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 사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랑의 리추얼(Ritual)
홀로 해외생활을 한 지 3년이 되어간다. 혼자 멀리 떨어진 말레이시아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들이 아무리 장성했다손 치더라도 엄마에게 나는 그저 '아이'일뿐이다. 말레이시아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해외 법인장으로 일하러 나가고 싶다던 나에게 엄마는 그 어떤 반대 의사도 내보이지 않으셨다. 36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매일 나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나는 안다. 날씨가 얼마나 궂은지,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는지 상관없다는 듯, 엄마는 매일 십자가 앞에 앉아 어제도 했던 기도를 오늘 또 하고 계실 거라는 걸.
성인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일,
네 결정으로 하는 게 좋은 거지
그저 네가 건강하기만 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바로 엄마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처음 말레이시아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바라던 해외 생활, 현지인들과 어울려 새로운 도전을 해나간다는 설렘, 한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유롭고 자유로운 나라, 말레이시아. 그래서 나는 한국을 제법 쉽게 잊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고추장의 민족인지 매운맛의 후예인지, 가끔씩 현지식 밥이 좀 물리거나, 내가 해 먹는 밥도 시원찮을 땐, 고추장을 듬뿍 풀어낸 국물에 매콤하고 달콤하게 졸여낸 떡볶이 한 그릇만큼, '당기는 매운맛'을 순식간에 사그라들게 해주는 음식도 없었다. 가끔 대형슈퍼마켓에서 한국산 쌀떡볶이를 사다 냉장고에 쟁여 놓을 때만큼 배가 부른 느낌이 들게 해주는 무언가도 없었으니까.
어렸을 때, 엄마는 항상 바빴다. 그때 모두가 그랬겠지만, 아버지는 '사업'으로, 어머니는 '부업'으로 나는 방과 후 대부분을 혼자 집에서 보냈다. 나를 끔찍이 아끼시는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차려 놓은 밥을 살뜰히 꺼내 먹는다든지, 계란 프라이라도 해서 밥 먹은 티를 낸다든지, 설거지까지 해서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다든지 하는 욕심-아니 욕망을-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마땅히 차려먹을 게 없던 차에, 항상 라면을 끓여주시던 엄마 대신, 내가 라면을 끓여먹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문제는 12년 평생 라면을 엄마가 끓여주신 덕에, 도대체 물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무슨 재료를 더 넣어야 하는지, 스프를 먼저 넣는지 나중에 넣는지, '엄마만 알고 있는 내 취향'에 맞게 '꼬들꼬들한 라면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물을 잔뜩 붓고 보글보글 끓인 라면이 조금은 그럴싸해졌고, 김치 통을 꺼내 라면 한상을 차리고 '후루룩' 입에 넣은 순간 느꼈다.
'아, 이게 뭐지..?'
지금은 정확히 알지만, 심지어 눈대중으로도 맛있게 끓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 쉬운 라면 조리법 하나 모르는 아이였던 나. 물을 정량의 3배 이상을 넣고 끓이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아닌 퉁퉁 불어 터진 라면을 놓고 망연자실하던 차에, 때마침 엄마가 들어오셨다.
'아이고.... 얘 좀 봐... 우리 아들.. 엄마가 라면 끓이는 법 알려줘야겠네.'
그때 엄마의 목소리엔 이상하게도 힘이 없었다. 엄마는 뒷면을 보고 어떻게 물을 맞춰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라면이 더 있으니 지금 하나 더 끓여 보라고 하셨다. 결과는 뭐, 보나 마나 대 성공. 그때 알았다. 계량기가 없어도, 혹은 그릇이 없어도, 어느 정도가 '맛있는 라면'에 부합하는 정량의 물인지를. 좁디좁은 부엌에서 엄마랑 두 번째로 끓였던 내 인생 첫 '성공 라면'을, 호로록 호로록 맛있게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하신다. 부도가 나서 가세가 기울었을 때, 엄마가 선택할 수 있었던 생존 방식은 단 하나였다. 뭐라도 벌어야 하니 '식당을 해야겠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그 수입이 없었다면 누나와 나는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을 테니까. 수줍고, 곱고, 여린 우리 엄마가, 강하고, 우악스럽게 손님을 맞으며 식당을 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지난하고 힘든 일을 10년이나 해내셨다. 덕분에 우리 누나와 나는 '생존'할 수 있었고, 엄마는 병이 들었다. 수줍고, 곱고, 여린 우리 엄마가.
"엄마, 나 근데 라면 말고 다른 음식도 만들어 보고 싶어"
"어.. 그럴래?"
"응, 나중에라도 김치찌개랑 된장찌개 정도는 끓일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는 최고의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만드는 법을 '전수'해 주셨고, 근 20년이 넘게 지난 나는 이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하나 더 추가해, 김치볶음밥, 제육볶음 같은 건 기가 막히게 만드는 '요섹남'이 되었다.
말레이시아 생활은 꽤나 괜찮았다. 음식도 맛있고, 매식도, 집밥도 그럴싸했다. 물가가 싸서 다행이었는지, 저렴한 가격에도 입맛에 꽤 잘 맞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기 좋았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한국인의 피가 고추장을 부르곤 하면, 나는 어김없이 '떡볶이'를 만들었다. 가장 간편하면서도, 간식 같지만, 물 조절, 간 조절을 아주 잘해야, 내가 어릴 적 엄마와 시장에 갈 때마다 리추얼처럼 먹곤 했던 '그 시장 떡볶이' 맛을 재현해 낼 수 있다는 게, 일종의 나의 '추억 소환' 방식이었다.
1년에 두어 번 한국에 들를 때, 엄마는 내 귀국 며칠 전부터 계속 카톡을 보내곤 하셨다.
"아들,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없어. 나 여기서 다 잘 먹어요."
"그래도 꼭 먹고 싶은 거 없어? 엄마 밖에 나가도 만들어 놓을게. 편할 때 데워먹으면 돼."
"음... 그럼, 떡볶이???"
말레이시아에서 아무리 좋은 한국산 고춧가루를 사고, 고추장을 훠훠 풀어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다 한들, 엄마가 해주시던 떡볶이 맛은 살려낼 수 없다. 과연 엄마는 나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 국물이 많은 떡볶이라도 떡에는 간이 잘 배어 있어야 하고, 국물이 없는 떡볶이는 눅적눅적해 지지 않도록 잘 조리해야 하고, 품질 좋고 신선한 어묵을 소스에 잘 어우러지게 만들어서, 한입 넣는 순간 바로 '이건 너만을 위한 음식이야'라는 행복감을 주는 떡볶이.
이건 정말 우리 엄마 말고는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확신한다. 내가 아무리 떡볶이를 좋아한들, 그래서 다양한 떡볶이를 먹어보고, 심지어 한국의 10대 떡볶이 맛집을 운전해서 찾아가 본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엄마가 만든 떡볶이만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언제 어떤 재료를 사다 다시 만들어도, 엄마는 내가 원하는 딱 그만큼 이상의 훌륭한 떡볶이를 만들어 주신다. 그 영원하고도 한결같은 감각이 놀라울 뿐이다.
"아들, 먹고 싶은 거 없어?"
"음... 없어. 나 여기서 다 잘 먹는다니까요."
"그래도 꼭 먹고 싶은 거 없어? 엄마 혹시 밖에 나가도 만들어 놓을게. 편할 때 데워먹어."
"음... 그럼.... 떡볶이?"
"또?.... 알았어."
한국에 오랜만에 귀국해도, 일 한다, 친구 만난다, 경조사 간다, 짧게 국내여행 간다, 친구네 집에 가서 잔다... 변명도 많을 '엑소더스'에도 엄마는 항상 나를 위한 떡볶이를 만들어 두셨다. 매번 새로운 재료로 색다르지만 결국 엄마 떡볶이 맛이 나도록.
치즈가 들어있는 떡, 조롱이떡, 가운데에 뽕 하고 구멍이 나 있어서 간이 더 잘 밴다는 특허받은 떡, 둥글둥글한 어묵, 판 어묵 등 재료도 다양했다. 파프리카, 대파, 양파, 고구마 등 다양한 추가 재료로 한껏 푸짐해진 떡볶이. 세상 모든 엄마들처럼 우리 엄마도 자식 먹을 밥 할 땐 알아주는 큰 손이니까.
그저 자식이 좋아하는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서 원 없이 먹고 가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20-30분이면 사 올 수 있는 재료를 며칠 전부터 물어보고 엄마와 가장 관계가 좋은 시장 어느 상점에서 떡볶이를 고르며 '아들이 온다'라고 말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
시장 상인이 엄마에게 '떡볶이 재료 사시는 거 보니까 요번에 아드님 오시나 보네요'라고 말하는 걸 듣고, 복숭아빛 풍선처럼 부푼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네 맞아요. 오랜만에 와요. 그러니까 좋은 재료로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그게 일 년에 고작 나를 세 번 만나는 엄마가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진심이자 정성이었다.
"아 엄마! 아침부터 무슨 떡볶이야 자고 일어났는 데에~! 나 얼른 하고 나가야 돼"
"아이고.. 너 지금 오랜만에 한국 와서 일주일 내내 친구들 만나고 술 마시고 들어온다고 집에서 밥 한 끼도 안 먹잖아. 그럼 네가 먹고 싶다던 떡볶이는 언제 해주니?"
"나 이제 성인이야 엄마.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음식 먹게 좀 두면 안돼? 아침부터 무슨 떡볶이야? 이거 남으면 점심이랑 저녁때 또 내가 데워서 먹어야 되잖아~! 뭘 또 이렇게 많이 했어??"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마도 엄마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한국 땅을 밟기 며칠 전부터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고 재료를 사다 놓고 그걸 기다리고 기다려 부풀어 터질 것만 같은 '사랑'으로 펼쳐내 보일 수 있는 순간만을 오매불망 기다렸겠지만, 장성한 아들은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삼시세끼 매식에 외박을 해대며, 지금 당장은 떡볶이 먹을 생각이 안 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에겐 마치 이렇게 들렸을 차가운 말들.
당신의 사랑이 필요하긴 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요.
내가 사랑이 필요할 때만 주세요.
엄마는 그래도 언제나 떡볶이를 만들었다. '한정된 만남 속'에서 맛이라도 보고 가게 하고 싶은 마음. 차가운 아들의 말들에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셨는지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물으셨다.
"혹시 이따 또 나가니? 바쁘네?"
"오늘은 밥을 어디서 먹니?"
"아침을 늦게 먹어서 점심은 안 먹고 싶으려나?"
엄마는 언제나 떡볶이 재료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우리 아들. 사랑해.
엄마가 해줄 게 이거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해.
장성한 아들이 나이가 더 들면서 특별히 '엄마표' 밥 중에 먹고 싶은 게 없어지고, 말레이시아에서 너무 잘 먹고 다녀서 특별히 당기는 게 없다고 말하는 것도, 엄마에겐 엄마가 이 순간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단칼에 '거절'한 것이었으리라.
부모는 나이가 들면서 자식들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며, 거기에다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인데, 나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집약되고 응축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는 갸냘픈 어린아이'에게 '지금은 너의 사랑이 필요 없어'라고 말하고 있던 터였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요리를 최고로 잘한다. 계량컵도 없이 눈대중으로 간장, 소금, 설탕을 막 넣어도, 엄마의 음식은 언제나 도를 지나친 적이 없었다. 사랑과 정성이라는 '세심함' 덕분이었으리라. 덕분에 나도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요리를 꽤 잘한다. 계량컵도 없이 눈대중으로 간장, 소금, 설탕을 막 넣어도, 불을 끄기 전에 한입 먹어 보면서 나 스스로 감탄할 정도면, 이건 피에 흐르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엄마가 만들어준 떡볶이를 만들 순 없을 것 같다. 그건 내가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 없는 음식 이상의 무언가가 녹아 있기 때문일 테다.
3년 동안 열 번 이상을 한국에 갈 때마다 '떡볶이 타령'을 해대니, 이제 엄마는 '아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카톡이 온다.
떡볶이 해놓으면 되지?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와 신난다. 엄마가 해주는 떡볶이 너무 먹고 싶었어.
예민하고 감성 터진다고 자부하면서도 어떨 땐 한없이 멍청한 아들도 세월이 지나면 철이 조금 들긴 하나 보다. 마흔이 다되도록 철없는 아들은 해외생활 3년이 지나서야, 조금 눈치를 채고 이제야 재롱을 떤다. 그리고 국물에 밥도 비벼먹고, -내가 삶은 계란을 잘 안 먹는다는 걸 엄마가 모르는지 아는지 알 수 없지만- 삶은 계란도 꼭꼭 씹어 먹고, '아 진짜 맛있다! 지난번 꺼보다 더 맛있다. 진짜 와 배부르다, 저녁은 안 먹어도 되겠네,라고 너스레를 떤다.
엄마표 떡볶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엄마표 떡볶이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꿀맛일 수 없었던 우리가 매일 함께 다니던 골목 시장의 포장마차 떡볶이. 어느덧 엄마 품을 떠나 나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된 떡볶이. 그리고 아주 가끔 엄마랑 영화관 데이트나 카페 데이트를 하면서 굳이 가게 되는 분식집 떡볶이. 아직도 품에서 내놓지 못해, 타지에서 혼자 어린아이처럼 생활하는 아들을 위해, 1년에 단 세 번 만들 수 있는 엄마의 떡볶이. 이 모든 떡볶이 속에는 엄마의 사랑이 있었다.
사랑한다 아들, 엄마가 정말 사랑해.
엄마가 손수 만들었든, 다른 사람이 만들었든, 내가 만들어 먹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시장 포장마차 떡볶이에는 어린 내 손을 잡고 남이 해주는 천 원짜리 음식도 '호사'라고 생각하고 먹었던 엄마의 추억과 내가 있었다. 나이가 들어 엄마와 데이트를 할 때는 1-2만 원이라도 내가 본인 때문에 돈을 쓰고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엄마의 메뉴 선택에 언제나 분식집 떡볶이가 있었다. 그마저도 나를 위한 선택이셨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국을 할 때마다 '혹에나 예민하고 입맛 까다로운 아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매번 신선한 떡볶이 재료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밖으로만 나다니는 아들이 대체 언제 이 떡볶이를 먹고 갈 수 있으려나 하루 종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이 있었더랬다.
이제 엄마는 떡볶이에 치즈도 넣어주신다.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치즈라서.
엄마와 떡볶이의 콜라보레이션 [엄마 X떡볶이]는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멜로이자, 로맨스이자, 블록 버스터이자, 휴먼 드라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엄마가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신다 하더라도, 단 한 장면도 가슴속에서 지울 수 없는, 엄마와 나만의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랑의 리추얼 (Ritual)'이자 명장면이 가득한 장편 영화.
아마도 그때 나는, 고추장을 듬뿍 풀어서 어묵과 마늘, 대파를 넣고, 고춧가루를 평소보다 많이 풀어 물을 휘휘 저으면서 떡볶이 떡을 풍덩풍덩 넣을 것만 같다. 냄비에서 올라오는 김은 땀으로 치고, 매콤한 떡볶이를 먹으며 흐르는 땀을 눈물로 치고,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슬라이드 영사기의 한 장면들처럼, 어렸을 적 포장마차 속에서도 곱고 아름다웠던 엄마, 내가 라면 국물로 홍수를 만들었을 때의 헛웃음을 짓던 엄마도 잠깐 지나갈 것만 같다.
영화관 데이트를 하면서 사 먹던 분식집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전히 고운 엄마, 귀국할 때마다 치즈를 넣은 떡볶이를 만들어 주었던 엄마, 내가 삶은 달걀을 먹지 않는데도 그저 더 먹이고 싶어서 큰 솥만 한 냄비를 떡볶이로 채웠던 엄마.
그 모든 장면들을 다시 되돌려 보고 그리워하면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떡볶이를 씹으며, 조롱이떡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떡볶이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한 나를 원망하면서.
P.S. 나는 지금도 엄마가 만들어줬던 그 모든 떡볶이의 사진을 갖고 있다. '우리 엄마'를 지울 수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