했다. 당시엔 나 자신에게 변명을 했던 것 같다. 영어 때문에 떨어진 게 아니라,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영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친구가 공군 통역병에 지원입대를 했는데, 기간은 길지만 영어를 자주 쓰게 되어 좋다는 말에, 덜컥 공군 통역병-심지어 복무기간이 줄어도 30개월이었던 당시-에 지원을 했다.


통역병 면접에 참석했더니 필기 시험과 함께 통역병 선임 두명의 대화를 순차 통역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방송일을 했던 것, 그리고 영어를 자연스럽게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되었고, 결국 운 좋게 통역병에 합격했다. 진주의 공군 훈련소에서도 더 좋은 자대를 배치받기 위한 공부는 끝이 없었다. 오죽하면 성적별로 자대 배치를 한다는 것 때문에, 밤에 보초서는 동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샤워실에 가서 희미한 훈련소 불빛을 비추며 공부하는 동기들도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14. 다들 나보다 영어 잘하네? 그것도 훨씬 더.

훈련소 전체 인원 중, 총 6명의 통역병 동기들이 있었고, 그들이 갈 수 있는 부대는 단 세 곳이었다. 용산의 한미연합사, 계룡시의 공군본부, 그리고 청주의 공군사관학교. 어찌 됐든 영어는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한미연합사에 지원했고, 하늘이 도왔는지 연합사에 배치를 받게 됐다. 연합사 한국군 중대는 약 100여 명, 그중 대부분은 육군 통역병이었고, 소수인원으로 공군, 해군, 해병대가 있었다. 모두 합쳐도 스물다섯 명이 될까 말까.


중요한 건, 군별 인원수가 아니라, 100여 명 중에, 해외 대학을 나오지 않았거나, 해외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딱 열 다섯 정도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였다는 것.


나의 끝없는 영어공부는 여기서 또다시 시작되었다. 같이 생활하는 수많은 통역병 선임, 동기, 후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추고 싶다는 생각, 함께 일하는 미군들에게 한국 군인으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동기부여, 바로 그 두가지가 나의 영어 실력을 꾸준히 향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부대 내 극장에서 상영된 살면서 처음 본 자막 없는 외화, 미군들과 함께 하는 체육 대회, 밤샘 상황근무(야간 정보병과 근무)를 서며 미측 장교들과 나눴던 그들의 인생 이야기.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영어 실력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15. EBS 모닝스페셜 작가가 되다.

제대하기 2주 전, 공군 병사답게 긴 휴가를 나왔고,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군대 가기 전에 함께 일하며 동고동락했던 EBS 모닝스페셜 제작팀이었다. 조연출 시절 담당 PD님을 만나 곧 제대하노라고 인사를 드리니, PD님이 말씀하셨다.

혹시 아직도 방송일 재미있니?

그럼요 PD님, 물론이죠.


PD님 말씀은 이랬다. 9월에 보통 EBS가 개편을 하는데, 진행자도 작가도 변경될 수 있으니, 통역병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혹시 모닝스페셜 작가를 해볼 생각이 없냐는 것. 내가? 감히? 내가 제일 사랑했던 EBS 모닝스페셜의 작가가 된다고? 생각만 해도 꿈만 같았다. 아직 제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되겠는지를 여쭙고, 제대하는 날이 개편 후 두 번째 방송이니 그날부터 합류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곧 어둠의 계곡이 펼쳐졌다. 가슴 뛰는 생방송은 즐거웠지만, 심지어 내가 '최애'하던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하는 건 더욱 신이 나는 일이었지만, 출연자 전원과 영어로 소통하며 모든 내용을 조율하고, 매일 24페이지의 영어 원고를 쓰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오타라도 나면 어쩌지, 청취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면 어쩌지. 가뜩이나 예민한 내가, 이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하루 2시간 자기, 학교 다니는 지하철에서 원고 쓰기, 공강 시간에 방송용 영어 기사 찾기, 일상 생활 속에서 내일 방송 표현 찾아 준비하기.


그렇게 나는 1년 7개월을 EBS 모닝스페셜에서 '친절한 주혁씨'로 살았다. 당시 모닝스페셜과 함께 했던 손희준 부장님, 홍주희 선생님, 매튜 레드맨, 보이드 캘리 등 기타 여러 출연자들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강렬한 추억과 기쁨을 남겨 주기에 충분한, 진심으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16. 세상에, 제가 영어 공부 책을 썼어요.

1년 반을 넘게 하루에 두세 시간 자며 살았다. 그후에 흉추 하나가 피로골절로 부러지는 바람에, 방송 작가 일도 그만두고, 방송과 병행하며 죽을 힘을 다해 매일 3-8교시를 들으며 다녔던 학교도 휴학하고 집에서 쉬었다. 물론 방송 작가 경력 덕이었는지, 번역일, 작가일, 교재 공저 일이 간간히 들어왔다. 즐거웠지만 쉬운 일들은 아니었다.


방송과는 또 다른 막중한 책임감. 최대한 자연스럽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영어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로 등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스탠드를 세워 두고 누워서 글을 썼다. 그때 함께 책을 썼던 여러 선생님들 덕에, 또 한 번 나의 영어 실력은 도약하게 되었다. 정말 영어 덕이 아니었다면 쉽게 누릴 수 없던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17. EBS 다큐멘터리 번역의 성취감.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도 국제 다큐 영화제라든지, 행사 등 TV 쪽 번역을 종종 하긴 했지만, 작가 일을 그만 둔 후에도 소개를 통해 해외 촬영 다큐멘터리들을 번역하고, 자막을 다는 파트타임 일도 할 수 있었다. 그때 제일 재밌었던 작품들을 꼽으라면, [인간의 두 얼굴], [외계 생명체를 찾아서], [피타고라스 정리의 비밀 3부작], [감기] 등이다. 모두 인간의 호기심, 심리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를 깊게 들여다보는 재미있는 작품들이었다.


편집실에 혼자 앉아, 인터뷰 영상을 수십, 수백 번 돌려가며 더 좋은 자막을 완성하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TV 속에서 멋지게 살아나 여러번 수상을 하고,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은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목덜미의 잔털이 모두 일어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물론 최고의 제작진, PD님, 작가님 등 스태프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 나는 비록 '자막'을 입히고 해외 사례, 논문 조사 등의 리트 서치를 담당했던 것 뿐이었지만, 이 작품들은 내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성취감과 뿌듯함을 안겨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 엠넷 해외 초청 가수 인터뷰.

지금도 생각하면 오글 거리는,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가수 '크렉 데이비드'의 방한 인터뷰. 당시 나와 친했던 원어민 선생님이 통역을 도저히 할 시간적 여유가 되지 않아서, 원본 촬영 테이프를 듣고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엠넷 편집실에 틀어박혀, 밥도 못 먹고 자막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노래가 하필이면 아이스크림 맛을 성적으로 표현한 끈적한 가사가 들어있던 'What's your flava?'였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인터뷰에서도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 너무 많아서 정말 번역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엠넷 방송 관계자에게 자막 전달을 하고 나서도 '과연 엠넷 제작진은 뭐라고 했을까', '해외에 오래 살다온 사람이 이 방송을 본다면 자막을 보고 무슨 말을 했을까'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방송이 나가고도 며칠을 끙끙 앓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다시 한번 느꼈다. '학습, 공부, 시험만을 목적으로 배우는 영어는 정말 의미 없구나'라는 확신. 생활로, 일상으로, 몸소 체득하지 않는 영어처럼 쓸모없는 것도 없다는 것.


19. 해외 결혼식 사회와 통역을 맡다.

EBS진행자이자, 이제는 정말 '형, 동생'이 된 매튜 레드먼. 이제는 매튜의 부인이자, 내 친구가 된 와이프의 영국 현지 결혼식. 당시에도 많이 친했던 매튜는 나에게 '혹시 영국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사회를 봐줄 수 있겠냐'라는 놀라운 질문을 던졌고, 그때 정말 무슨 용기였을까. '그러겠다'라고 말하고, 나는 성년이 된 이후 인생 최초의 해외여행이자, 영국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릿저릿하며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바로 '내가 그 결혼식을 망쳐버렸다'는 느낌.


당시만 해도 미국식 영어의 발음이나 단어가 '압도적으로 인정(?)'받던 한국에서 영국식 영어는 당시 굉장히 생소했는데, 오죽하면 사람들이 대한민국 방송 사상, 라디오에서 영국식 영어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해 준 최초가 바로 매튜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웬걸. 매튜가, 전국 각지의 친척, 친구들을 모두 초대하면서, 나의 미국식 영어 뇌의 스위치를 꺼 버렸다. 초대 손님들이 마이크를 돌려가며 전하는 결혼식 축사를 한국 가족들에게 통역해줘야 하는데, 흥에 돋고, 환호성이 터지고, 술에 잔뜩 취한 하객들 사이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식 발음으로 전달되는 영어는, '단 한 단어'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렇다고 축사를 하는 와중에 'Excuse me? 뭐라고요?', 'Sorry 네?'를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최선은 다했지만', '어마어마하게 엉망진창'이었다고 기억되는, 그래서 기억 속에서 '순삭'해버리고 싶은 그때의 결혼식 통역은, 또 다시 한번 '아, 내 영어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경상도 사투리를 들어도, 전라도 사투리를 들어도 뜻이 다른 생소한 단어 외엔 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어야 맞다. 하지만 나는 십수년을 그렇게 영어 공부를 하고도, '단지 그들의 발음이 생소하다'는 것 때문에, 성스러운 결혼식 축사 통역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랜 기간 동안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20. 순차 통역도 쉬운 일은 아니더라.

그뿐인가. 또 몇 년 후에 또 다른 사건도 있다. 지금 생각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이었는데, 친한 친구의 아버님이 HR 교육 관련 박사님이셔서, 국제 학술 세미나 통역을 부탁받았던 것. 내가 원래 관심이 있어하는 '교육', '심리', '발달' 등의 주제가 나온다고 했고, 아주 저명하신 연설자가 내한하신다고 해서, 그 기회를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 것도 많겠다는 희망에만 부풀어 덜컥 수락했던 게 화근이었다.


교수님과 박사님들의 영어실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그분들의 입에선 숨 쉴 틈도 없이 '논문급'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뿐인가. 세미나 시작 전에 서로 인사 나누고 대화를 나눴던 반가운 기억이 있었는지, 교수님들은 엄청나게 어려운 농담과 연구사례들을 예로 들어가며, 통역이었던 내게 '순차 통역'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4-5분을 쉬지 않고 말씀하셨다.


정확한 의미 전달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세미나에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이 얼마나 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던지. 10년도 훌쩍 넘은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 그 장소와 분위기, 연신 '죄송하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던 나의 초라한 모습, 실망스러워 보였던 참가자들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다시는 오만한 태도로, 내 능력 이상의 일을 '맡지 않겠다'라고 백번 천번 다짐했던 순간.


21. 직장 선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

프리랜서 일과 반복된 휴학으로 대학 졸업이 꽤나 늦었던 30세, 정말 운 좋게 포스코에 합격했다. 해외 공급사들과 영어로 소통하며 제철 원료를 구매하는 일. 그때 한 가지 화제가 되었던 건, 전체 입사 동기생 중에 나 혼자 토익 점수가 990점 만점이었다는 것이었다. 입사하는 첫날, 경직된 걸음으로 자리에 가서 앉자마자 '오~ 너구나? 토익 만점자라는 애가?'라는 선배들의 얘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남들보다 조금 더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 덕에 인도네시아, 필리핀, 홍콩, 일본 출장도 도맡아 가곤 했지만, 비즈니스 영어와 내가 알던 영어는 또 다른 결이 있었다. 가격 협상, 계약 체결 등은 '엄마 저 왔어요. 배고파요' 수준의 영어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당시 포스코에는 '학습동아리'라는 게 있었는데, 그룹 구성원들끼리 자발적으로 자기 계발을 하거나 취미활동, 지식 공유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거기서 내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이었냐면, 바로 그룹원들에게 당시 승진 평가에 반영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토익 스피킹' 가르치기.


내가 그걸 맡은 이유는 단지 '토익 만점자'였다는 것 때문이었는데, 말단 신입사원이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 상무님을 앞에 앉혀 두고, 점심시간, 저녁시간마다 테이프를 틀어가며 토익 스피킹을 가르쳤던 촌극같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물론 나는 그 비합리성 때문에 퇴사도 했지만.


22. 외국계 회사에 합격, 근데 영어는 언제 써요?

포스코를 1년 남짓 다니다 그만두고 쉬던 중, 이미 이직을 했던 포스코 동기에게 반가운 연락이 왔다. 외국계 회사 '한국쓰리엠'에 빈 자리가 있는데, 왠지 형에게 잘 맞을 것 같다며 지원해 보라는 것. 백수가 취직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바로 원서 지원을 했고, 정말 운 좋게 2주 후부터 출근을 했다. 하지만 외국계 회사의 실제 모습은 안팎의 온도 차가 꽤 컸다. 수두룩한 PPT 자료만 영어로 만들면 뭐하나, 실제로 영어로 대화할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미국 본사나, 아시아 헤드쿼터인 싱가포르로부터 상급 임원이 방문했을 때, 그동안 진행했던 '베스트 프랙티스'나 '매출 달성 계획'을 발표하는 정도랄까. 지금도 상당수의 외국계 회사 임직원들 중, 영어를 '진짜배기'로 잘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느낀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만, 외국에서 회사를 다니지 않는 이상, 한국 내 외국계 회사에서 진짜 제대로 영어를 쓰는 회사는 내가 보기에 그렇게 많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구글, 아마존 같은 회사라면 모를까.  


23. 이게 내가 설레던 바로 그 영어 환경인가.

매일 같은 단어, 반복되는 축약어만 보고서에 쓰는 외국계 회사의 영어 환경은 퍽 재미가 없었다. 한국인 동료들과 영어를 쓸 일은 만무했고, 외국에서 1년에 서너 번 몇몇 임원들이 올 때마다 회의 통역만 맡는 건 지루했다. 미국 본사에 출장을 가게 될 일이 있어서, 본사 투어도 하고 전 세계에서 모인 3Mer들과 파티도 하고 여행도 했지만, 그건 잠시일 뿐. 다시 돌아온 한국의 사무실에선 영어를 쓸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 시간을 계속 겪으며, 아직 꺼지지 않은 내 안의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는데, 그건 바로 '영어를 하루 종일 쓰는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것.'


대학교 때는 방송일과 학교 생활을 병행해야 했고, 천문학적인 사립대학 등록금 문제가 언제나 전자발찌처럼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토록 꿈꾸던 스페인어-내 전공이다-교환 학생 같은 건 마음만 굴뚝같았지 언감생심이었는데, 직장을 다니며 '현실 아재'로 전락해 버리니 이제는 앞으로 영어도, 스페인어도, 재미로 배웠던 러시아어도, 고등학교 때 2년이나 배운 중국어도 영영 쓸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과연 이게 내가 설레고 좋아했던 언어 사용 환경인가.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24. 늘지 않는 영어. 진짜 이유가 뭐죠?

한국 사람이 으레 말하곤 하는 '영어가 가장 어려운 순간'이 있다. 바로 '같은 한국 사람 앞에서 영어 하기'. 아마도 이 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예상하지만, 그건 바로 '완벽한 영어에 대한 강박', 그리고 '누가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뒤섞인 공포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내가 전화로 영어 하는 걸 누가 엿들으면 비웃지 않을까. 내가 했던 말이 문법적으로 틀리진 않았을까. 10년을 넘게 공부하고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놓고도 영어를 그것밖에 못한다고 하면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까. 이런 것들. 심장이 조여 오고,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는 타인의 '완벽한' 영어에 그렇게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곤 할까. 한국어를 대입해봐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모국어가 한국어라고 해서 모든 한국 사람이 '말을 잘한다'라고 할 순 없다. 누군가는 요상한 단어를 쓰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맞춤법, 문법, 주술 관계가 맞지 않는 문장들을 메신저, SNS에 아무렇지도 않게 옮겨 놓는 사람도 허다하다. 하물며 한국어만 그럴까. 영어도, 불어도, 스페인어도, 러시아어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영어를 진짜 잘한다는 건, 관사를 틀리지 않고, 분사를 제대로 쓰며, 상황에 맞게 현재 완료형을 쓸 수 있다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혹시 틀리더라도 유창하고 즐겁게 '소통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의 정의다. '완벽성'에만 목을 매는 영어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대화와 공감, 상황에 맞는 대응, 의견 교류를 할 수 있는 영어가, 과하게 또르르 굴러가고 a, an, the, 무관사를 구분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영어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워러', '워터', '우워터어ㄹ', '워떠' 모두 '물'이면 된 거다. 얘기라도 해서 '물을 마셔야'하는게 발음 걱정하다 목말라 죽는것보다 나은거 아닌가? 사실 관사 같은 건 공부보다는 일상에서 느끼면서 체득하고 나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 a 여야만 할까. 왜 an이어야만 할까. 왜 굳이 the여야만 할까. 혹은 관사가 없어야 할까를 두고 '본질'을 고민해 보면, 사실 이런 건 '외워지는게 아니라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는 걸 알수 있게 된다.


25. 해외 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꿈. 

결국 나는 말레이시아에 올 수 있었던, 어떻게 보면 모든 경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던 기회를 움켜쥐었다. 대학교 때부터 꿈꿔왔던 '영어 사용 환경'에서 '살아보고, 일해보고 싶다'는 욕망. 그걸 지금 3년째 채워가고 있다. 비즈니스 영어부터 시작해, 생활 영어는 기본이고, 단기 여행자의 삶과는 양태가 너무도 다른 장기 생활인의 입장에서 영어를 매일 사용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


처음 왔을 당시엔 24시간 영어를 해야 하는 환경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영어를 올바르게 구사해야 주어진 일에 실수가 없을 거라는 부담도 컸다. 복잡다단한 해외사업의 모든 면면을 영어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스무 명에 가까운 직원들에게 이해시키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한국의 모든 것들을 설명해내야 하고, 말레이시아의 모든 것들을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몇시간 동안 영어를 쓰고 나면 머리에 쥐가 나는 듯한 적도 있다. 직원들과 돌아가며 1대1 미팅을 몇시간 동안 하고 나면 극심한 편두통이 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과정이자, 과거일 뿐.


이제 3년 차가 되고 나니, 누구 앞에서 영어를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심쿵'하는 일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3년 전 이주혁이 세계적인 가수 아델을 만나 대화를 해야 한다면, 1) 설렘 2) 긴장 3) 영어 4) 발음 등이 걱정거리이자 문제였겠지만, 해외 생활 3년차 이주혁은 이제 1) 설렘 만으로 아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매일 고민한다. 심지어 매일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도 이 고민을 쉼도 없이 한다.

과연 나는 영어를 정말로 잘하는 사람인가?

영어로 된 책도 읽고, 밖에 나가면 보이는 모든 게시판이 영어, 말레이어고, 현지 뉴스들을 영어 기사로 보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탐라'가 영어로 도배되어 있으면서도, 오늘 아침에도 3시간 짜리 영어 미팅을 하고 왔으면서도, 그렇게도 나는 아직도 영어에 목마르다.


나는, 아직도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원서를 읽을 때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난생 처음'보는 단어들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고, 발음이 정말 색다른 말레이시아 각지의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귀를 쫑긋 세워야 할 때도 있다. 생활에 필요한 법이나 세금 관련 문서, 일에 관련한 계약서, 국제 정세나 환경에 관련한 뉴스, 또는 위트가 가미된 해외 블로거 글 등은 아직도 읽으며 버벅거리는 부분도 많고, 이해가 어려운 표현들도 여전히 많다. 물론 모두, 나의 지적 게으름, 부족한 열정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이렇게 매일 영어를 쓰면서도, 아직도 부족하고 서툰 나의 영어 실력이란.




다만, 이제 정말 제대로 알겠다.

나는 오류가 없는 완벽한 영어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와 다른 세계인들과 웃으며 소통하고 싶다는 것을.
국사 시험에 나오는 각 나라의 건국 시기를 달달 외는 듯한, 학습과 공부로서의 영어가 아니라 진정으로 교감과 소통을 위한 영어를 하고 싶다는 것을.
그리고 한국인 앞에서 주눅 드는 영어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성장을 위한 영어를 하고 싶다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영어 공부를 해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매일 1mm씩 영어라는 '소통의 창'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더 넓은 시야를 품으며 아주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게, '진짜 별거 없는데, 별게 있는' 나의 진짜 인생 영어 공부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모두 '완벽하지 않더라도 크게 별일 없는 영어' 덕분이다.





[결론]

끝으로 두서없는 글을 맺으며, 내게 도움이 된 영어 공부법을 열두 가지로 정리한다.


1) 받아쓰기는 무척 괴롭지만, 그 결과는 위대하다.

2) 영어식으로 사고하라. 단어의 기원과 본질을 영어로 생각하라.

3) 머리 속에서 한국어를 먼저 꺼내면 영어는 절대 늘지 않는다. 절대로 1대1 대응으로 번역 안된다.

4) 영어는 영영 사전으로 공부하라.

5) 내게 가장 즐거운 것으로 영어를 배워라.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여행이든.

6) 자막없이 드라마, 영화보고 듣는 걸 생활화해보라. 나는 집에서 쉬는 시간에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항상 틀어놓는다. 집안 일을 하면서, 귀로만 들어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테스트해보라.

7) 본인이 기본 상식이 있고, 재미를 느끼는 주제의 책을 읽어라. 단,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고 계속 멈추면, 그 독서는 영원히 멈춘다. 과감히 넘어가면서 문장과 내용 안에서 맥락과 뜻을 이해하는게 더 좋다.

8) 완벽한 영어에 대한 강박을 버려라. 어차피 모국어도 완벽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영어를 완벽하게 할수 있을까. 원어민도 관사 틀린다. 쫄지 마라.

9) 단어의 뜻을 절대로 한정하지 마라. Have를 '가지다'로 외우는 순간, 당신의 영어는 거기서 멈춘다.

10) 정말 자주 쓰는 표현은 덩어리로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도록 따라 읽고 입으로 말해보아야 좋다.

11) 순간 순간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영어로 정리해 보면 도움이 된다. 같은 감정이라도 다음 번엔 유사하지만 다른 단어를 써서 표현해 보려고 애써보면 더 좋다.

12) 일상의 남는 시간들을 영어로 채워라. EBS 영어 라디오 같은 것도 좋고, TBS eFM도 좋고, 팟캐스트도 좋고, 영어 신문 기사 한토막도 좋다. 짧더라도 집중해서 보고, 듣고, 느끼면 큰 도움이 된다.


* 영어공부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공감이 되는 글이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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