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이 하늘에 닿을 수만 있다면
랑카위에는 랑카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전설이 있다. 바로 마수리라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 마수리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택시를 타든, 시장에서든 마수리 이야기를 묻는다면, 쉽게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나 역시 처음 랑카위를 방문했던 2년 전 어느 날, 택시 기사에게 처음 마수리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랑카위에 세번째 방문하다 보니, 마수리에 대해 정말 자주 듣게 되었고, 어떤 속깊은 얘기가 있을지 너무 궁금해, 시간을 들여 하루 날을 잡고 마수리 박물관Kota Mahsuri Langkawi으로 향했다.
* 참고: 마수리 박물관은 랑카위 국제공항에서는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데, 다만 크기가 그렇게 크진 않고, 안내판이 대부분 말레이어로 되어 있어서, 가이드가 없는 한국인이 가는 건 추천하고 싶진 않다. 영어가 아주 편하고, 마수리의 전설이 매우 궁금하다면 선택은 자유다. 현지인에게는 저렴하지만 외국인에겐 입장료도 17링깃 (우리돈 약 5천원)으로 높은 편이다.
[ 랑카위 - 마수리 전설 The Legend of Mahsuri ]
1762년에 태어난 마수리는 결혼할 나이가 되면서 점점 더 원숙미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다. 그녀의 사랑을 얻고자 했던 수많은 남자들 중, 마수리는 랑카위 술탄(왕)의 동생과 결혼하게 된다. 어느날 나라밖 전쟁이 일어나고,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게 돼, 마수리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되는데, 이때 세상을 떠돌던 드라망이라는 시인이 랑카위에 오게 된다. 마수리의 부모가 드라망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는 마수리의 집에 살게 되고, 드라망은 답례로 마수리에게 시와 노래를 가르친다. 다재다능했던 마수리는 시낭송과 노래로 금세 유명세를 타고, 많은 사람들이 마수리의 집을 찾아오는 인기를 누린다. 결국 이는 술탄의 부인인 완 마호라의 시기와 질투를 얻게 된다. 그러던 중 마수리의 아들이 태어나자, 완 마호라는 드라망과 마수리의 관계가 수상하다며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에 화가 난 술탄은 두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만다. 결국 마수리는 랑카위 해변가에서 뜨거운 태양볕을 견디며 수일간 고문을 당했고,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했지만 누구도 마수리를 믿어주지 않았다. 몇날 며칠동안 단검과 날카로운 창으로 온몸을 난도질 당해 죽어가면서, 마수리는 하늘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진다.
"신이시여, 제 말을 듣고 계시다면, 앞으로 랑카위에 일곱 세대에 거쳐 번영과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결백을 증명하는 뜻으로, 새하얀 피를 흘리며 죽어갈 것입니다."
랑카위에 저주를 내리고서, 마수리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흘리는 하얀 피를 지켜보던 이들은 말을 잇지 못했고, 그후 랑카위는 실제로 말레이시아의 독립이 올때까지, 주변국이었던 태국(당시 샴 왕국)과의 전쟁, 가뭄, 홍수 등 대재난을 끊없이 겪으면서 사람이 살수 없는 불모지로 변했었다고 한다. 랑카위 사람들은 이 저주가 1957년 말레이시아 독립 즈음에 풀렸다고 믿는다. 현재 랑카위 인구는 약 9만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수리의 저주가 극심했을 때는, 사람 수보다 버팔로(물소)의 수가 더 많았을 정도라고 한다. 현재 랑카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7세대를 지나, 두 세대를 더 뛰어넘은 9-10세대 사람들이라고 하고, 이들은 랑카위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생각하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억울함이란 무얼까. 사전적 의미로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함. 또는 그런 심정"이란다. 바로 이거다. "아무 잘못 없이". 그저 아름다웠고, 재능이 뛰어났고,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을 뿐이었고, 사람들은 날 좋아했을 뿐이다. 박물관에 걸린 설명에 의하면, 마수리의 피부는 도자기와 같았으며, 눈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입술은 석류같이 붉고, 이는 진주와 같았고...... 마수리의 미모를 표현하는 형용사만 20개는 넘어보였다. 세상에 존재하기 힘든 대단한 미모. 그래서 시기, 질투를 받았을까. 아님 우리는 영원히 알수 없는 숨겨진 뒷이야기라도 있는걸까. 역사란 이래서 재미있다. 이미 기정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것, 알수 없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또 모른다. '기정 사실'이라는 생각이 틀렸을지도.
대체 마수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억울'이라는 단어 말고 마수리의 마음을 표현할 단어가 또 있을까? 마수리는 왜 그렇게 긴 저주를 내렸을까? 만약 마수리가 결백한게 아니었다면, 이 저주가 랑카위에 효력을 발휘할 순 있었을까? 정말 마수리의 저주 때문에 랑카위엔 사람이 발을 붙히기 힘든 재해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7세대가 끝나고 나서 랑카위는 어떻게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궁금증이 더 커져만 가는 이야기인 것 같다. 랑카위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믿으며, 지금은 랑카위가 매우 평화롭고 번성해나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점도 재미있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분을 풀지 못한채 생을 마감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나. 역사속 인물들을 봐도, 충절과 절개를 지니고도 숙적, 정적의 모함, 시기, 질투 등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죽음으로 결백을 호소한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어디 역사속 위인 뿐이던가. 가족, 친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 예상치 못한 사고, 억울한 해고, 모함 등...... 매일 우리는 이 수많은 '억울함'들을 알게 모르게 직면하며 살고 있다.
하다 못해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가도 서로 값을 치르는 걸 잠시 헷갈리면 나도 모르게 '욱'함이 올라오는 마당에, 미미쿠키 고객들, 졸음운전 추돌사고 피해자들, 성추행, 성폭력 피해자들, 부당해고자, 가습기 피해자, 위안부 할머니들, 세월호 희생자들, 그리고 유가족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호소해도 풀리지 않을 피멍을 문신처럼 새기고 살아가는지......
무척 사소하지만, 나도 억울했던 경험이 몇번 있었더랬다. 반장이었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이 잘못을 하더라도 매번 '대표로 맞으라'며 나를 당구대로 체벌했던 6학년 때 선생님. 스승의날 감사이벤트를 했는데, 하필 밀가루를 쓰는 바람에 온 교실이 난장판이 되었다며, 당시 꽃을 들고 앞에 나가 있던 나를 대표로 때린 중2때 선생님. 자신의 아들이 나와 동갑인데, 자기 아들이 나보다 못나서 내가 하는 모든 짓이 꼴보기 싫다고 우리 어머니에게 대놓고 말했던 중3때 선생님, 본인이 실수한 점을 티내지 않으려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잘못을 뒤짚어 씌웠던 선배......뭐, 이런건 매우 사소한 억울함에 불과하다 치자.
그런데 왠지 모르게 나이가 들면서 이런 억울함들은 내 인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만큼, 그 스케일이 점점 더 커지는 것만 같다.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씨익 웃으면서 자기 잘못을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뒤집어 씌웠던 선배, 이유없이 마음에 안 든다며 화장실에 끌고가 날 때렸던 군대 선임, 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호통부터 치면서 날 의심하고 구석으로 몰아갔던 직장상사, 부정한 일을 신고하면서 퇴사를 하며 느꼈던 억울함, 이유를 모르고 흉추뼈가 부러졌을때 어디에 있을지 모를 신과 하늘을 원망했던 억울함......
이제 이런 모든 것들을 글로 풀고 있다는 점이 한편으론 재미있다. 잊지 못해서 글로 쓰려는건지, 아니면 이제 생채기가 다 나은 덕에 쉽게 말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다 써놓고, 세번을 다시 읽으며 당시를 회상하는데, 마음이 답답해지지 않는 걸 보면, 이제는 웃어 넘길 수 있는 일들이 되었나도 싶다. 다행이다.
억울함이 오래 들면 병이 생긴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엔 더 큰 병이 생긴다. 예전엔 억울함을 삭이느라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어도, 참고, 인내하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더라. 그래서 나는 작심하고 행동을 바꾸었다. 억울함을 느낀 바로 그때,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늦어지면 안 됐다. 대화든, 문자든, 메일이든, 싸움이든,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노력했다.
가슴속 응어리라는 건, 어떻게든 꺼내 매만져 주지 않으면 더 깊은 병이 된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심정'이 들면서도 참는게, 그 억울함을 되려 더 키우는 악수가 되더라. 상대는 나의 이런 억울함을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그 응어리를 나 혼자 지고 간다는게 참 부당한 일이라서, 되도록이면 설득이 되게 방법을 찾되, 설령 그 설득에 실패하더라도, 나의 억울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는 노력으로, 내 안의 화를 풀어내는 게, 내가 조금은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풀지 않으면, 풀수도 있었던 기회마저 놓치고 영원히 그 사람을 미워해야만 한다. 얼마나 큰 마음의 짐이자 병인가.
사실 더 좋은 방식은, 억울함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한다든지, 행동을 조심한다든지, 억울한 오해가 없도록 사전에 명확한 소통을 하는 것들이겠지만, 사람 일이라는게, 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고 해서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 그런건 아니지 않나. 미루어 다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는게 인생이다.
억울함을 해소하려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의도치 않게 남이 보기 불편한 충돌이 생긴 적도 있지만, 어쩌랴. 굳이 남 보기 불편하다고 해서, 나만 시들시들 병들 순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내가 나이를 먹으며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갖고 있음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엔,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의 이기심' 없이, 살아나가는게 무척 버거운 일들도 너무나 많다.
다행히도 나는 이런 '이기적인 노력'을 통해서, 10년 전, 20년 전의 나보다 조금은 나를, 내 사람들을 지킬 줄 아는 '갑옷'을 입게 되었다. 불의를 보면 할말을 해야 하는 사람, 억울함을 당하면 논리적으로 풀어보려고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 모두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라도 한마디 할 수 있는 사람. 물론 이런 노력으로 결과적으로 잘 해결한 일들도, 오히려 더욱 큰 미움을 사거나 억울함을 당한 일들도 있다. 지나고 나서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후회한 일들도 있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하기엔, 조금은 많은걸 알게 되고, 현명히 고려해 볼수 있어야 하는 때가 된것도 같다. 하릴없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는 방법밖에 몰랐다면, 나는 왠지 '문제 해결력'이 없는 사람으로, 그저 세월따라 나이만 먹은 듯, 황량함을 느낄 것 같다. 그리고 '좋은 게 좋은거야'라는 말은 생각외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곡해하면서, 본인의 이기심을 채우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좋은게 좋은거'라며 넘어가주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로 '좋은게 좋은 거야'라고 너그러움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언제고 내편이 되어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들 뿐이다. 물론 그들에게 나는 언제고, 그들의 편이 되어줄 마음을 품는다. 그래야 적절하고, 정의롭고, 동등하다. 그러고 보면, '언제고 내편'인 사람을 가졌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새삼, 이 세상의 '내편'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마수리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마수리의 무덤 앞에 서서, 마수리가 당한 일을 생각하노라니 쓸쓸한 측은함이 느껴진다. 대체 얼마나 억울하면, 사람의 몸에서 하얀 피가 흘러 나올 수 있을까. 얼마나 억울하면, 자신이 살아온 땅 위에, 자그마치 일곱 세대에 걸친 저주를 내렸을까. 그 억울함이 얼마나 강렬했길래, 신은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랑카위에 7세대에 걸친 재앙을 주었을까.
억울함이 하늘에 닿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도 억울함으로 가슴을 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평안을 찾았으면 한다. 왕따 피해자들, 졸음운전 추돌사고 피해자들, 성추행, 성폭력 피해자들, 부당해고자,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해자들, 가습기 피해자들, 위안부 할머니들, 세월호 희생자들, 그리고 유가족들... 억울한 이들의 억울한 마음을 들어주는 신이 어딘가에 꼭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 그래서 신이 들어준다 치자. 들어줬다 치자. 그래서, 뭐, '재앙'이 오면 어떠랴.
세상엔 우리 모두의 짐이자 책임으로,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도덕과 윤리, 정직성과 공평성, 정의로움, 인간성, 그리고 공동의 경각심을 상실한 우리에겐, 7세대 아니 70세대까지도, 남은 생이 재앙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부디 인간에게도, 생명에게도 부디 좋은 세상이 오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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