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태국 끄라비의 낯선 옷가게에서 득템했다고 느꼈던 옷을 호텔에 와서 입어보자마자 난감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덩치가 있는 내 몸에 맞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분명 M사이즈 두 개를 샀는데도 불구하고 더 마음에 드는 옷이 더 작았다. 입고 나가 돌아다녔다가는 '변태'아닌가 싶을 정도로 딱 맞는 사이즈. 게다가 더욱 난감했던 건, 내가 성격이 급하다 보니 옷을 입기 전에 태그를 다 떼어버리는 습관이 있는데, 포장을 뜯다가 이미 티셔츠 하나의 가격표가 떨어져 버린 것.
'아, 이걸 바꾸어 줄까? 어차피 저렴한 티셔츠니 누구 선물을 주고 나는 새 옷을 살까. 살을 빼서 입을까.'
이 중에 현실적인 대안은 '바꾼다'밖에 없었다. 선물을 주고 똑같은 옷을 사자니, 아무리 저렴한 옷이었던들 지갑 사정이 아쉬웠다. 살을 빼서 입어보자는 의지는 지금까지 대략 20년 동안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현실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5초 만에 머릿속에서 삭제.
다음 날 아침, 브런치를 먹고 옷가게에 들러 사정을 설명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제가 어제 이거 샀던 거 기억나세요? 그런데 제가 호텔에 가져가 입어보니 사이즈가 좀 너무 꽉 끼는 거 같아서요. 혹시 입지 않았는데 사이즈를 바꿀 수 있을까요?'
문제는 영어였다. 점원이 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 태국은 보통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거니와, 간편 응대와 심부름을 할 것만 같은 무슬림 직원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해서 간략하게 느낌은 온 것 같았지만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 왜 어제 매장에서 입어보지 않았는지를 내게 설명할 수 없어 보였다. 당황한 얼굴도 잠시. 두 손으로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2-3분 후에 처음 보는 직원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어, 혹시 이거.. 어제 살 때 매장에서 왜 안 입어보셨나요?"
"아 그게요, 제가 어제 바닷가에 다녀와서 몸이 좀 더러웠기도 했고, 혹시 사지 않을 건데 그런 상태에서 옷을 입어보면 안 될 거 같았고요, 제가 말레이시아에서 H&M이나 ZARA, TOP MAN 같은 곳에서 보통 옷을 안 입어보고 그냥 M 사이즈를 사거든요. L사이즈는 항상 좀 커서요. 그래서 눈대중으로 보고 맞지 않을까... 했어요. 안 입어보고 산건 제 잘못이에요."
그랬더니 잠깐 골똘히 생각하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내게 이렇게 말한다.
"이 친구는 영어를 잘 못해서 제가 대신 설명드린 건데요, 여기 사장님께 한번 여쭤봐야 할 것 같대요. 잠깐 전화를 좀 해볼게요."
이어지는 태국어 통화. 내용은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쟈이(크다)', '챠이(맞다)', '다이(네)'가 계속 이어지는 걸 보니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음, 사장님이 그러시는데요, 어제 안 입어보고 사신 건 잘못하신 거지만, 그래도 옷이 너무 작다고 하시니까 바꾸어 드리겠다고 하시네요. 그런데 어제 사셨다는 옷은 어디에 있으신 거죠?"
그렇다. 나는 '옷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옷을 호텔에 두고 나왔다. 바꾸지 못한단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 '그냥 새로 사버리자'의 대안을 들고나갔던 것. 그도 그럴 것이 나라면, 가격표를 새로 달아야 하고, 전산 시스템의 취소, 승인, 바코드 정리를 다시 해야 하고, 손님이 직접 입어보지도 않고 잘못 샀다고 말하는 옷을 바꾸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안 입었다고 하지만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 안 입었을지 알게 무언가. 살짝 뭐라도 튀어 있으면 되팔기도 힘든 게 옷인데.
"아, 그게 제가 지금 요가 수업을 받고 오는 길이라서 옷을 들고 나오지 않았거든요? 호텔이 500미터 근방에 있어요. 혹시 지금 가서 가져오면 될까요?"
"네, 천천히 가져오셔도 돼요."
"아니에요. 10분 안에 가지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호텔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길,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근데 저 직원은 누구지?' 원래 직원은 영어도 잘 못하는데 그걸 또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서 사장님께 설명해 달라고 한 건가? 못 바꿔 주겠다고 대충 얘기하면 될 것을 난감한 상황에서도 노력해 준 건가? 사장에게 그런 걸 전화해서 승인받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순간 옷가게로 다시 가는 길에 뭐라도 사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가 다 되어가는데 밥은 먹고 일하는 걸까. 밥을 이미 먹었다면 음료수라도 하나 사갈까. 주스를 살까, 커피를 살까. 취향에 안 맞는 걸 사줬다가 먹기도 곤란하면 사주는 게 의미도 없지 않을까. 그럼 팁이라고 얘기하고 팁을 줄까. 굳이 수고스러움을 뒤로하고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어준 두 사람에게 뭐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컵 쿤 캅" 말고는 할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지갑을 열어, 내가 마지막 날 쓰려고 했던 마지막 현금 200 바트를 꺼내고 쇼핑백에 넣었다.
'뭐든 간에 그들이 오늘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자. 밥이든 음료든, 교통비가 됐든.'
그리고 가게로 돌아갔다. 어디서 연락을 받았는지 옷가게 사장님이 돌아와 있었고, 영어를 잘 못하는 직원이 사장님 옆에 서 있었다. 내가 가게로 들어서자 그 직원은 '아까 사장님께 전화를 해야만 했던 그 손님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고, 사장님은 조금 어눌하지만 더듬거리는 영어로 설명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제 몇 시쯤 사신 건지 확인을 하고 전산에서 그걸 취소한 다음 새로운 사이즈가 판매되었다고 정리를 좀 해야 하거든요."
10분쯤 흘렀을까. 어색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는, 바코드를 여러 번 찍고, 사이즈를 확인해 수기로 입력하고, 옷을 꺼내어 다시 포장하고, 새로운 옷을 꺼내는 과정을 마무리했다.
"여깄습니다. 손님."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어제 꼭 입어보고 살걸 그랬어요. 귀찮은 일인데 선뜻 바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꼭 말해주세요. 그리고 여기.."
100바트를 꺼냈다. 큰돈도 아니겠지만, 작은 돈도 아닌. 태국에서 한 끼 식사 정도는 괜찮게 먹을 수 있는 금액. 영어를 잘 못하는 직원은 굉장히 놀란 눈치였고,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며 내게 감사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제가 감사할 일이에요. 안 그랬으면 이 멋진 티셔츠를 영원히 못 입을 뻔했어요. 컵 쿤 카압~. 아 그리고 아까 전화하고 설명을 도와준 그분은 어딨죠? 여기 직원이 아니죠?"
맞단다. 옆 기념품 가게 직원인데, 영어를 좀 할 줄 알아서 도와주러 온 거라고.
"알겠어요. 그분께도 드릴 거니까 걱정 마시고,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바로 옆 가게로 가, 내게 도움을 줬던 직원을 찾았고,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진 얼굴로 저 남자가 왜 지금 자기를 찾고 있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거절할까 봐 두려워 얼른 100바트를 손에 접어 건네고, 아까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덕분에 옷을 잘 바꿀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고, 나는 역시나 분에 넘치는 감사 인사를 또 받을 수 있었다. 너무 큰돈이라며 가져가시라고, 안 주셔도 된다고 하면서 쫓아 나오려는 그녀를 뒤로 하고 "고마워요~!"라고 크게 소리친 후 호텔로 숨어 들어왔다.
이내 침대에 누워 한두 시간쯤, 그 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내가 예상한 게 맞다면 늦은 점심이라도 사 먹었을까, 디저트라도 먹고 있을까 이런저런 소소한 내 마음대로의 상상을 하며 달콤한 낮잠을 두어 시간 잤다.
생각해보면 하루라는 시간이 참 별게 없더라. 자려고 누우면 '오늘 내가 뭘 했더라'라고 생각하는 날들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다 보면 크게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 없었다. 인생은 원래 그랬다. '물 흐르듯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시간은 잘만 흘러갔지만, '고인 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게 나에겐 언제나 변화가 없었다.
일어나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빨래도 하고, 택시를 타고, 누군가를 만났다가, 지하철을 타고, 다시 돌아와 씻고, 눕는 그저 그런 하루.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기대하다가도,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로 마음의 일기를 적게 되는 그저 그런 하루들.
그런 그저 그런 하루를 뭔가 조금이나마 특별하게 만들려면 특별함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특별함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게 됐다.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 때마다 그 이유가 뭔지를 고민하다 보니 그럼 나부터 팍팍하지 않은 삶을 살아보자고 다짐하게 된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하루에 한 번쯤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무작정 친절하기'를 실천해보자고 생각했다.
아기를 안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아이까지 한 손에 끼고 걸어가는 엄마를 슬며시 지나쳐 쇼핑몰 문을 열어주어 봤다. 비 오는 날 음식을 배달하는 배달부에게 원래 지급되는 배달비 외에 5링깃을 더 쥐어주어 봤다. 뚝뚝을 타고 가면서 요즘 장사가 안된다고 너무 더운데 손님 기다리기 힘들다고 너스레를 떠는 아저씨에게 원래 줘야 할 100바트도 이미 높은 가격이란 걸 알았지만, 눈 한번 딱 감고 20밧을 더 얹어 주어 봤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고, 그 친구가 떠나가야 할 목적지의 맛집 링크를 몇 개 보내줘 봤다. 호텔 체크아웃 시간에 늑장을 부리고 있는 손님들에게 수도 없이 전화를 하면서 인상을 쓰고 있는 직원에게 환하게 웃어주고 "와, 너무 무서워서 나도 내일은 빨리 나와야겠다. 새벽 5시쯤 체크아웃하면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텐가?"라고 농을 건넸더니 까르르하고 웃더라. 끄라비를 떠나는지라 내게 더 이상 필요 없을 해변용 돗자리를, 이제 막 배를 타고 섬 투어에 나가는 모르는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5일간 호텔에서 내 침대를 정돈해 주고 모래가 사각거리는 바닥을 정리해준 청소부에게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주어 고맙다'라고 쪽지를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달 전 제주도 출장에서 태풍 타파 때문에 표를 구할 수 없어 막막해했던 내게 늦은 시간 추가 전화까지 해주면서 대기 예약을 통해 극적으로 표를 구해주었던 항공사 상담직원을 칭찬하는 글도 시간을 내어 정성껏 올렸다.
이게 내가 지난 7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해봤던 친절함 베풀기의 소박한 리스트다.
지나고 보면 내가 베풀었던 친절함은 '무작정', '무조건'도 아니었다. 언젠가 내가 땀을 뻘뻘 흘리고 물건을 들고 아파트 키를 입에 물고는 출입문을 열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을 때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어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미팅을 하러 밖을 돌아다니다가 이런 날씨에 밖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허풍인 것도 알고, 더 남기려는 것도 잘 알고, 관광객 누구에게나 '오늘은 손님이 없다'라고 말할 아저씨인 걸 알면서도, 그 아저씨가 징징거리다가 씩 웃어주는 그 미소가 참 순박해 보여 보기 좋은 날이었다. 눈이 찡그려질 만큼 햇살이 좋던 날. 내게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거수경례를 해주는 경비 아저씨가 고마워서 장을 보고 돌아오면서 때론 500ml 생수 한 병을 '더운데 드시라'고 건네주곤 했었다. 500원도 안 되는 물 한 병에 얼마나 고마워하시던지.
그랬다. 메아리처럼 돌고 돌아오는 친절에 나는 뒤늦게 화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받아왔던 친절을 잊고 삶이 팍팍하다고 불평하고 지내온 날들을 꾸역꾸역 넘기면서, 남들에게는 없을 특별함이 찾아오기를, 목구멍으로 삼켜 버리기에 버거운 날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게 문을 열어주고 지나간 그녀 혹은 그와 나는 어쩌면 영영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녀와 그에게서 '언젠가 당신처럼 내 다음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겠노라'라고 쓰인 '무언의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나는 그렇게 한없이 쌓아뒀던 손수건을, 이제야 하나하나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설령 그 손수건이 내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까닭 없는 슬픔도 있다면, 까닭 없는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다. 어김없이 숨을 헐떡 거리며 대롱대롱거렸던 하루였을지언정 위를 올려다보면 '희망'이라는 글씨가 작게 쓰여 있다는 것 때문에 웃고 싶다.
나는 조금 더 특별해지고 싶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설령 그 특별함이 60분 정도의 삶을 매끄럽게 만들어 준다면 그걸로 됐다. 10분이라도 됐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의미 있었고, 내일 하루도 의미 있을 거라는 까닭 없는 희망에 목을 매고 싶다. 언젠가 내가 돌렸던 작은 손수건이 내게 단 하나라도 돌아온다면 뛸 듯이, 날듯이 기쁠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수건의 한쪽 구석엔 '고맙다'라는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을 것만 같다. 그 희망에 오늘도 목을 매고 싶다. 그래서 내일도 조금은 특별하지 더 않았냐며 작은 소란을 떨며 살고 싶다.
우리.... 그냥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친절할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