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테마기행 오지 말레이반도 촬영, 잃어버린 것

80일 동안 쉴 새 없던 자기 검열의 끝

by 타인의 청춘

EBS세계테마기행 [오지 말레이반도] 편의 큐레이터로 선정된 후 촬영 준비 30여 일, 촬영 21일, 촬영 후 내레이션 녹음을 끝내기까지 25일, 총 80여 일 간, 나는 세계테마기행에 빠져 살았다. 매 순간 '세테기'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라디오 진행,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은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TV 출연, 그것도 21일간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곳을 소개하는 여정은 여러 가지로 내 마음을 휘젓기에 충분했다.


첫째, 내가 과연 자격이 있을까. 둘째, 시청자들은 어떻게 봐줄까. 셋째, 혹시 욕만 먹지 않을까. 넷째, 촬영은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다섯째, 촬영 중에 다치거나 아프거나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마지막으로 내가 TV를 통해, 말레이시아, 태국을 설명하고 공감을 유도할만한 지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가뜩이나 작은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과 함께, 내 안의 두 얼굴이 속삭이듯 말했다.


'와, 이거 진짜 어쩌지.'

'아니야, 너는 할 수 있어.'


촬영 준비 30일

말레이어, 태국어를 공부했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 운동을 했다. 아프고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 혹시나 몸살이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나를 잔뜩 겁먹게 했다. 홍삼, 프로폴리스를 매일 먹고, 몸에 좋다는 비타민, 통깟 알리를 빠지지 않고 챙겨 먹었다. 지퍼백에 촬영 일자별로 넣어 가져 간 건 물론이다. 공황장애와 수면장애가 있는 내가 혹시나 촬영 중에 폐라도 끼치지 않을까, 한국 출장에서 처방받은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도 날짜에 맞게 잊지 않고 챙겼다. 현지인 친구들을 만나 말레이시아 문화, 지역 특색에 대해 질문하고 공부했다. 실제 마지막 5편 [나만 믿고 따라와요, 이포] 편에 등장한 임치호, 카이는 사전에 나와 쿠알라 룸푸르에서 미팅도 해주었다. 둘 모두 바쁜 시간을 쪼개 미리 현장 답사까지 해주고 좋은 방송이 되도록 계속 연락해 주었다. 태국 출장길에 우연히 만난 방콕의 친구는 나콘 시 탐마랏의 친구를 소개해 주었고, 그 친구가 뜨랑과 끄라비의 친척, 친구들을 또 소개해 주는 행운도 있었다. 그뿐인가. EBS 모닝스페셜 라디오 작가 시절의 인연이었던 지인께서 방콕에 해외 연수를 오신 동안 우연히 연락이 닿아, 현지 가이드에게 내가 궁금한 것들을 묻고 이메일에 전화까지 해주시는 감사한 마음까지 받았다.

이포가 고향인 친구 임치호, 나를 위해 선뜻 출연에 응해주었다.
그곳은 어때 말레이시아를 함께 진행하는 카이, 스낀짠을 소개해주었다.

안경과 옷을 샀다. 시청자분들이 편하게 보시려면 어떤 톤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떤 신발을 신고, 어떤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는지 제작진과 함께 준비했다. 안경은 내 날카로운 인상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고, 여행에 어울리는 옷들을 쇼핑하며 TPO를 맞췄다. 오지 여행이다 보니 물에 들어갈 것도 대비해야 해서 무조건 잘 마르고 가볍고 시원한 소재여야 했다. KL에서 보통 사무적인 일만 하는 내게, 여행이나 트레킹에 어울리는 옷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브랜드 로고가 가장 작고 드러나지 않는 옷을 몇 시간 동안 고민해 구입하고, 현장에 어울리는 가방과 신발까지 샀다. 공항 가기 전 30분을 쪼개 머리까지 다듬었다. 휴, 이제 끝난 건가.


나는 말레이시아 현지에 머물렀기에, 제작진과 단 한 번도 대면 미팅을 해보지 못하고 촬영을 시작했다. 뚝뚝 끊어지는 보이스톡, 카페와 친구 집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했던 영상통화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엔 없었다. 사전 조사를 끝냈다는 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나는, TV 출연 초짜였기에.

오지 말레이반도 4편과 5편을 녹음했던 마지막 날 새벽.
촬영 21일

결국 제작진을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제주 출장 후 바로 인천으로, 제작진은 바로 인천공항 로비로. 저 멀리 앉아있는 PD님을 처음 보게 됐다. 뭔가 무뚝뚝해 보이는 카메라 감독님과, 가족들과 인사를 뒤로 하고 뒤늦게 탑승구로 오신 코디네이터 교수님까지. KL로 오는 탑승구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남자 넷의 만남이란 이런 건가. 오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PD님이 커피를 사주셨다.


비행기 앞뒤로 앉아 6시간을 넘게 날아오는 동안, 나는 PD님과 정말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학창 시절이며, 취미, 큐레이터 인터뷰 중에 있었던 일들, 어떻게 촬영이 진행될지 등의 가이드가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PD님이 건네주었던 큐시트를 받았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던 작가님들께서 만들어주신 귀한 선물이었다. PD님이 비행기에서 화장실을 가신 동안 큐시트에 테이프가 붙어 있는 걸 봤는데, 촬영이 어떤 논리로 흘러가야 시청자들이 보기에 좋은 작품이 나오는지를 빽빽하게 써 두었다. 그것도 예쁜 글씨로. 꼼꼼하고 치밀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다, 이 사람.

대인배, 큰그릇, 능력좋고 사람좋은 능력자 방세영 PD님

촬영 감독님은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다. 비행기에서도 줄곧 영화를 보셨는데, 그 후 21일간 차 안에서도 감독님은 끊임없이 영화를 보셨다. 언젠가 한번 촬영 구도나 분위기 때문에 영화를 보시는 거냐고 여쭌 적이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냥 할 게 없잖아요, 허허허. 안 본 영화는 그냥 다 봐요.' 귀여웠다 그 대답은. 처음에 호랑이 같이 무섭던 감독님은 촬영을 마칠 때쯤 나를 둘도 없는 사람처럼 아끼고 챙겨 주셨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감독님이 사주셨던 '주혁 씨가 좋아하는 사탕'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어디든 나와 함께 해주신 베테랑 정석호 촬영 감독님

코디네이터였던 교수님은 세계테마기행 전 출연자이시자 그야말로 말레이시아 '통'이셨다. 운전도, 스케줄 정리도, 계산도, 예약도 모두 교수님의 몫이었다. 21일 내내 나와 한 방을 쓰신 교수님은, 넘치는 유머 감각과 따뜻한 배려, 유연한 대처 능력으로 기지를 발휘하셨다. 본업과 세테기 프로젝트를 바삐 오가면서도, 내가 촬영 후 곯아떨어져 자는 동안 주무시지도 못하고 일을 하셨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날이면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주도해 주셨다.

말레이시아 통이자, 조니뎁 분위기 물씬 나는 훈남, 서규원 교수님


우리는 이렇게 '한 팀'이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 룸푸르, 카메론 하일랜드, 이뽀, 스낀짠, 쿠알라 세페탕, 타이핑, 쿠알라 트렝가누, 쿠알라 롬삔 (총 14일 촬영)

태국 : 나콘 시 탐마랏, 뜨랑, 끄라비 (총 7일 촬영)


큐레이터 촬영 주의 사항

~같습니다. ~같아요. ~하네요 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은 지양할 것

현지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잊지 말 것

지식을 드러내거나 아는 척하지 말고 시청자의 이해, 공감, 감정 전달에 충실할 것

현지인과 잘 어울리고 현지어를 최대한 사용할 것

시청자들이 보기에 불편한 의상이나 복장을 항상 주의할 것

각 나라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자연을 훼손하거나 오염시키지 말 것, 촬영 장소는 모두 청소하고 물러날 것.


세상 예민한 나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꼼꼼한, 프로다운 작가님들이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내 역할만 남았다.


진흙목욕으로 유명한 반램 마을의 아이들과 촬영 후 모두 함께 한 컷

한컷 한컷을 공들여 찍었다. PD님은 주로 촬영 의도를 설명하고 어떻게 전달할지 디렉션을 주셨고, 감독님은 주로 화면의 분위기, 앵글, 그림을 설명하며 이끌어 주셨다.


나는 두 분이 예쁘게 그려주신 그림 속에 등장하는 '전달자'였다. 허나 나는 주로 실수, 멘붕, 동선 꼬임, 넘어짐, 망각을 담당했다. 쿠알라 룸푸르에서 처음 찍었던, 내가 제일 자신 있어하던 설명 장면은 그대로 통편집됐다. -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 어찌나 긴장해 잔뜩 굳어 있었는지. 당최 어디서 어디로 가라는 건지, 뭘 어떻게 설명하라는 건지, 어떻게 해야 좋은 그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오디오 편집을 고려하려면 어느 순간에 치고 들어가야 하는지, 언제 어떤 언어를 써야 할지, 대답을 바로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매번 머릿속이 하얘졌다.


매일 밤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를 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온 하루에 대한 자책감과 다가올 내일의 막막함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아까 그 말을 꼭 했어야 하는데...'

'아, 왜 그렇게 설명을 했지...'

'그 장면에서 더 자신 있게 치고 나갈 걸...'

'현지인들과 좀 더 소통했어야 하나...'

쿠알라 뜨렝가누의 크리스탈 모스크 촬영 장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 능력의 한계치를 시험하는 끝없는 자기 검열은 매 순간 내 마음속에 회오리를 만들어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까지 늘어지게 만들었다. 촬영 3일 만에 입술 한쪽이 갈라졌다. 몸살 기운이 들락날락해, 매일 감기약과 두통약을 먹었다. 단 한순간도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이 나를 짓눌렀다. 더운 날씨에도 모기나 벌레에 물려서 큰일 날까, 긴팔을 입고 자거나, 양말까지 신고 잔 날도 있다. 어느 날 셔츠를 갈아입다가 한쪽 팔에서 15cm가량의 지네가 나왔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5일째 목이 쉬어버렸다.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카메라 앞에서 말해야 하는 순간에만 입을 열고, 목에 좋다는 모든 걸 몸속에 때려 넣었다. 홍삼과 프로폴리스를 하루에 4번씩 먹기 시작하고, 몸살감기약을 하루에 두 번씩 먹었다. 시청자들이 화면을 보다가 듣기 싫은 목소리에 싫증이 날까 조마조마했다. 그뿐인가. 땀이 너무 많이 흘러 시청자들이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을 차단하는 선블록도 거의 바르지 않거나 최소한으로만 발랐다. 예민한 시청자는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화면 속의 내 옷은 대부분 언제나 '젖은' 상태였다. 땀이거나, 물이거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짤방' 중 하나.

무좀이 생겼다. 촬영 21일 중 14일 정도를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아무리 말려도 마르지 않는 신발과 속옷, 겉옷들 덕에 촬영 기간의 중후반부터는 내 옷 냄새가 온 차 안에 진동을 했다. 하늘도 야속하시지. 내가 마음먹고 한 시간씩 빨래를 하는 날에만 그렇게 비가 왔다. 뭐 어쩌겠나. 여긴, 동남아다. 비 맞는 건 괜찮다. 젖어도 상관없다. 제발 촬영만 하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촬영을 쉬어야 했던 순간도 많았다. 우산을 들고 카메라를 써야 한 순간들도 있었고, 나는 물론, 제작진도 이곳저곳에서 꽈당 꽈당 넘어지기 일쑤였다. 카메론 하일랜드 차밭은 방금 물을 주고 난 후였는데, 차밭을 걸어가는 장면을 2시간 정도 촬영하고 나서 실제 방송에는 5초 정도 나갔지만, 바로 거기서 나는 발목을 세 번 접질렸다. '그냥 제발, 촬영 끝나는 날까지 자연스럽게 걸을 수만 있게 해 주세요. 치료는 나중에 받을게요'라고 기도했다.


끄라비에서의 마지막 촬영, 렁 클렁 사캐우 카약킹 준비

산에서만 넘어졌을까. 물에서도 넘어졌다. 어찌나 바위들이 미끄러운지 이래저래 균형을 잡지 못했다. 이미 접질린 발목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시청자들이 불편해 보이면 안 되니 계속 찍었다. 부어오른 종아리가 가라앉지 않아, 이게 금이 간 것이냐, 부러진 것이나, 타박상이냐를 놓고 한참 얘기를 했다. - 물론 타박상이었다. 안 그랬으면 촬영을 중단해야 했을 테니- 정글에서만 거머리에 여섯 군데 물렸다. 모기는 수도 없었다. 처음 들어보는 무거운 추가 달린 낚시 바늘에 새끼손가락이 뚫리고, 새우 더듬이에 온 손바닥에 구멍이 났다. 마시르를 잡는 '물 반, 고기반' 장면에서는 물고기들의 힘이 어찌나 좋던지 지느러미에 스친 손이 갈라졌다. 비 오는 정글에서 집을 짓다가 나무를 잘못 만져 손에 구멍이 났다. 얼굴은 화끈거리고 피부에 두드러기가 나곤 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아무 사고 없이 웃으며 촬영할 수 있었구나로 밤은 끈적하게 지나갔다.


나뿐인가. 감독님은 나보다 거머리에 더 많이 물리셨다. 그 숫자를 세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언젠가는 가슴팍에 거의 총상이 난 핏자국인가 싶을 정도로 거머리가 피를 빨았는데도, 나를 찍느라 물리는 줄도 모르셨단다. 모기와 벌레에 수백 번 물리셨다. PD님은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타버렸다. 한국과 매일 소통하며 영상을 다듬고 모니터링하고, 다음날 촬영을 조율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다. 코디네이터 님은 나와 감독님, PD님의 동선과 현장을 챙기고 배려하느라 나무에 부딪히고, 가시에 찔리고, 미끄러운 곳에서 서너 번을 넘어지셨다.


위대한 자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구아 뗌뿌룽에서 우리 넷.

1시간이 넘게 찍은 화면이 단 몇 초만 나온 장면도 있고, 계획에 있던 촬영을 하지 못해 아쉬웠던 순간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준비했고, 이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해도 만족스러울 수 없는 건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전해 듣기론 나 정도의 고생은 1 레벨부터 5 레벨로 나눈다면 2 레벨 정도라고 했다. 그럼 어쩔 수 없다. 내가 잘해야지.


세계테마기행은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12년을 시청자와 함께한 '웰메이드', '장수 프로그램'. 여러 채널에 팔려 수없이 방영되면서, 언제 다시 보아도 아쉬움이 없어야 하는 프로그램. 까다로운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내용을 구성하고 현장박치기를 해가며 '극복'해내고 '결실'을 맺어야 하는 프로그램.

정말 진심으로 웃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는 시청자 분들도 있었던 뜨랑의 맨손 새우잡이

끝없는 자기 검열이 뒤따랐다. 왜 똑같은 감정을 설명하는데도 어느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100%를 말했을 수도 있는데 왜 30%밖에 못했는지를 자책하며 한숨을 쉬었다. 시청자가 불편하지 않을지를 고민하며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얼마나 맛있게 먹어야 시청자도 '먹음직'스럽게 느낄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의심하면서도 주어진 시간 동안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촬영은 고되고 힘든 작업이었다. 나날이 부끄러움이 더해가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대체로 쉬운 부분이었는데도 한 번에 끝내지 못할 때처럼 미안할 때가 없었다. 나보다 더 고생하는 제작진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세 번 안에 끝내자. 동선이든, 코멘트, 감정이든.'


그렇게 마음먹은 뒤로, 대체로 나는 세 번 안에 모든 장면을 찍었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익숙해지는 것들도 많아졌다. 아주 가끔은


'괜찮아요, 자, 다음 컷 갑시다'

'그 멘트 잘했어요.'

'좋았어요.'로 현장을 뜰 때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었다.


쿠알라 롬핀의 돛새치 낚시를 떠나기 전, 낚시 바늘이 새끼손가락에 끼일 줄이야.


"PD님 이거 다시 찍을까요?"

"아니에요, 됐어요. 괜찮아요."


"감독님, 죄송해요. 다시 갈까요?"

"아닙니다. 내 실수예요. 미안해요. 한 번만 다시 해요."


'짝짝짝'

교수님은 멀리서 내가 해낼 때마다 흐뭇하게 웃어주시고 소리 없는 박수를 쳐 주셨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자연스러웠든, 응원을 보내기 위한 억지웃음이었든, 그렇게 웃었다. 서로를 믿었기 때문이다. PD님이 다시 한번만 더 해보라는 이유도, 감독님이 내 서툰 움직임을 지적하시는 이유도, 교수님이 침대맡에서 매일 밤 다음 날 촬영에 대해 조언해주신 이유도, 모두 우리가 서로를 믿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할 기운도 없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던 때도 있었다. 목소리가 안나와 눈물이 날뻔한 적도 있었다. 으슬으슬한 몸살 기운이 찾아오는 느낌이 들 때만큼 무서웠던 적도 없다. 몇 군데를 다치고 나니 몸을 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도 됐다. 나의 어리숙함과 부족함 때문에 제작진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분량이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한 순간도 많았다.

물 반, 고기 반, 끼리웡 마을에서 나를 친손자처럼 대해주신 두분.

제일 노심초사했을 PD님은 내가 아무리 미숙했던 때에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촬영이 펑크 나거나 도저히 할 수 없는 순간에도 단 한 번도 나를 의심한 적이 없으셨다. 말씀을 하지 않으신 건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말씀을 하지 않고 감내하고 계실 거라'라고 생각하며 촬영에 임했다. 오히려 내가 너무 지쳐서 두어 번 PD님께 짜증을 냈던 적이 있는데, 그때도 PD님은 나를 이해해주고 보듬어 주었다. 역시 '쎄함의 미학'을 믿는 나의 첫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부드럽고 담대한 사람. 꼼꼼하면서도 유연한 사람.


"어제 분량 좀 없으니까 오늘 죽을 각오를 하고 찍을게요. 걱정 마세요 헤헤."

"주혁 씨, 주혁 씨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어요. 죽을 각오 같은 거 하지 마요. 무리한 거 하다가 다치지 말고, 그냥 즐겁게 찍어요."

"근데 정말 오늘 잘 나와야 되잖아요. 제가 진짜 뭐라도 해서 재밌게 촬영해 볼게요."

"그냥 해요. 괜찮아요. 주혁 씨가 재밌고 안 다치는 게 진짜 제일 중요해요. 절대 무리할 필요 없어요."

PD님과 나는 생일이 단 하루 차이였다. 덕분에 촬영 중 공동 생일파티도. 정말 예쁜 웃음을 가진 방PD님. PD님 웃음소리를 들으면 행복해진다.




기십년 차 베테랑 감독님은 평소엔 위트 있고 유쾌하시다가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에만 초예민, 초집중하는 분이셨다. 그게 처음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사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감독님이 얼마나 나를 걱정하고 챙겨주시는지, 못난 나를 예쁘게 담아주시려고 공들이셨는지 알게 됐다. 오죽하면 내가 감독님을 '박카스 선풍기 남 - 더운 날씨에 아무런 말없이 부인에게 선풍기 머리를 돌려주는 남자-'이라고 불렀을까. 소위 '츤데레'도, 이렇게 귀여운 츤데레가 있을 수 없었다. 인생 경험을 나눠주시고, 왜 자세가 구부정하면 보기 좋지 않은지,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더 자연스러운지, 내 말투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정말 꼭 말해야 할 때'만 넌지시 한두 마디 던지시는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넘어졌다고 파스 붙여 주시고, 밥 먹을 때마다 내 음식부터 챙겨주시고, 해가 쨍쨍한 날엔 내 빨래를 말려 주시고, 내 실수도 본인의 잘못이 있었다며 다시 찍자 하셨다.


"어? 이 사탕 되게 맛있어요 감독님. 잼 같은 게 들어있어서 완전 제 스타일!"

며칠 뒤 휴게소에서 화장실을 다녀오신 감독님 손에는 또 사탕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이거... 주혁 씨 좋아하는 거잖아요."

한없이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진정한 츤데레남 정석호 감독님. 감독님이 몸을 던지며 촬영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코디네이터였던 교수님은 인맥과 연륜, 경륜을 총동원해 모든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셨다. 다년간의 말레이시아 생활도 도움이 되었을뿐더러, 학생들을 가르치는 분답게 모든 설명이 명쾌하고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면서도 유쾌한 사람. 이전 촬영에 대한 조언은 물론이거니와 내일 있을 촬영에 대한 콘셉트를 자기 전에 꼭 설명해 주셨다. 어떤 부분에 주의해야 하는지, 어떤 느낌을 살려야 할는지 함께 고민해 주셨다.


"교수님, 저 솔직하게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정말 너무 모르겠어요."

"음, 이렇게 설명해 줄게요."


피곤한 와중에도 교수님은 해박한 지식과 경험으로 나에게 힘을 주셨다. '주혁 씨 지금도 참 잘하고 있는데, 나라면..'이라는 배려도 잊지 않으셨다. 물론 나는 교수님이 주신 조언 중 30%도 해내지 못했다. 그만큼 코디네이터이자, '방짝'으로서 교수님은 내게 분에 넘치는 분이셨다.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들로 마을 주민들과 다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촬영 후 25일

21일간의 촬영이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원래 자리로 떠났다. 한동안 정신이 반 정도 - 아니 그 이상- 나갔던 나는 말레이시아행을 포기하고, 마지막 촬영지였던 끄라비에 남아, 그냥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주는 6일간의 휴식. 정말 이틀은 빨래만 했다. 빨고 널고 빨고 널고 말리고 또 말리고. 또 이틀은 잠만 잤다. 원래 잠을 '보충'하려고 자는 건 의미도 없다지만 진짜 너무 피곤해서 자도 자도 끝이 없더라. 방문에 DO NOT DISTURB를 걸어놓고 오늘은 청소 안 해줘도 상관없으니 물이랑 수건만 달라고 하고 계속 잔 날도 있었다. 그 사이 PD님은 20일간의 편집을, 촬영 감독님은 영하의 날씨가 예상되는 촬영지로, 교수님은 본업으로 돌아가셨다. 나를 제외한 셋에게 '본업'의 지옥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끝없는 후회와 자기 검열을 또다시 시작했다.


'분량이 잘 나오려나.'

'왜 더 준비를 못했을까.'

'왜 얼버무렸을까.'

'그때 왜 더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나 때문에 PD님 편집하느라 고생하시겠다.'

'내 능력 부족으로 시청률 망가지면 어떡하지.'


정글에서 자면, 이렇게 붓는다. 세수도 안한 민낯으로 나시 르막 먹는 장면.


괴롭고 외로웠다. 단 네 명이 겪은 모든 일들을 누구에게 쉽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도 현실로 돌아가야 했고, 날카로운 자기 검열을 중단치 못한다면, 내가 원래 해야 할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끊을 수 없었다. 며칠에 한 번씩 'PD님 괜찮으세요? 도와드릴 거 없어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가끔 '괜찮아요.', '여기 번역이 어떻게 되나요?'만 돌아왔다.


한 번도 만나 뵙지 못했던 작가님께도 연락이 왔다.


'주혁 씨, 바쁘시죠? 혹시 이 장면에서 섬세한 내러티브가 필요한데, 확인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뭐든지 궁금한 건 편히 물어보세요. 현장에 있었던 건 저니까요.'

새벽 늦은 시간까지 마지막 녹음을 함께 해준 박앤박 미디어의 고마운 사람들. 박소현 조연출님, 박기은 작가님, 방세영 PD님 그리고 나.


녹음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채 한국에 왔다. 예상보다 오래 걸리는 편집은 '역시 나 때문이려나' 싶어 재촉하기도 힘들었다. 묻기가 너무 미안해 작가님과 대화가 될 때 상황이 어떤지 여쭸지만, 'PD님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요, 정말 고생 중이세요. 그래도 우리 PD님 잘하실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라는 답장이 왔다.


말레이시아 간식거리를 좀 사 가지고 제작진을 찾았다. 행색에서 느껴지듯, 집에 며칠 동안 못 가셨다고 하셨다. 내레이션 후시 녹음에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왜 그 기간이 당최 십여 일이 넘는지 알 수 없었다.


"PD님, 왜 비행기표를 이렇게 길게 끊어주셨어요? 녹음이 그렇게 오래 걸려요?"

"편집 때문에 그래요. 볼게 많고 자막도 있고 번역도 해야 하고 사실 확인도 해야 하니까요."

"그럼 저는 어떻게 준비하면 되나요?"

"그냥 아프지만 마요. 추우니까 감기 조심하고요. 녹음한다는 날짜에만 맞춰서 와주시면 돼요."




한국에 총 15일을 머물렀다. 가끔 친구들도 만났다. 가족들과 좋은 시간도 보내고 꼭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서둘렀다. 옷을 서너 겹씩 입었다. 매일 아침 '주혁 씨, 춥죠? 옷 따뜻하게 입고 나가요.'라고 문자를 보내주는 PD님의 따스함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프로폴리스를 새로 사고, 마스크를 끼고 다녔다. 친구들과 만나면 으레 한잔씩 하는 술도 마시지 않았다. 탄산음료도, 주스도 먹지 않았다. 목이 끈적해지면 목소리가 좋게 들리지 않는다던 예전 라디오 진행자 선생님들의 조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에 와서도 매일 운동을 했다. 이제 내게 남은 능력을 끌어낼 방법은 기껏해야 '목소리'와 '감정' 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모자라다면 고생하는 제작진과 시청자들에게 민폐만 끼치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나를 압도했다.


'절대로 아프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혹시나 녹음이 있을지도 모르는 날의 앞뒤 3-4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친구들과 만나도 물만 마셨다. 건강에 좋을 음식만 찾아먹었다. 예전부터 만나려고 약속한 분들 중엔 방송인 분들도 많았는데, 천의 목소리를 가진 성우이자 개그우먼인 김미진 누나는

미진 누나가 선물해준 방한 패션 마스크. 정말 부드럽고 예쁘다. 큰 얼굴도 잘 가려준다.

"혁아, 나 만나는 거보다 네 녹음이 제일 중요해. 마스크 끼고 다니고, 목 관리 잘해라. 난리 난다."

바쁜 스케줄을 쪼개 나를 만나준 미진 누나는 촬영 중에 피부 상했을 거라며 화장품에, 목 관리하라고 방한용 마스크를 선물로 줬다. 역시 일도, 마음도 프로였다.


친하게 지내던 음악감독 누나는 본인이 감기 기운이 생긴 것 같다며 약속을 취소하셨다.

'나 지금 링거 맞으러 왔거든. 괜찮긴 한데, 너 아프면 녹음에 지장 있잖아. 너무 미안해. 근데 안 만나는 게 좋겠어.'


램삭 마을 바다포도 촬영 가기 전, 합을 맞춰보는 촬영 감독님과 나.


괴로웠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첫 녹음 날이 다가왔다. 저녁 늦게 스튜디오에 가 목소리 톤을 잡고 습관적으로 잘못하는 발음을 교정했다.


"목소리가 너무 낮아도, 높아도 안되고, 지금 하시는 라디오처럼 예쁘게 말하시면 안 돼요. 꾸밈없이, 가끔은 어눌해도 좋고,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을까 생각하면서, 목소리에서 신뢰감은 주되, 힘은 절대 빼지 마세요. 나중에 음악과 믹싱 하면 소리가 작아지니까 최대한 목에 힘을 주되 불편하지 않게 해 주세요. 파이팅 넘치게! 알죠?"


날짜도 외기 쉬운 11월 11일, 첫 방송이자 슈퍼라운드 야구 경기가 있었던 빼빼로데이를 앞둔 일주일 전 첫 녹음을 했다. 그 뒤로 일주일에 걸쳐, 세 번을 나누어 녹음했다. 평소 내보지 않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녹음을 하고 나니 녹음이 끝나고 나면 허기가 밀려오면서 혈압이 오른 것처럼 편두통이 왔다.


'내가 들어도 너무 어색한데, 과연 편안하게 들릴까?'

'혹시 과장되거나 넘치게 들리면 어쩌지?' 걱정했다.


"PD님, 이 정도 소리랑 톤은 제가 진짜 살면서 한 번도 안 내본 소린데요, 정말 몇 시간 동안 누구랑 싸운 기분이 들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들어보면 알아요. 믹싱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PD님을 철저히 믿었다. 우리는 이제 '신뢰' 이상의 그 어떤 추억을 나눠가진 사이였으니까.

털털하고 유연하고 섬세하고 남자다운, 사랑해마지 않는 대인배, 우리 PD님

11월 8일 금요일 - 예고편이 나왔다. 조연출 님이 수십일을 고민해 만든 영상이라고 했다. 너무 아름답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본방송에 나오지 않던 나의 장난스러운 모습까지 포착해 기가 막힌 예고를 만들어 주셨다. 너무 신기하고 멋져서 아마 100번도 넘게 돌려봤던 것 같다. YOUTUBE 조회수는 고작 1 올라갔겠지만.


11월 11일 월요일 - 가족과 함께 첫 방송을 지켜봤다. 부모님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고, 누나와 매형, 조카들은 잔뜩 신이 났다. 화면에서 당시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족들과 첫 방송을 보고 싶다고 하니, PD님은 급한 녹음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녹음 시간을 미뤄주셨다. 그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4편과 5편의 녹음을 끝냈다. 이날은 슈퍼라운드 야구 경기가 있었다.


11월 12일 화요일 - 친구 지은이, 진환이와 두 번째 방송을 지켜봤다. 뮤지션이자 아티스트다운 조언과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날도 슈퍼라운드 야구 경기가 있었다.


11월 13일 수요일 - 절친인 전 직장 동료 둘과 함께 고기를 먹으며 식당에서 스마트폰으로 본방을 지켜봤다. 조금은 부끄러웠고 감동적이었던 그 순간을 함께 해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녹음을 할 때 아기거북이가 나오는 장면에서 울컥했던 장면이 방송된 날이었고, 거북이를 따라 바다로 뛰어들어 촬영을 하던 감독님이 떠올라 또 한 번 울컥했다.


11월 14일 목요일 - 수능시험 날이었다. 말레이시아로 돌아와야 해서 본방을 볼 수 없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메신저를 확인했고, 100여 개의 톡이 와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다시 보기를 지켜봤다. 누군가는 화면 속 내가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어서 눈물이 났다던 뜨랑과 끄라비 편이었다.


11월 15일 금요일 - 또다시 슈퍼라운드 야구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이뽀와 스낀짠을 함께 해준 내 고마운 친구들이 나오던 날. 말레이시아에서 제일 친한 대표님의 집에 놀러 가 함께 밥을 먹으며 본방사수를 했다.



11월 16일,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이렇다할 흥분거리도 없었다. 모든 게 LIVE였던 순간이 흩어져 버렸으니, 곧 보통날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새벽 4시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가뜩이나 불면증이 있는 내가 마지막 방송이라고 잔뜩 흥분을 해버렸으니, 교감신경, 부교감신경이 고생한 날이다.


그렇게 걱정했던 악성 댓글도 없었고, 농담 삼아 얘기하던 '실시간 검색어'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뭐, 대단한 화제가 된 것 같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화면에서 내가 그렇게까지 못나 보이지 않았고, 그건 나를 위해 편집을 세 번이나 다시 했다는 PD님 덕분이었다. 우려했던 목소리도 배경 음악과 함께 그럴듯하게 들렸다. 시청자를 위해 처음 착용해본 안경도 어떨 땐 그럴싸하기도, 근사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사실 '별거 아니었네'하는 생각까지 들고, 공허함과 허탈함도 밀려왔다.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며 지나가야 하는 '깊은 우울의 동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장면을 잡아내는 프로페셔널, 정석호 감독님.


60일 전으로.


내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웬만한 장면에서 모자를 쓰고 싶다고 했다. 머리도 크고 얼굴도 크고, 키도 작고, 게다가 새까맣게 그을린 서른아홉의 내가, 과연 TV에 어떻게 비칠까 두려웠다. 숱도 적고, M자인 머리가 보이는 게 싫다고 했다. 배가 나와 보이지 않냐느니, 뚱뚱해 보이지 않냐느니, 방금 목소리가 너무 이상하지 않았는지 감독님께 물었다. 시청자가 공감하고 따라와야 하니, 너무 멍청해 보이는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냐며 PD님께 편집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현지인들에게 '행복하냐, 여기의 삶이 좋으냐'라고 묻는 게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지 않냐는 날카로운 반문도 했다. 방금 현지인과 함께 나눈 대화가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는지를 계속 물었다.


끄라비 바닷가에서 마지막 촬영 준비 중인 우리.


11월 11일 ~ 11월 15일로 다시.


혹시나 악성 댓글이라도 있을까 봐 세계테마기행 게시판을 수시로 들어갔다. 좋아요가 몇 개인지, 댓글이 몇 개나 달렸는지, 보도 자료에 댓글이 달리진 않았는지, 불편해하는 사람이 없었을지 다음날 본방을 기다리며 매일 괴로워했다. 시청률은 어땠는지, 나 때문에 방송이 망가지지 않았는지를 매일 PD님, 작가님께 물었다. 혹시나 안 좋은 얘기라도 들릴까 DAUM, NAVER에 내 이름을 계속 검색했다. 지상파 방송에 5일이나 나갔지만 매일 붙잡고 그렇게 열심히 했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에 별다른 변화도 없었다. 심지어 유튜브 구독자는 2명 줄었다.


11월 17일 일요일, 새벽 3시 8분.


정말 그러고 보니 사실 진짜 '별거 아니었네'하는 생각까지 들고, 공허함과 허탈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이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오롯이 감당하며 지나야 하는 '심연의 동굴'이다. 일요일 오후엔 다섯 편이 연속 재방송까지 된다. 주요 포털을 계속 보다 보니 세계테마기행 일요일 재방송 시청률이 더 잘 나온다는 기사도 있던데, 웬걸, 일본과의 야구 결승전까지 또 겹쳤다.



다시 11월 14일, 말레이시아로 오는 비행기 안.


본방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과연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 너무 궁금했다. 죽을 것만치 피곤했지만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애꿎은 메모장을 꺼내 이런저런 것들을 끄적였다. 와인을 한잔 마셔도 잠이 오질 않았다.


세테기 촬영 사진과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기억력도 좋지 않은 내게, 21일간 촬영했던 모든 순간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마니족 아이들은 보통 외부인과 말을 섞지 않는다. 오래 머무르고 놀아주고 나니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고 함께 '고마워, 사랑해'라고 말해준 어여쁜 아이들. 지금도 눈에 선하다.


태국의 마니족 아이들과 찍었던 셀프 동영상을 보다가, 아이들이 내게 '사랑해, 고마워'하는 장면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소리도 못 내고 계속 울었다. 그러다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휴지를 물고 오열을 했다.


거의 1시간을 울었다. 스튜어디스가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며 문을 두들겼다. 새빨개진 눈으로 밖으로 나가 코를 훌쩍거리며 멍하게 앉아 있었다. 오지 말레이반도 촬영에서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80일간 그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고, 나에게 상처를 줬다. 무서운데도 마냥 행복한 것처럼.


나의 출연 자격을 의심하며 나를 버리려고 했다. 촬영 기간 내내 끝없는 자기 검열로 자신감도 잃었다. TV 화면에 비칠 내 외모 걱정에 자존감까지 잃어버렸다. 쓰이지도 않은 악성 댓글을 걱정하며 나의 일상을 잃어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앞에 앉혀 두고 본방 후 댓글을 확인하느라 마음의 여유까지 잃어버렸다.



강박이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 못생기면 안 된다는 강박, 팍팍하고 무서운 세상에, 못나 보일 수 없다는 강박. 집착이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집착, 쌓은 것도 없는 내가 뭔가를 잃을 수 없다는 집착, 내려놓을 것도 없는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고 착각했던 집착이다. 지난번 출연자보다 잘해야 한다는 욕심, 다음 출연자보다 나았으면 좋겠다는 덧없는 소망. 나를 잃어버리기에 충분한 헛된 생각들.


마니족 아이들이 내게 '사랑해, 고마워'라고 말해준 셀프 동영상을 보다가 한없이 오열을 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과연 누군가에게 사랑해, 고마워 라는 말을 이렇게 들어도 되는 존재였던가.'



한국어를 이해할 수도 없는 아이들이 그저 따라 해 준 그 말들이 그렇게 고맙더라. 철저한 착각이었다. 어마어마한 자기 검열의 끝엔,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어버린, 본방송이 끝나 그 잘난 무대에서 내려와 버린,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주혁'이 있었다. 이제 나를 어떻게 더 사랑해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린 채로.


엄청난 착각이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출연자 선정에서부터, 촬영 전 준비 과정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응원을 받았다. 촬영 내내 이제는 정을 떼려야 뗄 수도 없는 고마운 제작진 전부에게, 배려와 감동, 친절과 애정을 느꼈다. 촬영 후에도 고생하지 않았느냐, 애썼다, 대견하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방송 후엔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댓글이 넘쳐났다. 오래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에게 '방송 잘 봤다, 너무 재미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건, 나뿐이었다. 애정과 격려, 응원과 배려가 충만했던 80여 일간,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고 나를 의심한 건 나였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 누구보다 나를 응원해주었고,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던 제작진은 부족하고 못난 나를 매력적이고 친절한 청년으로 탈바꿈시켜주었다. 촬영 기간 내내 나는 내 모습을 보기 싫어 '모니터링'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PD님은 '촬영 결과를 궁금해하지 않는 큐레이터는 주혁 씨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오늘 촬영분을 보고 내일 더 나은 모습으로 촬영하고 싶기에도 충분한 성향을 가진 내가 모니터링을 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는, 못난 내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게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PD님께 '화이트 밸런스 무시하고 예쁘게 보정 좀 해주세요'라고 했었는데, 그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쿠알라 룸푸르에서. 첫날이라 아직 입술도 멀쩡하다.


본방 둘째 날, 방송을 함께 지켜봐 준 친구 지은이가 그랬다.


'어머, 전혀 그럴 거라고 생각을 못했었는데, 너 정말 코르셋처럼 너를 옥죄고 있구나. 너 자신에 대한 기대를 너무 높게 잡고 너를 괴롭히고 있는 거 같아 혁아. 오히려 너를 부러워하고 재능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수 있는데, 그 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있잖아. 제작진까지 너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말이야. 행여나 네가 부족해도 열심히 했단 뜻이잖아.'



그랬다.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방송을 봐주시고 재미있었다고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예상치도 못한 '선플'들이 세계테마기행 게시판에 줄줄이 달렸다. SNS 계정에도 방송 재밌었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랬는데도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가.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나. 방송을 하자마자 유명세라도 탈거라고 기대를 한 거였나. 엄청난 뇌섹남처럼, 매력남처럼 비치길 바랐던가. 완벽한 사람도 아니면서 자그마한 흠결이라도 잡힐까 전전긍긍했던 거였나.



80일 동안 쉴 새 없던 자기 검열의 끝은 이랬다.


11월 17일 일요일 새벽 3시 49분.


나는 아직도 이 글을 끝맺지 못하고 있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노력했다고, 힘들었다고, 최선을 다했으니 예쁘게 봐달라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마음일까. 아마도 내가 썼던 글 중에 이게 가장 긴 글일 것이다. 21일간의 촬영 이야기는 풀지도 못한 채, 80일간의 '세테기' 동안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주저리주저리 풀고 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진실로,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큐레이터를 하게 된 순간 이전에도, 많은 사랑과 따뜻한 관심을 받았고, 진정 넘쳐나는 애정과 격려 속에 지난 80일을 보냈다. 촬영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진과 예고편 동영상에 쏟아지는 좋아요와 응원도 힘이 돼주었다. 방송 덕에 실로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들도 있었다. 수년, 심지어 1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귀한 인연도 있었다. 부족한 모습을 사랑해주던 셀 수 없이 많은 칭찬도 들었다.


내가 정작 잠시 잃었던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 나를 비난하고 헐뜯는 내 목소리에 잃어버린 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렇게 나를 옥죄던 80일간의 자기 검열 때문에, 나를 찢고 상처 냈던 감정들 때문에, '고마워, 사랑해'라는 원주민 아이들의 한마디에 그저 감사해서, 세상에서 버려졌던 사람처럼, 이제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구름 위에서 하염없이 오열을 했던 거다.




나는 이제 다른 꿈을 꿀 것이다. 꾸어도 헛되지 않은, 다시 도전하고 싶은 꿈들.


출간하기로 한 책을 쓸 것이다.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방송에 출연할 것이다.

세테기 출연을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꾸준히 언어 공부를 할 것이다. 말레이어든, 중국어든, 태국어든.

내게 감사하고 복된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당당히 잡을 수 있는 실력을 키울 것이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손 내밀어준 사람들에게 빚을 갚으며 살아갈 것이다.




오지 말레이반도 촬영, 내가 잠깐 잃어버렸던 것들로, 나는 결국 또다시 성장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철저히 잃는 과정에서 수없이 들었던 격려와 응원, 칭찬으로 나는 더욱 강인한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 인생의 그 어떤 '오지'에서도,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과오는 없을 것이다. 내가 EBS세계테마기행 출연을 통해 '우울의 계곡'을 80여 일간 지나온 뒤, 결국 잃어버린 건 단 하나 뿐이다.


나, 이주혁에 대한 의심.

굳이 타인의 인정과 격려를 받지 않아도 힘들지 않아야, 진짜로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는 게 낫다. 힘든데 괜찮을 순 없으니까.



https://youtu.be/EX6xFe7o4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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