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빠,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안돼?

미안해, 그럴 수는 없어.

by 타인의 청춘

[ 프롤로그 ]

11행시처럼 인생이야기를 풀어낸 매거진의 딱 절반에 도달했다. 그간 공황장애, 일에 저당잡히지 않기, 일명 '도망가기 3부작' 등, 일, 사람, 인간관계와 같은 인생에세이를 썼었지만, 이번 5, 즉 "오"빠편은 다름아닌 연애와 소통을 지극히 남성 시점으로 풀어내는 글이기 때문에, 실로 다양한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다만, 누구에게나 있었을 법한 '연애시절', 남성이 자주 느끼는 황망함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는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남자의 마음에 대해 '절절'하게 풀어보도록 노력하겠다. 결국 이것 역시, 또 '사람'과 ‘소통’ 이야기다.


***

"오빠,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안돼?"


숱하게 연애하던(?)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혹시 남자가 모르는 비밀스런 연애지침서에라도 나오는 핵심 펀치라인일까. 이 말을 들으면 왠지 진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되게 못나고 못되게 구는 사람인듯 싶고, 나도 미안하긴 한데, '그냥'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이유가 뭔지 어리둥절해지면서도, 어차피 '미안한 이유'가 뭔지 또 되물을 거고, '잘못했다' 얘기하면 '뭘 잘못했는지' 또 물을거고, 그게 '진심으로 미안한거 맞냐'라고 물을 거면서 대체 '왜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모든게 해결된다는 건지, 남자의 머리로는 절대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의 카오스 빅뱅 대폭발'이 오고야 만다. 그야말로 '멘붕'이다. 오죽하면 이런 주제가 개그 코너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소재가 될까.


대체 무얼까? '그냥' 미안하다는 것은..


'미안'이란 감정은 "남에게 대하여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운 느낌"이라고 한다. 그렇지. 사람이 모름지기 잘못을 하면 상대방에게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일테다. 예를 들어, 지난 겨울처럼 추운 날 약속에 늦어 여자친구를 밖에서 오래도록 기다리게 했다거나, 서로에게 의미가 있을만한 날-그 숱한 기념일-을 잊었거나, 실언을 해서 여자친구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게 했다던가, 여자친구의 중요한 이벤트를 회식이다 친구와 술자리다 뭐다 하며 건너뛰어 버렸다거나...... 뭐.. 너무 많아서 예는 이걸로 마치겠다.


그런데 이런 잘못을 했을 때 '정상인 사람'이라면 정말 미안함을 느낀다. 그야말로 '미안', 즉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들기 마련인지라, 오히려 눈치를 보게되고 언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전전긍긍하게 된단 말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 누구에게나 "미안해"라는 말은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물론 남녀 모두에게 불문율이다.

하지만 말이다......


허나, 그런 '정말 미안함'을 명확하게 느끼는 순간을 제외하고, 지금도 사실 잘 알 수 없는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화가 나잖아'라는 말이나, '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 지금 기분이 언짢다'라는 말이나, '몰라 속상해' 혹은 '나 지금 오빠 땜에 되게 짜증나' 같은 말들을 들으면, 세상 그 누구도 철저히 '상대방'의 입장에 설순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을 완벽하게 알아주기가 무척 힘들다. 그릇이 작다고 말하면 할말이 없겠지만, 그래, 그렇게 '깊어서' 혹은 '진짜로 진짜로 모르겠기에' 차마 헤아리지 못하는 그 마음을 당장 풀어주기 위해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라'는 건, 남자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방통행'이다. 차라리 '내가 이러이러해서 지금 기분이 별론데, 오빠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았으면 좋겠어'라고 하면 마음이라도 한번 더 다잡고 최선을 다해볼텐데.


진짜 문제는......

남자는 그런거 잘 모른다. 말해줘도 잘 모를때도 있다. 나만 그런가? 내가 그 마음을 다 알았더라면 이제까지 숱하게 이별하고 또 누군가를 만나고 또 그 지난한 과정을 반복하고 또 헤어지고...... 그러진 않았겠지....... 물론 남녀의 사고방식, 대화법이 달라서 그렇겠지만, 나름 슈퍼 예민한 촉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도 그런데, 나보다 덜 예민한 사람들은? 확신하건데 더 잘 모를거다. 사실 얘기를 해줘도 그게 그 말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는 거다. 왜냐면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내뱉는 말에 가끔 묘한 '쉴드', 즉 '방패'같은게 있어서, 뭔가 보일듯 말듯 하면서도 핵심으로 곧장 뚫고 들어가기 힘든 묘한 '장막'이 깔리기 때문이다. 물어볼수가 없으니.


"여자가 그런 말을 꼭 해야해?"(주의: 이것도 무슨 말인지 모를 수 있다)

"내 입으로 꼭 그래야겠어?"(주의: 이것도 마찬가지)

"자존심 상하게 내가 꼭 그런 말까지 해야겠냐고오오오오오오오?" (주의: 심각하다)


차라리 말을 해주면 좋을텐데......

정말 말이라도 제대로 해주면 '아!'라고 무릎을 탁 치고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일발장전할 기회라도 만들어 볼텐데, '지금 내가 말이야, 아주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데 어디 한번 이유를 알아맞혀보시지'라는 으름장을 놓아 버리면 남자는 패닉에 빠지고 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해줘도 모르는데 말을 안하는 걸 어떻게 알아. 독심술 특강이라도 들어야 하나. 우리 둘의 연애를 갑자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대응해야 하나.


그런데, 모르는게 그렇게 잘못인가?

"표현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여자친구들이 많았다. 물론이다. 이해한다. 왜냐하면, 너도 나에게 표현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기 때문이다. 네가 바랐던 표현의 수준과 기대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릴 능력이 한없이 부족했겠지만, 나에게 표현이란 건 '사랑해', '보고싶어', '밥 먹었어?', '잘자'가 아니라, 정말 알고 싶지만 알기 힘들었던 '네 속마음'의 뜻풀이였는데.


너를 미치도록 알고 싶었고, 왜 힘든지, 왜 슬픈지, 왜 우는지, 그게 그렇게 알고 싶었는데, 그걸 헤아리지 못했던 게 내 잘못이라면, 그저 나는 너에게 영원히 부족한 사람일 뿐이다. 미안하다. 허나 나는 헤아리지 못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네가 아니기에,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었던 너의 마음을 다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자격지심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거기에 가끔 따라붙는 '오빠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진심으로 헤아려 보려고 노력해 봤어?'라는 말은, 늘 너무 가혹하다. 사랑하는데, 누군들 노력하고 싶지 않겠나.

남자에겐 어찌 그리 수많은 당위들이 넘쳐날까.

'남자들이 죽었다 깨나도 모르는 여자의 7가지 심리상태', '알아두면 여친에게 사랑받을 10가지 대화법', '여친에게 욕먹지 않는 여행지 사진 찍어 주기', '남자는 절대 모르는 여자의 어쩌구', '여자가 절대 듣고싶지 않은 남자의 저쩌구', 이런 콘텐츠가 SNS에 넘쳐나는 걸 보면, 가끔 한숨이 나올때가 있다.


거기에 'LIKE'나 '헕(Heart)'과 함께, 자신의 남자친구를 공개적으로 '태그'해서 '오빠, 알겠지?', '우리 자기, 이제 내 맘 알겠어요?', '다음에 여행가면 사진 이렇게 찍으란 말이야', '잘 보고 배워' 뭐 이런 댓글이 수백, 수천개 달리는 걸 보면, 남자들이 좀 처량하고 불쌍하단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가끔 남자들이 또 '알았어요, 내가 더 노력할게요'라고 다는 댓글을 보면, 과연 진심인지 의문도 든다. ‘지독한 노력형 연애’가 아닐까 싶은. 한편 '우리 자기야는 이런거 다 알아서 참 좋아'라는 태그는, 진심으로 자랑하려는 심산인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남자친구에게 너무나도 쌓인게 많고 서운해서, '와! 내 얘기다!'라고 쌍수를 들어 반기며 순간 속시원해진 느낌이 들진 모르겠지만, 남자가 원하는 건, 그 얘길 그냥 직접해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게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데 백번, 천번 도움도 될뿐더러, 멀쩡한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라면 그런걸 솔직하고 용기있게 말해주는 여자의 진심과 용기에 탄복이라도 해서 정말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그런 콘텐츠가 뜰때마다 남자친구를 태그해서 '배워라', '잘해라', '고쳐라', '으이그' 뭐 그런거 할거면, 그냥 일찌감치 헤어졌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잔소리할게 구구절절 많은 남자친구는, 앞으로 계속 사귄들 좋을게 없기 때문이다. 옛말에 "사람 고쳐쓰는" 거 아니라고 그랬다. 이런 말을 가져다 붙이면 마치 구식인 듯하지만, 옛말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돌고 도는 이유는, 진짜 알짜배기 '진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쏟아져나오는 "여자친구에게 사랑받는 **법", "이것만 알면 여자친구 눈에 하트 뿅뿅"

알겠다. 오께이이.....뭐 말도 안되는 내용들이지만 알겠다 치자. 그런데 왜 대체 제목만 봐도 '사랑하는 상대방'을 한순간에 못나게 만들어버리는 콘텐츠에 그렇게 환호하나. 그리고 - 이 콘텐츠는 진짜 예시까지 질리도록 봐서 그런데, 흥.- 세상에 사진 못 찍는 사람 정말 많다. 그리고 원래 사진작가도 아닌 남자친구가 당신을 매번 모델처럼 찍어 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은 제각기 다른 센스와 장점을 가졌다. '나를 사랑한다면 마땅히 예쁘게 사진을 찍어줄 줄 알아야해! 나를 예쁘게 본다면 사진도 예쁘게 나오니까!'......저기요?.... 여보세요? 그런 당신은 상대를 사랑한다면서 사진찍는 것 때문에 무안을 줘야 하나. 혹시 '남친에게 사진 못 찍는다고 말하면 남자 자존심 상한다'는 콘텐츠를 보면, 그럴때도 남자친구 태그해서 '미안해. 내가 그동안 잘못했어'라고 말할건가?

나는 네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다

당장 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덮어버릴 수 있지만, 나는 실은 그러고 싶지가 않다. 거기에 따라붙는 '그냥'이라는 말이 '그냥' 너무 싫다. 나도 사람인지라 다툼이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고, 너의 그런 태도가 네가 모르는 새에 나에게도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 네가 당장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풀린다면, 너를 사랑하는 나도 좋아진 네 기분에 덩달아 행복해야 하는가. 대체 이유도 모르는 나의 황망함은 어떡해야 할까. 너를 이기고 싶어서 그러는게 아닌데. 그저 소통 방식이 다를 뿐인데, 대체, 나의 감정은 누가 안아주고 보다듬어주나. 너처럼, 역시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일 뿐이란 말이다.


그렇지 못해서 내가 '남자가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 너에게 내가 아주 쪼잔하고 형편없는 모지리 같은 존재라고 느껴진다면, 우리 둘 사이는 대체 무언걸까. 그런 너에게 '그냥'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모지리와 함께해서 너는 과연 행복한가. 연애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남자가 져줄 수도 있지'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여자가 져줄 수도 있지'라는 말은 흔하게 들어보진 못한 것 같다. '쪼잔하게'라는 말은 왜 '남자'에겐 그렇게 자석처럼 "척!" 들러붙는데, 여자에겐 쉽게 붙지 않는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차피 못난 우리 둘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만남이다. 그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알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모른다. 1년? 5년? 아니, 10년, 20년을 함께 한다손치더라도 모든걸 알기는 힘들다. 그저 내가 바라보는 그 사람의 면면이 좋아서, 언젠가 어느 순간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한 둘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이해하고 양보하는 법을 깨우치며 살아갈 뿐이다. 신이 아닌 이상,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걸 '안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게 새빨간 거짓말일지 모른다.


결국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순간의 '미안하다'는 말이 너에게 그토록 '중헌' 것이라, 그 '중헌' 감정을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매만져 주지 못하는 게 널 사랑하지 않는거라 말한다면, 나는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어찌 '너를 알아야 하는' 당위는 내게만 그렇게 두텁게 덧씌워져 있을까. 그게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말해버리면, 우리의 얕은 사랑은 여기까지다. 어찌 너의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내)야 하는 대단한 것이길래, 너를 알고 싶어도 알지 못했던 나의 사랑은 '거짓'이 되었을까.

"오빠,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안돼?"


미안해. 그럴 수가 없어.

누구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옳지 싶다. 단,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주는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너나 나나 매한가지여야 한다. 이런건 굳이 끄집어내 얘기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암묵적 동의는 되야한다. 정말 '그냥' 미안하다고는 못하겠다. 이유도 모른채 내 마음이 '그냥 편치 못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드는 일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없었으면 한다. 그건 그저 감정의 이해나 소통이 아닌 '요구'일 뿐이니까.


연인을 떠나 가족, 친구, 부부 사이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서로 함께 매만지려는 노력없인 온전할 수 없다. 너의 성난 기분을 매만지기 위해 '그냥' 미안하다고 하는건, 최소한 네 앞에서 솔직하고 당당하고 싶은 내게, 사태를 어떻게든 대충 모면해보려는 임기응변식의 '거짓부렁'이라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마음을 더 열고, 더 솔직한 대화를 하자. '사랑한다면' 서로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 이유를 모르고 일어난 '감정의 안전사고'는, 단지 오늘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메꾼다해도, 영원히 다시 없을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또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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