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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소외된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외침. Ain't life funny?

by 타인의 청춘

[Th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는 우리나라에 [쓰리 빌보드]라는 제목으로 개봉한다. 영화는 자욱하게 안개 낀 도로에서 시작된다. 오랜 세월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다는 듯, 처참하게 망가진 빌보드 세 개가 연달아 서있다. 그 빌보드를 조용히 바라보는 여자. 그녀는 살해된 딸의 진범을 잡기 위해, 1986년 이후 아무도 쓰지 않은 드링크워터 로드의 버려진 광고판 3개에, 세상의 모든 이목을 주목시키며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길

잔인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불에 타 살해당한 안젤라 헤이즈. 안젤라가 죽은지 7개월이 지났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엄마. 사건을 맡은 경찰조차 범인 검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듯 보이자, 엄마는 억장이 무너진다. 딸의 죽음 이후로 단 한번 연락도 없었던 에빙의 경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엄마는, 광고 세개를 연달아 올린다.


“Raped while dying” (내 딸은) 강간당하며 죽어갔어요.

“And still no arrests?” 그런데도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고요?

How come, Chief Willoughby?” 대체 어째서 이런 거죠? 월러비 서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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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맞은 편의 광고 회사를 찾아간 엄마, 밀드레드는 꽤 인상적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혹시 당신이 안젤라 헤이즈 엄마인가요?"

"맞아요. 내가 그사람입니다. 안젤라 헤이즈의 엄마. 이름은 밀드레드."


역할이 먼저, 존재가 뒤에 따르는 이 세상 모든 엄마라는 이름의 존재. 엄마는 딸이 살해당한 날, 딸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무척 괴로워한다. 친구들과 놀러 나가고 싶으니 엄마에게 차를 빌리고 싶다는 딸의 요청을 거절하는 엄마. 한창 반항이 심한 딸 안젤라는 '난 엄마 덕분에 아마 차 없이 걸어다니다가 강간당하고 말거야!'라고 소리치며 집을 나간다. 그런 딸의 등뒤에 대고, '제발 네 말대로 그랬으면 좋겠다!'라고 소리치는 밀드레드. 사랑하는 딸에게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그런 말이었다면, 딸의 죽음 때문에 느끼는 밀드레드의 고통을 감히 그 누가 상상조차 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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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의 외침은 어디까지 들릴까.

광고판으로 세상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한 엄마. 월러비 서장이 딸의 죽음에 다시 관심을 갖게 하지만, 에빙의 사람들은 월러비가 췌장암 때문에 시한부의 삶을 살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밀드레드가 월러비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가고 있지 않나 우려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던 중, 엄마는 방송 인터뷰를 하게 된다. 세상은 처음엔 밀드레드의 안타까운 상황에 귀를 기울이지만, 월러비 서장의 자살 직후, 모두가 밀드레드를 마치 살인범인양 코너에 몰아간다.


밀드레드는 열아홉살 새 애인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이혼한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그저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일에 집중하길 바랄뿐이야. 안젤라 죽고 나서 7개월동안 빌어먹을 경찰들에게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수록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해."


딸 안젤라의 죽음이 사회의 책임이라 생각하는 엄마는, 범죄자뿐만 아니라 그 범죄에 가담한 사람, 함께한 사람, 방조한 사람, 외면하는 사람 모두 다를게 없는 '죄인'일 뿐이라고 외친다. 다만,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듯, 무너진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는, 어떻게든 경종을 울리려는 개인의 노력은 얼마나 쉽고 차갑게 외면당하고 마는가.

철저히 무너진 경찰

걸핏하면 무고한 사람들을 때리는 에빙의 경찰들. 인종차별은 기본에, 걸걸한 입은 기본, 밤낮으로 폭력을 일삼는다. 경찰서에 구금된 사람을 고문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만날 서로 싸움만 한다. 대체 하루종일 뭐하는지 모르겠고, 술에 쩔어 지내며, 정의의 편이 아닌 시민의 반댓편에 서있는 적일뿐이다. 밀드레드의 빌보드로 자신들이 사회적 지탄과 관심을 한눈에 받을 것을 걱정하면서, 오히려 피해자인 밀드레드에게 압박을 가하려 한다.


월러비 소장(우디 해럴슨)은, 처음에 자신에게 돌아오는 밀드레드의 화살에 크게 당황한다. 자신이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도 해본다. 영화 초반에는 밀드레드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처럼 그려지지만, 결국 안젤라 헤이즈 사건을 해결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진정성을 밀드레드에게 전하고, 자신을 비난한 빌보드 때문에 자신이 자살하지 않았단 사실을, 진심이 담긴 편지를 통해 밀드레드에게 전한다. 심지어 자신을 지탄하는 밀드레드의 빌보드 광고비를 대신 지불해 주는 참회의 선행과 함께.


월러비는 단지, 시한부로 죽어가는 자신의 아프고 불행한 모습보다는, 가족을 끝까지 아끼고 사랑했던 남편과 아빠로서, 남아있는 가족들이 자신의 건강하고 행복한 순간만을 기억해주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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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록웰. 남우조연상 탈 자격, 충분합니다.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딕슨(샘 록웰)은 에빙 경찰서에서도 대표적인 한량, 악덕 경찰이다. 업무 집중은 커녕, 자주 술에 쩔어 있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기에 중요한 사건, 순간들을 놓치곤 한다. 자신이 따르고 좋아하던 왈라비 소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이를 온전히 밀드레드의 탓으로 여기고, 한밤중 밀드레드의 광고판을 불태워버리는 추악한 복수도 서슴치 않는다. 거들먹거리는 밉상 캐릭터를 어찌나 잘근잘근 씹어 소화하는지.


경찰 뱃지를 소지하지 않는 태만한 근무로 새로 부임한 서장에게 해임을 당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딕슨. 그런 딕슨에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왈라비 소장의 마지막 편지가 전달되고. 그 편지를 읽으러 한밤중 경찰서에 들렀다가, 딕슨은 밀드레드가 맞은편 건물에서 분노에 불타올라 던지는 화염병 때문에 온몸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철저히 망가진 삶.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왈라비 소장의 죽음이 빌보드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날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패 창밖으로 집어던져버린 광고회사 직원 웰비와 우연히 같은 병실에 입원하게 된 딕슨.


사실 웰비는 자신을 두들겨팬 딕슨이 화상환자로 입원했다는 걸 알아보지 못하고, 동병상련의 옆 침대 환자인 양 친절하게 말을 건다. 긴장감이 맴도는 상황.


영화는 자신이 딕슨임을 웰비에게 말하는 딕슨의 용기, 그걸 알고서도 눈물을 훔치며 오렌지 주스에 빨대를 꽂아 건네는 웰비의 용서 등, 왈라비 서장의 편지로 변한 딕슨의 모습을 '소외된 자들의 변화'로 그린다. 왈라비 소장의 마지막 편지속, 격려의 문장들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한 딕슨의 변화는 꽤 드라마틱하다.

엄마는 힘이 세다.


밀드레드는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거칠고 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욕설을 서슴치 않고, 세상을 향한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딸의 죽음을 끝까지 파헤치려는 강한 엄마로 등장하는 프란시스 맥도먼드. 괴롭힘을 당하는 아들을 보호하는데도 앞장서고, 주윗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냉담에도 아랑곳않고 죽은 딸의 진실을 향해 달려나간다. 적의를 보이는 치과의사의 손톱을 드릴로 뚫는가 하면, 불타오르는 광고판에 서슴없이 올라가 화염과 싸우기도 하고, 자신을 왈라비 소장의 살인범으로 모는듯한 방송기자에게 생방송 중 욕설을 거침없이 퍼붓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곳곳에서 그려진 그녀의 다른 모습을 볼 때면,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가 깊은 바닷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거대한 납덩이처럼 느껴져,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딸과의 마지막 순간을 회상하며 텅빈 집안에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 왈라비 서장과 독대를 하다 그가 기침으로 피를 토하자 살뜰히 챙기려는 마음, 그렇게 '미워죽겠는' 경찰서에 화염병을 투척하기 전에 혹시나 사람이 있지는 않을지 두어번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칠고 굵은 주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이 아닌가 싶다. 과연 상황이란 인간을 어떻게 극한으로 몰고 가는가를 생각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아가며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쉽게 흔들리고 무너지는가. 그럴때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아야 하는 선택'에 얼마나 큰 용기를 보탤 수 있을까.


이런 밀드레드가 내뱉는 말들이 숨을 멎게 만드는 것만 같은 한 장면. 노을이 지는 광고판 앞에 힘없이 앉아 있는 밀드레드 앞에 나타난 예쁘고 여린 사슴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넌 잡히지 않았구나. 신은 존재하지 않고, 이제 세상은 텅 비어버려서 누가 누구에게 무슨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 세상에, 너는 어떻게 그런 예쁜 모습으로 (나타난거니), 혹시 환생이나 그런거니..? 아가야. 넌 정말 예쁘지만 내 딸은 아니야. 내 딸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하지만 와줘서 고마워. 내가 가진건 도리토스 과자조각밖에 없는데 이걸 주면 니가 죽을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될까? (그럼 너는 내딸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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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의 길, 아무도 없는 길, 그리고 엄마의 길.

개과천선한 딕슨은 밀드레드를 도우려고 노력하고, 이제와서라도 딸을 죽인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그에게 밀드레드는 처음으로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현한다. 결국 아이다호에서 온 '강간범'으로 추정되는 사내를 함께 쫓기로 한 밀드레드와 딕슨. 아이다호로 향하는 차안에서 밀드레드는 용기를 내 '니가 화상을 입은 이유는 나때문'이라 고백하지만, 화를 낼법도 한 딕슨에게는 이제 더 이상 그건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왈라비 소장의 편지를 받고, 불타는 경찰서 안에서 안젤라 헤이즈의 사건 일지를 들고 나왔을 때부터, 이미 세상을 다른 길 위에서 걸어나가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쓰리 빌보드]

세상을 향한 분노의 외침. 그 외침으로 촉발된 관심과 무관심. 아무도 없는 길에서 혼자 묵묵히 걸어야 하는 엄마의 싸움. 구부러진 길. 막다른 길. 영화속 모든 소외된 자들의 '루틴하지 않은' 루틴한 일상이, 마치 지극히 현실적이고 처절한 우리네의 하루하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극적 긴장감과 압도감이 영화내내 나를 눌러댔다. 싸움, 복수, 자살, 폭력 등을 통해 극단으로 달리는 시퀀스를 끊임없이 펼쳐내지만, 과연 그러한 [쓰리빌보드]속 텐션이, 보통의 우리네 삶에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 중 그 누가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각자의 목소리로 아우성치고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지키는 것으로. 나를 지키는 것으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그 무너짐을 재생하는 것으로. 보통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 증오와 복수 등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이 세상에서도, 결국 변화와 인정, 이해와 용서라는 찻잔속 고요는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주는 깊은 메시지가 더욱 갚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렵고 요상한 것이 인생일지도.


광고 회사 직원인 여직원이 스쳐지나가듯 던지는 한마디가 아직도 계속 떠오른다.

"Ain't life funny?" 인생이란게 정말 웃기지 않아요?


세상을 향한 보통 사람들의 외침. 그 외침은 어디까지 들릴 수 있을까. 아니, 누가 들어주기나 할까? 인간의 삶이라는 드라마는 때로 어쩌면 이다지도 우스운가. 우스워서 더욱 납덩이 같이 묵직한 인생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묵직한 울림이 가슴을 때리는 영화, [쓰리빌보드], 감성으로 영화 말하기 세번째 글을 이렇게 마친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함께 한 모든 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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