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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Nov 25. 2019

타인의 불행을 위안으로 삼는 세상

공감이 절실한 시대에 대한 절망감

마음이 너무 무겁다. 주말에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무거운 몸을 잠깐 뉘인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처음으로 본 소식은 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 친구도, 가족도, 지인도 아닌 이가 또 애처롭게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보고 이렇게까지 마음 한편이 쿵 하고 가라앉는 걸 보면, 계절도 없는 나라에 살면서 뼈에 사무치는 추위가 돌아온 고국의 계절 탓인지, 누구 말마따나 호르몬 탓인지, 아니면 내가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삶에까지 너무 큰 무게를 두고 사는 건지 모를 일이다.


이제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도 가족이든 친지든 친구의 소식이든, '부고'라는 건 감당하기 힘든 도전 과제 같다. 고작 스무 살 정도까지였을까. 내 삶에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게 그토록 '환영'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하지만 외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친한 친구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면서 삶의 환영 같던 일들을 그림자가 있는 실체처럼 느낀 순간, 나는 때론 삶이 지옥과도 같을 수 있다는 걸, 앞으로 이런 일들을 더 많이 겪어내야 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예전엔 그랬다.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경험해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나도 이제 조금씩은 겪어 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젊은 날의 치기였을까. 그땐 겪어봐야 안다고 말해도 괜찮을 나이였음을 위안 삼았던 날들이었다.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으니까, 겪어낼 일들이 더 많으니까, 난 아직까지 몰라도 괜찮다고, 보이지 않는 어느 위태로운 벽 뒤에서 '아직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웬걸,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도 이제 겪을 만큼 겪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모든 경계가 모호하고 애매해졌다. 이젠 안다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고 할까. 겪어도 모르고 겪지 않아도 모르니, 이런 걸 대체 뭐라 해야 할지 말할 도리가 없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생긴 조그마한 자기 확신 - 이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만 - 이 있다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조심스러운 것은 '알고 있다, 알 수 있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단 거지만.


'알다'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다.

1. 교육이나 경험, 사고 행위를 통하여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2.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 3. 심리적 상태를 마음속으로 느끼거나 깨닫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 문장 뒤에 등장하는 '안다, 알다, 알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의미다. 나는 이것이 내가 소망하는 '공감'이라는 '앎'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이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맞다, 맞아'라는 '앎'으로 다가갔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앎의 결을 '측은지심'과 통하는 함의로 좁혀보고 싶다. 그래야만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토록 어려운 '맞다, 맞아'를 끌어내기에 조금이나마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세상이 너무 무서워졌다. 넘쳐나는 정보가 삶을 풍요롭게 해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 개방성 때문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소식들과 타인의 삶에 서슬 퍼런 칼을 마구 휘두르는 댓글들까지 너무 쉽게 보게 됐다. 가끔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안도한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때론 어떻게 이렇게까지 차갑고 잔인한 세상이 됐을까 처절한 감정에 휘둘린 때도 여럿이었다.


사람들은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차 보인다. 스스로에 대한 좌절감, 혹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대상에 대한 회의와 박탈감, 미움과 절망, 분노와 시기 질투를  해소할 구멍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거라곤 타인과의 비교, 타인에 대한 비난과 지적, 질책을 통한 스스로의 위안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게 짧게나마, 그리고 작게나마 잠시 동안 우월감과 도취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위안인 것이다.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그럼 그렇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거봐라, 내 말이 맞지.
내말에 좋아요 눌러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잖아.
내가 기레기라고 하니까 다들 공감하잖아.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너도 더러운 작자였지.

도취감에 끌려 '악플'이라는 도구를 선택한 사람들. 하찮고 보잘것 없지만 소소하고 확실한 위안이다. 삶에서 그것밖에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그들 또한 애처로운 존재다. 나름 작은 승리라고 여기며, 인정받았다고, 관심을 끌고 싶었다고 타인의 불행을 안주거리로, 농담으로, 험담으로 삼고 이 정도면 내가 더 잘 살고 있는 거 아니냐며 확신을 얻고 싶은 애처로운 마음.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할퀸다. 내 살갗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건 모른 채. 피 흘리는 상대를 보며 내가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상대가 처절하게 무너지고, 울고, 빌고, 제발이라고 통사정을 해야만 승리자가 된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이젠 놓아줘도 될 때가 생각하고 또 쉽게 위로를 얹는다. 애도하면 니깟게 애도한다고, 애도하지 않으면 니가 애도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섞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소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전율이 느껴진다.
언제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평소 절친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를 하나 빼먹었다고 욕설을 퍼부어댄다. 나는 #애도라고 #삼가고인의명복을빈다고 썼는데, 너는 친하다면서 그 말도 안 하니? 너는 냉혈한 아니니?라고 애꿎은 비난이 다음 사람에게 돌아간다. 이미 스러지고 없는 사람들의 지인들이 다시 도마에 오른다. 명복을 비는 게 의무도 아닌데 타인의 슬픔의 깊이까지 재단한다. 슬퍼해, 슬퍼하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보다 못난 사람이야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소중한 이를 잃은 이가 매일 식음을 전폐했다고 기사라도 떠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리맡을 적셨다고 셀피라도 올려야 '그럼 그렇지, 역시 친하다더니 이제서야 마음을 표현하는구나, 그래 마음에 들어'라고 재단하고, 아직까지 '애도 체크아웃'을 하지 않은 사람을 또 다시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허기를 참지 못한 하이에나들처럼 또다시 물어뜯을 상대를 찾는다. 이빨이 간질거려 못 참겠는 짐승들처럼.


구하라 동영상이 실검 순위로 올라온다. '도대체 그 동영상이 어땠길래 그런 거야'를 궁금해한다손 치자. 도대체 어땠길래가 대체 왜 알고 싶은 건가. 알고 싶지 않으면 안될까. 그리고 동시에 구하라 동영상이 실검 순위로 올라왔다는 기사를 쓴 기자들을 '쓰레기'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런 기사에 이윽고 '한남충'이 올라온다. '한남충'의 댓글에 '여혐'이 올라오고 '페미니스트'와 '소수자'가 등장하고, 다시 정치로, 연예로, 스포츠로, TV로, 분노와 비난이 홍수처럼 이어진다.


'너도 궁금하지 않았느냐', '너도 찾아보지 않았느냐'를 5천만 국민을 대상으로 까지 않은 이상, 대체 누가 궁금해했고 누가 궁금해하지 않았을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걸 까야할까. 그냥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으면 안될까. 타인의 불행과 수치스러움을 제발 흘려보내고 다들 본인의 삶에만 집중하고 살 수는 없을까.




살다 보면 내 인생 하나가 버겁다. 너무 버거워서 나만 이런 건지 궁금해진다. 가끔 너무 버거워서 검색을 해보고 연관 검색어를 찾아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얻고 나서야 안도를 한다. '아 나만 이런 건 아니었구나. 다행이야.'


그들도 무척이나 버거웠을 것이다. 나는 '안다.' 내가 너무 모르는 게 많아서 이제 뭔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도 너무나 무섭고 조심스러운 세상이지만 나는 알 것만 같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얼마나 비참했을까.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개며 무거운 생각을 하다가 바싹 마른 수건을 꾹 하고 힘주어 누른다. 공기조차 통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숨통을 끊고 싶었을까.


그게 나였다면.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설리의 죽음, 사실 나에겐 구하라의 죽음보다 설리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왔었다. 내가 설리를 아끼고 사랑했던 마음 때문에 그랬던 거라면, 맞다, 관심을 주어도 되는 대상으로서 나는, 설리가 구하라보다는 좋았다.


설리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 들은 날, 나는 태국의 어느 바닷가에서 한창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의 친구도, 나의 친척도, 지인도 아닌 그녀가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마음이 아팠다. 온몸이 축 쳐지는 기분이 들고, 세상이 왜 이럴까...라는 생각도 했다. 다시 나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촬영을 다 마치고 나서야, 갑자기 또 설리 생각이 났다. 그날 나는 한밤중에 '아, 어떡해 설리...'라고 혼자 몇 번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알았다. 나에게만 집중하는 순간엔, 그렇게 슬펐던 설리의 죽음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는 걸.




그렇다. 설리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말을 섞어본 적도 없고, 나와 가깝지도,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그저 노출되는 기사를 통해, 사람들의 입방아를 통해 안다고 여겼던 사람. 수년간이나 TV에서 봐왔던 것 때문에 그녀를 조금이나마 '안다'라고 내가 착각했던 대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리의 죽음은 며칠이나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설리였다면,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설리의 마지막 나날들을 상상하려는, 오만한 생각이 드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무척이나 죄스러웠다. 당최 노브라가 어쨌건, 그녀의 사생활이 어쨌건 나는 그녀를 비난할 자격도, 조언이랍시고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도 그랬다.


그저 나와 같은 인간으로,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쿵쾅대는 심장 하나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버겁게 버티던 사람. 그 사람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애통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오지랖이냐 싶으면서도 그랬다. 결국 설리도, 나도, 때론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기도 하고, 흔들거리는 밧줄 위에 선 것처럼 나약하고 위태로울 수 있는 똑같은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 더 큰 애정과 관심을 가졌던 설리보다, 구하라는 더욱 내게 먼 존재였다. 그녀가 반짝였을 때도 나는 그녀를 그다지 열렬하게 응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위태로울 때에도 그녀를 굳이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내가 조언이랍시고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아주 아주 먼 사람이었다. 대화나 조언을 하며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애초부터 아닌 우리였으니까.


그녀의 사생활과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고 그녀를 향한 대중의 관심이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가 이유가 그 무엇이든 간에 그녀가 삶을 정리하는 데 세상의 비난과 화살이 '1'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다. 그녀에 대한 관심과 조롱섞인 댓글과 비난에, 쓰레기 같던 기사들에, 조회수 하나를 더했기 때문이다. 그 조회수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녀의 목을 조르는데 손을 얹은 죄인이 된 것만 같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위태로운 존재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위태로운 존재들이라면 그 어느 순간에, 그 어떤 자리에서, 또 어느 누군가가 나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고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도 역시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단연코, 절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나를 '잘 안다'라고 생각하는 부모님, 친구들, 직장 동료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때론 식겁을 하며 도망치려는 존재들이면서 동시에, 전혀 알 수 없는 타인에게 '이래라저래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중성을 가진 인간들이다. 그렇게 위태롭다, 우리 모두가.


만약 내가 내일 당장이라도 무언가 비난받을 일로 실검 순위에라도 오른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럴 거면 그래라'하며 뒷짐 지고 있을 강심장이 못 되는 사람이다 나는. 운이 좋아, 배포가 좋아 그럴 강심장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세계테마기행 촬영을 마치고, 단 5일간의 본방송이 끝난 지금까지도, 혹시나 악플이라도 달렸을까봐 내 이름을 검색해 보는 한심하고 나약한 작태를 그만둘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주변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세상 사람 그 누구도 나를 모르는, 나도 이렇다. 가끔 외롭고 힘들었다. 내 브런치의 글이, 인스타그램속 내 사진이, 내 페이스북의 언행이, 내 TV속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두렵고 무서웠다. 무슨 대단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 기억도 못하는 무언가가, 혹은 기억하지만 잊고 싶은 무언가가, 그도 아니면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는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 그래도 그렇다. 우습지 않나. 그런 나도 이렇다는 게. 내가 봐도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런데 설리다. 구하라다. 대한민국을 너머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안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존재들. 하지만 어딘가 나약한 구석이 있어도 될 불완전한 인간들. 나처럼, 너처럼, 우리 모두처럼. 이들을 향해 쏟아졌던 화살과 칼부림은 얼마나 이들을 힘들게 했을까. 불행해진 그녀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위안' 삼았을까. 비난의 반대급부로 얻어진 수천, 수만, 수십만의 위안이 모여 그녀들을 향한 칼부림을 멈추지 않는 동안, 나약하고 위태로울 수 있는 한 인간에게는 버겁기만한 하루가 얼마나 끝도 없는 지옥 같았을까.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껌처럼 씹다 버릴 존재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보듬어줘도 모자랄 한기가 느껴진다. 그 어디에서도 따뜻함을 찾을 수 없다. #애도라는 해시태그를 봐도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라는 해시태그를 봐도 가슴이 쉽게 따뜻해지질 않는다. 해시태그의 본질이 '검색'과 '노출'이라면, 애도라는 지극히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노출해야 하는 세상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먼저 애도했다'는 걸로 위안을 삼는 게 또 다른 형태의 위안이 될 수 있는 건가. #구하라애도 라는 해시태그가 100만 개 정도는 쌓여야 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진 건지 아닌지, 이제 나는 정말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타인을 소비하며 산다.




어쩌면 세상이 흐르는 강물 같다. 어디서 바위에 철썩 거리며 부딪히고, 어디서 끊길지 모르겠다. 어디서 갈라졌다가 어디서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 어느 때 불어났다가 어느 때 바짝 말라버릴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런 물 위에 종이로 접어 막 띄운 조각배 같다.


얇디얇은 종이로 어설피 접은 조각배를 띄워 흘려보내는 심정은 편치 않다. 뒤뚱거리며, 흔들거리며, 흐르고 흐르다 언젠가 스러질 것을 알기에, 가라앉을 것을 알기에 그렇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누구나 그렇게 언젠가는 스러진다. 언젠가는. 다들 그렇게 부유하며 산다. 갈 곳도 모르고 영문도 모른 채. 나에겐 덮치지 않았으면 하는 갈 곳 잃은 물살을, 내가 아닌 남에게 밀어내느라 기를 쓰고 산다. 그렇게 애쓰면서 '먼저 가라앉진 않았다'라고 안도하는 모두가, 나는 무척이나 안쓰럽다.


그저 멀리, 조심히 떠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면 어떨까. 가는 길에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를 놓고, 물을 끼얹을 거까지야 굳이 해야 하겠나. 어차피 너 한번, 나 한 번만 물을 끼얹어도 순식간에 흠뻑 젖어 가라앉아 버릴 불완전한 존재이거늘. 언젠가 가라앉을 걸 안다면 더 넓은 세상, 더 좋은 세상 오래오래 지켜보며 둥실둥실 떠갈 수 있도록 그냥 그대로 놓아주면 안 될까. 굳이 물살을 끼얹지 않아도 위태로운 조각배들을, 주어진 거리만큼, 주어진 삶만큼 끝까지 잘 가라고, 힘내라고 해주면 안 될까.




자신의 불행을 해소할 길이 없어 타인의 불행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삶은 처연하다. 그렇게 해야만 잠시라도 안도할 수 있는 마음으론 평안을 찾을 수 없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내 삶을 들여다보는 일만 하더라도 인생은 그렇게 버거울 수가 없다. 그 버거움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삶은, 인생은, 그래서 찬란한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강물 위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언제 비가 올지, 언제 폭포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고 그렇게 산다. 그 비가 나에게 쏟아질지 모르고, 당장은 남에게 쏟아지는 걸 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렇게. 내 인생은 찬란하길 바라기 그지없으면서도 왜 타인의 인생에 난도질을 함으로 잠시나마 위안을 삼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  


종국엔 역경을 이겨내고 찬란하게 빛을 보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거나 동기부여를 갖게 되는 것이 건강한 삶의 방식이라면, 우리네 삶은 지금 지독히도 아프다. 아픔이 기쁨보다 먼저 '검색어'에 오르는 세상은 독으로 가득하다. 어떻게 치유해야 할 바를 모르겠어서 무척이나 두렵고 힘들다. 내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고작 '작가'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두서없이, 비루한 글이라도 쓴다. 그게 나의 위안이라면, 그렇다. 나 역시 그녀들을 위해 해줄 것도 없는, 뒤뚱거리는 조각배에 불과하다.




구하라의 죽음으로 나의 오늘 하루는 절망으로 마감됐다. 공감이 절실한 시대에 대한 위태로운 절망감이다. 누군가의 딸이자 그 누구의 친구이자, 때론 누군가의 위로였다.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전해주고 떠난, 위태로운 조각배였던 그녀에게, 이제와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그녀의 삶이 마감되고 난 뒤의 해시태그라면, 뒤늦은 애도보다 앞선 공감과 응원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런 격려와 응원이 누구에게나 절실하고 절실한 세상에, 우리 모두가 위태롭게 살고 있다는 걸, 나는 정말 알 것만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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