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나를 생각하는 것도 나의 일이여야 한다.'
산티아고 게스트하우스. 지금 내가 묵고 있는 곳.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책속에 계속 쓰이고 읽히는 곳. 랑카위 체낭 비치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에 있다. 그래서 내가 이곳을 더 좋아하는 지도. 이번에 세번째 방문인데, 매번 올때마다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사장님 덕에, 이번 랑카위 일정도 편안하다.
이야기를 잠시 틀자면, 참고로 자타공인, 예민하고 까다로운 남자로서, 나는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게, 사실 숙소다. 비행기는 차치하고서라도, 숙소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깔끔하고, 가장 신뢰가 들고, 가장 편안한 곳을 고른다.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잠도 못자고, 괴롭고, 불편한 마음 때문에,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여행지의 시간들을 망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숙소는 곧 '에너지 완충 상태의 청결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숙소를 고르는 일은 몇시간, 아니 며칠이 걸리더라도, 주변 지도를 모두 파악하고, 맛집을 미리 찾아놓고, 사진을 모두 캐내는 정성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민하고 까다로운 남자로서,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게스트하우스에 절대 묵지 않는다. 나름 낭만을 즐겨본답시고 초저가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가, 3일 밤을 여행자들의 코고는 소리에 매일 아침 가오나시로 깨어난 적도 있고, 스페인에선 잠깐 묵고 가려던 숙소에서 숙박객을 도둑으로 몰아 밧줄로 묶어놓는 실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져, 묶여있던 두 명의 (집시 같아 보이던) 여행객이 나를 보고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한 적도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멜팅팟Melting Pot'답게, 세계 각국의 향신료로부터 탄생한 고약한 체취로 실내 생활이 불가한 곳도 있었으며 - 물론 나도 마늘, 김치 냄새는 추가했을거라고 인정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화장실 커튼을 젖히자마자 올라오는 구역질 나는 냄새와 바퀴벌레로 덜덜 떨면서, 마치 한번도 갈지 않았을 것 같은 침대보 위에 공중부양하듯이 누워있다 2시간 만에 체크아웃을 하고 나온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편견을 갖지 않고 시도해보려고 노력은 꽤 해본것 같네. 나는 꽤 장하다!!) 하필이면, 어쩌다 4곳을 모두 실패해버렸을까.
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왔을때부터 정말 먼지 한톨 안나오게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있고, 아침 10-11시에 사장님이 손수 청소를 하시는 때가 오면, 정말 어딘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기 송구할 정도로 구석구석을 빛이 나도록 닦으신다. 2년전에도, 1년전에도, 그리고 세번째 방문한 오늘도, 한결같이 그렇게 청소를 하시는 걸 보니, 왜 한번 왔던 사람들이 이곳을 또 찾고, 사장님과 언니, 누나, 동생하며 오래도록 왕래하고 지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방마다 침대도 2개씩이라, 그룹으로든 혼자로든 쓰기 편하고, 넓은 침대가 있는 방도 있다. 깔끔함은 기본이다. 그래서 그토록 예민한 나도 망설임 없이 세번이나 다시 오게 된 곳이라고 할까. 어떻게보면 여기 산티아고가, 지난날 나의 '게스트하우스 트라우마'를 말끔히 없애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왜 산티아고일까. 랑카위라면 갈색 독수리의 섬이니, 뭐 촌스럽게는 '이글', '독수리'라든지, 조금 의미있게는 '마수리'(랑카위의 전설적 인물)라든지, 가장 유명한 해변인 '체낭'이라든지 다양한 이름을 붙였을 법도 한데. 이유인 즉슨, 스페인 순례자의 길, 즉,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꿈을 버리지 않고 계신 사장님의 열정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나에게도 언젠간 '부엔 까미노Buen Camino'를 외칠 순간이 올까. 사실 내년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시간과 주머니와 체력이 허락해줄지, 아직은 모르겠다. 대학 전공이 스페인어라,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10년 전에도 관심을 가졌던 곳이었는데, 그 인기는 여전한 것 같다. 두달 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의 얘기를 들으니, 순례객 중 거의 70%가 한국인이었을 정도였다 하던데, 안타깝게도 사장님은 바쁜 일정과 게스트하우스 관리로, 이름만 그렇게 짓고 아직은 못 가보셨단다. 예쁜 게스트하우스 이름처럼, 언젠가는 사장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꼭 밟아보시길 기도드린다.
이곳은 느리다. 나도 이제 말레이시아에 2년을 살았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라는 곳이 원래 '느림'을 안고 있는 곳임은 알고 있다. 다만, 랑카위는 그 중에서도 더 느릿하고 여유롭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어김없이 7시 20분이면 수탉이 울어대고, 세수도 안한 얼굴로 나가, 냥이 삼형제 밥을 준다. 그리고 하늘을 보고 기지개를 쭈욱 켜면, 찔끔 감은 눈 앞에 펼쳐진건 오로지 눈부시게 파란 하늘 뿐. 요즘은 밤사이 비가 많이 내려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공기와 볕이 너무 좋아서일까. 이곳에선 무엇을 하더라도 그리 피곤하지가 않다. 아마도 몸보다 더 편한 마음 때문이라 여긴다.
이곳에선 그런 날들이 반복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래서인지 이곳의 시간은 유독 느리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문득 생각한다. 나는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한적한 마을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모르겠다. 반드시 별다방, 콩다방이 있어야 한다거나, 무조건 초고속 와이파이가 있어야 한다거나, 반드시 철마다 쇼핑을 해야 한다거나, 북적임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사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허나 역으로 또, 매일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아예 없다거나, 무료할 정도로 할게 없다거나, 그럼 또 언젠간 한숨을 길게 내쉴 것 같기도 하다. 모르겠다. 사람은 언제나 갖지 못한 걸 아쉬워하곤 하니까.
산티아고 게스트하우스는 쿠알라룸푸르에도 지점이 있다. 이곳 랑카위 게스트하우스와 연이 닿아서 쿠알라룸푸르 게스트하우스도 방문해 보았는데, 여행객들이 좋아라하는 페트로나스 타워와도 6-7km 떨어진 주상복합 콘도미니엄에 위치해 있어서, 랑카위 게스트하우스보다 언제나 더 북적이는 것 같다. 방문했을때 만났던 사람들과 나도 인연이 생겨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 생긴걸 보면, 산티아고 게스트하우스는 뭐랄까, '따뜻한 둥지' 같은 곳이다.
도시의 북적임과 매연 하나없는 랑카위의 한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평온하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한달살기로 이곳 산티아고 게스트하우스를 찾고 싶어하는 문의가 계속 오는 것도 이해할 법하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도 네 팀이나 문의가 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속에 파묻혀 여유를 즐기고, 랑카위 이곳저곳을 다녀보기에도 더할 나위없이 좋을 뿐더러, 맛집이든 투어든, 관광이든, 하나하나 일일이 다 섬세하게 챙겨주시는 사장님의 정성과 애정이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겠다. 사실, 얼마전 길을 가다가 발목을 심하게 다쳤는데, 그런 나를 데리고 랑카위에서 제일 유명한 한의원에도 매일 데려다 주시고, 중국식 경혈 마사지사까지 소개해주신 덕에, 발목도 며칠새 꽤 좋아진 것 같다. 아, 나라도 시간과 여유만 있다면, 한달 정도 이곳에 푹 머물러 있어보고 싶다.
늘어지게 아침을 먹고 나서, 랑카위의 상징, 독수리상이 있다는 쿠아타운에 들러보기로 했다. 태국의 섬으로도 이동이 가능하고, 말레이시아의 또 다른 유명 휴양지인 페낭에도 갈수 있는 제티 포인트가 있는 곳이 바로 이 쿠아제티Kuah Jetty다. 그 제티 끝자락에,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금방이라도 날아갈것만 같은 독수리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게 바로 랑카위의 상징인 독수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말레이시아의 현직 총리인 마하티르의 이름이 아래 현판에 새겨져 있는 독수리상은, 북한과의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에서 선물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어느 여행책자에 실려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여행 책자도 언제나 믿을만한 건 못되는것 같다.
최근에는 이 독수리상이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에 근거해 '할랄Halal'이 아닌 '하람Haram'이라는 이유로,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나무를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생물을 마치 우상처럼 형상화해 동상으로 세운 것이 이슬람 율법에 맞지 않다는 것이 철거론자들의 주된 이유인데, 현직 총리의 근거지이자, 섬의 이름이기도 하고, 한해 300만 관광객이 찾는 독수리의 섬인 랑카위의 가장 주된 상징물을 그렇게 쉽게 철거해버릴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쿠아타운을 빠져나와 다시 체낭으로 향했다. 쉬는 날이기는 하지만, 금방 끝내야할 작업이 있어서, 카페에 들러 커피나 한잔 할겸, 체낭 비치 입구에 위치한 허깅 히포Hugging hippo에 들렀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어쩔 수 없다. 안정적인 인터넷 속도, 괜찮은 커피, 랩탑 작업에 눈치 주지 않는 푸근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훌륭한 작업실이 된다. 참고로 허깅 히포는 체낭의 선셋을 보기에도 참 좋은 곳이지만, 랑카위의 그 어느 카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와이파이 속도를 자랑한다. 스타벅스보다도 빠르다!! 다른 곳이 느릴 수 있겠지만, 이곳은 유난히 빠른 것 같다. 오로지 와이파이 때문에 같은 카페를 세번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카페 창문 위로 물방울이 맺힌다. 아침에 꽤나 맑았는데, 오후가 되니 비가 오려나보다. 거품이 가득 담긴 카푸치노를 한잔 마시고 나니 온몸에 온기가 퍼진다. 변화무쌍한 날씨가 동남아의 매력이듯, 이 비도 언젠가는 그치겠지 하며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둔다. 눈꺼풀이 조금 감긴다. 내 숨소리가 느껴진다. 호흡이 천천히 늘어진다. 이내 마음이 더 편안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30분도 되지 않아 비가 그쳤다. 구름이 잔뜩끼어 멋진 선셋을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그런대로 좋다. 나는 이 무렵의 바다를 사랑한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감싸며 흩어지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를 뒤덮었다가 하얗게 부서지기를 반복하다가, 붉게 이글거리는 해를 삼킬때쯤 만들어내는 하늘과 바다의 '데칼코마니'가 그렇게 좋다. 한사람이 두사람이 되고, 두사람이 네사람이 되고, 네사람이 여덟사람이 되는 매끄러운 거울의 바다가 좋다.
세 아이가 바다 위를 뛴다. 파도를 넘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넘고 또 넘는다. 짧다란 팔과 다리 탓인지, 하나, 둘, 셋을 아무리 세어도, 그렇게도 셋은 합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귀엽다. 그 덕에 내가 더 높게 뛰었네, 네가 더 높게 뛰었네 하는 깔깔대는 웃음이 터진다.
무리 중 가장 작은 아이가 뛰어 오른다. 바다의 거울 덕인지 체공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한참을 바라다 본다. 천진난만하게 파도를 뛰어넘고 깔깔대는 아이들을 보며, 어린 시절의 나는 어땠는지 생각한다. 내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출렁이는 파도를 넘고도 남을 단단한 마음이, 아직 나에게도 남아있을까. 파도 거품처럼 부서져버릴까 포기한 건 없었을까. 온몸이 젖었지만 괜찮다고, 시간이 지나면 바싹 마를거라며 그저 배시시 웃고말 마음이 내겐 남아있을까.
문득 다시 생각한다. 사람은 언제나 갖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 도시에서 나는 한가함을 그리워했고, 자연에서 나는, 도심의 화려함을 욕망했다. 안정적이었지만 숨가쁘게 바쁜 직장에서 권태로움을 소망했고, 한껏 나태하고 권태로운 날들을 보내다보면 높은 연봉과 승진, 인정과 명예를 공상했다.
출렁이는 파도같은 것이었다. 높은 마루도, 깊은 골도 있었다. 언젠간 모두 거품처럼 깨져버릴 것들이었다. 모든 건 그저 순간일 뿐, 영원한 건 없었다. 언제나 갖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게 사람이라면, 왜 나는 나를 들여다 보지 못하고, 그림자를 바라보며 건너편의 것들을 붙잡지 못함에 한숨을 쉬었던 걸까. 아무리 손을 뻗어도 가져올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하느라 인생을 허비한 날들이 거품처럼 깨어져 이내 흩어지고 만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나를 생각하는 것도 나의 일이여야 한다.' 내가 소망하는 것, 내가 욕망하는 것들을 살뜰히 챙겨도 되는 인생인 것이다. 흩어지는 것들은 이내 다시 모인다. 마음의 '조각모음'도 내 일이고, 부서진 기억들을 매만지는 것도 오직 나의 일이다.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다. 부서졌던 날들도 많았다. 내가 소망하는 것들이 타인의 그것과 부딪혀 찢기고 짓밟힌 적도 많았다. 연약하고 작은 몸뚱아리가 모래처럼 흩어져 어디론가 흩날려 버리는 건 아닐까 애태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것 같다. 무겁게 짓눌려 발자국이 난 모래처럼 단단한 것도 없다는 걸. 짓밟히고 짓눌려도 나를 위하고 나를 생각하면서 다시 단단히 그러모을 마음만 있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인생은 모래성 같다. 잘 쌓았나 싶으면서도 어김없이 무너진다. 또 쌓는다. 또 흩어진다. 쌓다보면 알게 된다. 좀 더 '오래 버티려면' 꾹꾹 짖눌러야 한다는 걸. 더 짓누르고 짓밟을 수록, 인생이란 모래성은 조금 더 버티어낸다.
나는 나를 생각할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할 수 없을 나임을 뼈저리게 알지만, 그래서 역으로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나를 생각하고 나를 소망할 것이다. 나를 더 챙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할 것이다.
내년 이맘때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나를 소망한다. 그 길 위의 나는, 오늘보다 더 단단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정확한 여행정보를 드리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님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