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이면...
EBS 영어 프로그램 작가로 꽤 오래 일을 한 덕분에 나는 영어 공부에 있어서는 인생의 멘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분들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다. 과연 내가 저런 훌륭한 분들과 매일 함께 하면서 영어 실력을 키우는 것에 더해 돈까지 버는(?) 일석다조의 호사를 누려도 될까 송구한 마음이 든 것도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EBS 영어 프로그램의 진행자 분들은 하나 같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실력을 가진 출중한 실력을 겸비한 것은 물론이요, 단지 영어 구사를 잘 하는 것을 떠나 영어공부에 목마른 많은 사람들의 열정에 부합하는 교수법, 시사 상식, 폭넓은 사고력까지 갖춰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있는 존재만으로도 대단한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진행자 분들은 하나같이 일인다역을 맡아야 했다. 어떤 청취자들에게는 삶의 롤모델이기도 했고, 진로를 바꾸게 한 나침반이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가 되고, 얼굴만 봐도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대학교 공강 시간에 처음 방송을 듣고 선생님을 알게 된지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항상 그 자리에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영어에 흥미를 갖게 된 후, 결국 이제는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어요. 언제나 제 등불이 되어 주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방송을 함께 듣고 공부하는 영어 스터디 그룹에서 아내를 만났어요. 이제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방송을 듣습니다. 언제나 우리 가족의 영어 도우미가 되어주시는 선생님, 오래오래 함께 해주세요."
생방송 중에 청취자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메시지들이 끝도 없이 날아들어온다. 사연을 읽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동시에 제작진의 한 사람으로서 잔뜩 어깨가 무거워진다. 진행자에 대한 애정도, 프로그램에 대한 찬사와 질책도, 의미있고 힘이 되는 좋은 음악을 들었다는 문자들도 마냥 반갑고 감사하게 여기고 말 일이 아닌 것이다. 그 감사에 보답하는 마음을 뒤로 하고 우리 모두는, 내일 더 좋고 더 나은 프로그램을 들려드리기 위해 오늘을 다시 한번 불살라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어 교육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가 갖는 원고 작성에 대한 부담감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내가 쓰고 구성한 문장들이 진행자의 목소리를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지는 일에는 오류도, 사소한 오타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한 사실 관계 확인은 물론이요, 내용을 균형있게 전달해야 하고,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써 내려간 내용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선 안되며, 해당 내용이 학습에 의미가 있는가, 교육방송이 전달하고자 하는 미덕과 가치에 어긋나거나 위배되지 않는가도 언제나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니 영어 방송 작가라는 건, 사실 영어만 잘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를 항상 정확하고 완벽하게 구사하는가. 학습 효과가 배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선별해 매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가. 좀 더 간결하면서도 의미있게 문장을 써내려가는 훌륭한 능력을 가졌는가. 이런 질문들은 시도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준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고, 진행자 분들과 수없는 논의를 거쳐 원고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일에 도가 트인 정도라고 말하는 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 2시간 짜리 프로그램의 원고는 A4 용지 기준으로 적을 때는 대략 서른 장에서 정말 많을 때는 마흔, 쉰 장을 넘어선 적도 있었다. 매일 그렇게 원고를 썼다. 수십 개의 뉴스를 확인하고, 재구성하고, 헤드라인을 작성하고, 퀴즈를 냈다. 방금 언급한 단어를 좀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을만한 노래를 PD들과 논의해 선곡하기도 했다. 기억에 남으면서도 의미있는 오프닝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서너 시간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내 부족한 영어 실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된 건 물론이다. 자주 등장하는 뉴스거리에 대해서는 나만의 논리를 내세워 에세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지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내 막연한 자괴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반복 학습의 중요성도 아는 건 기본이요, 그 누구보다 방송 내용에 대해 여러번 읽고 쓰고 다듬은 나의 영어는 늘 왜 제자리인 것 같을까 괴로웠다. 진행자 분들이나 원어민 게스트들의 수정이나 검토를 거치지 않고도 그대로 방송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원고를 쓰고 싶었지만, 그런 날은 사실 손에 꼽을 정도였다.
"Jay, today's script is flawless. Nicely done!"
"작가님, 오늘 잘 준비해 주신 덕분에 방송 준비가 빨리 끝냈어요. 작가님도 얼른 쉬세요!"
입이 귀에 걸릴만한 이런 칭찬을 듣는 날도 있었다. 단지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그런 칭찬을 듣고 싶었지만 그런 날이 지속되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었다. 새로운 주제를 다뤄야 할 때는 생소하고 어려운 표현을 붙들고 씨름도 했었고, 이미 다뤘던 주제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예전에 다뤘던 그 표현이 왜 매끄럽게 쓰이지 않을까자책했다. 거기에 청취자들의 폭넓은 학습을 위해서는 또 다른 단어도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원어민도 아닌 내가 그게 쉽게 될리 만무했다.
어느 날, 진행자이셨던 최수진 선생님께 이런 고민을 불쑥 꺼내어 보았다.
"아니 선생님, 제가 매일 수십장의 원고를 쓰고 읽고 또 듣잖아요? 근데 왜 원고를 쓰면 쓸수록 더 어렵고, 더 조심스럽기만 할까요? 혹시 틀렸을까봐 너무 걱정도 되고, 왜 더 좋은 문장을 매끄럽게 쓰지 못할까 좌절스럽기도 하네요.
우문현답이란 게 이런 걸까.
"에이, 작가님,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저도 처음 보는 단어가 있어요. 정확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기사를 필사하기도 하고 다른 정보들도 엄청 찾아보고요. 제가 잘 모르는 분야나 취약한 주제에 대해서는 엄청 공부하고 방송해요. 저희가 다루는 내용이 워낙 어렵기도 한데다가, 원어민들도 뉴스 헤드라인 작성을 할 때는 초긴장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만큼 어려운 일인 거예요. 작가님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그게 마냥 쉽기만 하겠어요? 저는 작가님이 써주시는 한글 표현들을 보면서 영어와 접목해 새롭게 배우기도 하는 걸요. 서로 다 같이 도우면서 하는 일이잖아요.”
결과물에 대한 기대 수준보다 더 잘하려고 고군분투 했던 나의 지친 마음을 매만져 주면서도 자극이 되었던 그날의 대화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어쩌면 나는 나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왜 더 완벽하지 못할까'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 프로그램의 초대 진행자이셨던 이보영 선생님께도 같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돌아온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1등 영어 교육 전문가이신 선생님도 매일 단어를 외우고 연습하고 공부하신다는 것.
“하면 할 수록 조심스럽고 두려워지는 주혁씨의 마음 뭔지 잘 알아요. 알면 알수록 유의해야 할 게 더 많아지는 것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고요. 저도 방송에 필요한 문장이나 표현은 꼭 다시 체크하면서 써보기도 하고요, 저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이야기 할때는 몇시간씩 공부하기도 하는 걸요. 영어 학습이란 건 언젠가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그런게 아니에요. 평생 친구처럼 곁에 두고 즐겁게 하는게 왕도일 거거든요.”
나의 멘토이자, 선생님이자, 영어 학습의 길잡이이셨던 훌륭한 교육자 분들이 영어를 바라보는 관점과 생각도 이런데, 과연 나는 무얼 바라고 있었던 걸까 싶은 마음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 물론이다. 영어 공부가 마치 이진법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를 0, 모든 걸 다 아는 상태를 1로만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영어 공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친구처럼, 연인처럼, 가족처럼, 매일 보고, 만나고, 부대끼고, 다시 만나고 즐거운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욕심만큼 영어를 잘 하고 싶다면 별다른 왕도가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지름길이라도 질러 가고 싶겠지만, 내 눈에만 보이는 지름길도 없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영어 사전에 실려 있는 단어를 나는 모두 알지 못한다. 외려 그걸 다 안다는 게 정말 신기하고 이상한 일 아닐까. 모국어가 영어인 사람들 중에서도 영어 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를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세상을 깜짝 놀래키고도 남을 테니까.
나폴레옹의 명언을 다들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Impossible is a word to be found only in the dictionary of fools.”
“‘불가능한’이란 단어는 바보 멍청이들의 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다.”라는 문장인데, 우리에겐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영어를 ‘완벽'하게 ‘완성'한다는 건 없는 개념인 걸. 오랜 경험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찾게 된, 영어 학습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도 더불어 알고 있다.
‘영어 초단기 완성', ‘영어 완전 정복', ‘영어, **일 안에 뽀개기'
나만 아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