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며칠새 계속 비가 왔다. 새벽녘 게스트하우스 슬레이트 지붕에 매섭게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희미하게 사나운 꿈을 꾼 것도 같다. 이런 꿈은 유독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흐릿한 날이면, 왠지 몸도 추욱 가라앉는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느즈막한 아침을 뭘 먹으러 갈까 하다가, 쿠아타운 근처에 있는 유명한 국수집에 가보기로 했다. 일종의 '비빔국수' 스타일의 현지음식을 잘하는 곳이라고 한다. 사실 겉으로만 봐선 여기가 정말 맛있는 음식을 하는 집일까 싶을 정도로 간판도 없는 허름해 뵈는 곳이지만, 반면 제대로된 고수의 맛집은 최소 '이런 포스' 정도는 풍겨줘야 해, 하는 느낌도 든다. 들어보니 가게가 생긴지 30년은 족히 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자꾸 저리 가보라 하신다. '안으로 더 들아가봐.'라 말하시는 듯하다. 말레이시아식 영어로 대화를 한다.
"Huh? Inside? 네? 안에 가보라고요?"
"Yeah. Super~superstarrr lah. 응, 수퍼스타가 있어 수퍼스타가."
"Superstar? 수퍼스타요?"
"Ya. Go inside, have a look. Faster, faster lah~. 어어. 안에 가봐. 빨리 빨리~"
"Okay, lah~. 네에~"
뭔가 해서 쭉 들어가보니, 정말로 세계 최고의 슈퍼스타 사진이 카운터에 붙어 있었다. 다름 아닌 '주윤발' (독자 분들이 이 분을 모두 알까.. 나만 슬픈가...)이다. 시간을 말해주듯, 55년생인 주윤발조차 뽀얗고 젊다. 언젠가 분명 '수뻐스따'가 이 가게에 왔었다는 사실과, 지금의 예쁘게 자란 딸과, 나를 향해 웃어주신 아주머니가 이젠 약간 흐릿해진 사진 두장에 묘하게 담겨있다. 수뻐스따아~가 내 국수 먹고 갔잖아, 라고 자랑하고 싶은 아주머니의 귀여운 마음에 내 마음이 조금 간질거린다. 결국 한바탕 웃고 만다. 덕분에 더욱 허기가 진다. 이제 주문한 국수가 나왔으려나.
국수 말고도 우리네 스타일의 찐빵도 있는데, 속에 팥 앙금이 굉장히 부드럽고 촉촉해서 누구나 좋아할 맛이다. 팥을 꽤 좋아하면서도 알맹이가 성근 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팥이 아니다. 이보다 좋은 별미도 없다. 참, 커피도 굉장히(?) 달고 맛있다. 말레이시아 커피(보통 꼬삐라고 부름)는 보통 커피, 크림, 설탕이 모두 들어간 굉장히 진하고 단 맛을 자랑한다. 여기 커피는 다른 곳보다 더 진하고 단 맛이 난다. 옛날 다방식 믹스 커피를 즐겨드시는 어르신들은 '달다'고는 하셔도 좋아하실 맛인건 분명하다.
뭐, 주윤발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나에겐 '국수 이모'가 수뻐스따였다. 사실 누가 왔다간게 중요한가,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주윤발이 오지 않은 곳이라 해서, 맛이 없는 곳도 아닌데, 그러고 보면 우리는 종종 너무 권위에 기댄다. 오롯이 나의 감정과 행복에 기대도 좋다. 내 입이 즐겁고 내 마음이 풍성했으니 오늘 아침은 이걸로 충분하다.
배를 든든히 불리고 나서, 체낭 비치 쪽으로 운전대를 돌린다. 비가 오고 난 뒤라 웅덩이가 생겼는데도, 학교앞 아이들은 꺄악 꺄악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뛰어다닌다. 확실히 이럴 땐, 꽉찬 도시의 생활 소음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훨씬 더 좋은 음악이다. 굳이 BGM이 필요없는 랑카위의 면면. 집옆 수로에서는 두꺼비가 울고, 아침엔 수탉이 잠을 깨운다. 밥 달라고 다가와 몸을 부벼대는 고양이들이 울어대고, 저녁엔 풀벌레 소리, 온갖 곤충 소리가 그득하다. 이런게 '귀호강' 아닐까 싶다. 해변에, 언덕에, 폭포에 가면, 사람들이 웃는다. 식당, 수퍼에서 만난 사람들도 미소를 지어준다. 내가 한국 사람임을 알아보는 말레이 사람들은 어김없이 '캄사함니다~'라고 인사를 해준다.
얼굴도 몰랐던 우리.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우리. 그런 우리가 서로의 말로 웃는다. 뜨리마 까씨Terima Kasih, 감사합니다 라며, 서로에게 고맙다. 언젠가 다시 만날지 알수 없는 우리. 아마도 못 볼 우리. 하지만 우리에게서 따뜻한 공기가 오고 간다. 주고 받는다. 이러고 보면, 미소를 줄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누군가에게, 웃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그런 마음이 있었는가. 차마, 매만져 볼 여유도 없었는가. 왜 그렇게 마음이 다쳤을까. 우리는 왜 서로에게 웃어줄 수 없을까. 이곳 사람들의 얼굴에 뜨는 환한 미소가, 언제나 참 감사하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미소를 받는다. 충분히 받은 미소 덕에, 나도 웃어 줄 수 있었다. 아니,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큰 선물을 받았다.
오늘은 해질 무렵 날씨가 좋아지길 기대해 보면서, 선셋크루즈를 하기로 했다. 2년전 처음으로 랑카위에 왔을 때도 선셋크루즈가 참 좋았었는데, 한국에서 친구도 왔으니, 같이 또 한번 가보기로. 워낙에 가족, 커플 여행자가 많이 선택하는 투어라, 친구에게 해보라고 추천하면서도 혼자 보내긴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그랬지만, 2년 전 기억이 너무 좋았던게 더 컸다.
선셋크루즈는 랑카위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 중에, 참 좋은 투어 프로그램이다. 선셋이 워낙 아름답고 유명하기도 할 뿐더러, 99개가 넘는 섬(많이 보일때 104개)들 사이로 크루즈를 타고 여기 저기를 구경하면서, 씨 자쿠지Sea Jaccuzi도 하고,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술도 즐기며, BBQ와 함께 현지 음식을 배터지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꽤 남아 있어서, 우선 체낭 비치 가기 전,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생긴지 얼마 안된, 호텔 겸, 클럽 겸, 레스토랑인 DASH.
선셋크루즈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맥주도 한잔 하고, 카페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친구와 대화도 나누었다. 선셋크루즈의 시작 시간은 보통 공히 오후 4시 30분. 랑카위 서남쪽 끝자락에 있는 리조트 월드 랑카위Resort World Langkawi에 가면, 차터 크루즈를 타는 선착장이 있다. 리조트 월드 랑카위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리조트 체인 중 하나며, 리조트 월드 랑카위, 리조트 월드 겐팅 (쿠알라룸푸르 소재) 등, 여러 지역에 많은 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2년전만 해도 선착장 부근이 한창 공사 중이었다가 이젠 꽤 근사한 데크Deck도 생기고, 매우 깔끔해 졌다. 심지어 2년 전엔 없던 바다 바로 앞 인피티니풀이 생기다니 놀랍다.
내가 2년 전에 예약했던 선셋크루즈는 트로피칼차터스였고, 큰 배와 세계 각국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인상적인 투어였다. 대부분의 크루즈는 동일한 패키지를 갖고 있는데, 이번에 산티아고게스트하우스를 통해 예약하게 된 크리스털요트는, 트로피컬의 배보다 조금 작았지만 트로피컬과 비교했을 때, 직원 교육, 서비스 마인드, 저녁 뷔페가 월등히 훌륭한 느낌이었다. 승선하기 전, 초록색 스티커, 노란색 스티커 등을 서비스 업체에 맞게 나눠주고 같은 색의 피켓을 들고 '배에 타세요~'라고 알려주니, 그리 걱정할 것도 없다. 유치원 아가들처럼, "갈매기 끼룩끼룩, 독수리 이글이글.. 응(?)"하면서 쪼로록 따라가 배에 올라타면 끝. 배에 타기 전, 슬리퍼나 신발을 벗고 올라타면 되고, 아무리 청소를 잘 했어도 배는 언제나 미끄러울 수 있으니 조심만 하면 된다.
보통 8시쯤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선셋크루즈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배 위의 한가로움, 편안하게 들려오는 음악, 고급은 아니더라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칵테일과 맥주, 사람들의 미소, 고요한 주변 환경이 주는 차분함,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게 하는 선셋의 완벽함이 조화를 이룬다. 이날의 선셋크루즈도 역시나 훌륭했다.
하루하루 복잡한 세상속에서도 자연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 한번 보고, 물소리를 듣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대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얼마나 위안을 받곤 하는가. 자연은 언제나 위대하다. 미약한 인간이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무엇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거니와 그 끝도 쉽게 알 수 없다. 한없는 평화와 안식을 주면서도, 때론 위협과 재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니, 인간은 자연앞에서 한낱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신이 허락한, 기대하지 못했던, 생각치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났을때,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이 더 크고 경이로운 것일까. 지금 이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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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로 해가 떨어지고 나서 점점 하늘이 검붉게 변해갈때쯤, 뱃머리는 다시 선착장으로 향한다. 멀리 보이는 리조트 월드 랑카위의 크고 작은 불빛도 이럴 땐 어둑해지는 하늘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어때? 좋았어?"
"응, 정말 평화롭고 느긋해서 좋았던 것 같아. 음식도 맛있고 직원들도 정말 친절하더라."
"그치, 2년전에도 좋았지만, 오늘도 참 예뻤다. 아침에 비오더니, 결국 날씨가 다 했네."
"맞아, 맞아."
친구가 여행을 함께 해주어 고맙다며, 마사지를 쏜단다. 오예. 나도 함께 해서 즐거웠는데 굳이....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올라온다. 이럴 땐 "와 신난다. 정말 고마워."라며 받는게 최고의 리액션이다. 맛있는 음식과 칵테일 세잔, 맥주 두캔으로 더 없이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그랩을 잡아 타고 마사지샵으로 간다.
친구는 시그니쳐 알룬알룬 마사지, 나는 아로마테라피를 받았다. 친절한 직원들과 정성스런 마사지에 며칠간 쌓인 노곤함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참고로 1시간짜리 풀 바디Full Body 마사지는 우리돈으로 3만원대~5만원대로 다양하다. 알룬알룬 마사지, 트래디셔널 말레이시안 마사지, 아로마테라피 마사지, 발리니스 마사지 등 다양한 옵션이 있으니 잘 알아보면 좋다. 방마다 화장실, 샤워실이 딸려 있을 정도로 고급 마사지샵에 속하니, 선택시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알룬 알룬을 비롯해, 선 스파, 그랜드컨티넨털의 스파 등은 인기가 많으니, 미리 전화를 해보고 예약하고 발걸음을 하는게 현명하다.
마사지를 받고 나와 잠시 프란지 빠니Frangi Pani 꽃들이 흩뿌려진 길을 걷는다. 프란지 빠니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 잘 자라는 세가지 색깔의 꽃을 가진 나무인데, 현지 여인네들, 서비스업의 종사자들이 룸 데코레이션, 머리 장식, 레스토랑 플레이트 데코 등으로 많이 쓴다. 그만큼 잘 자라고, 자주 떨어지고, 풍성하고, 예쁘기 때문에, 길에 떨어진 프란지 빠니를 이렇게 사용하는 건 거부감이 없고, 자연스럽다.
"잘 들어가라. 오늘 고마웠어."
"뭘, 너 덕분에 계획도 없이 온 랑카위 여행이 너무 즐거웠다."
"에이, 나도 네 덕분에 오랜만에 랑카위에서 좋은 시간들 보냈지."
"무튼 잘 지내고, 건강해."
"그래 너도 그래야지. 아무 생각 없이 쉬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 너무 일에 치여서 지내지 말고!"
"그럼 그럼, 이제 돌아가면 "너 짤리고 싶어?"라고 말할때까지 여행도 다니고 쉬어볼라고."
"암요 암요. 자기 할일 잘 하면서 제대로 쉬는 걸 요즘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냐. 그게 정답이지."
달이 참 예쁘다. 별도 쏟아질 듯 하다. 친구가 혹시 저건 북극성 아니냐며, 그럼 저건 북두칠성 아니냐는데, 일곱개의 별들이 서로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별 일곱개를 대충 헤아리려고 해도 흡사 헤드뱅잉을 해야 할 정도다. 저건 북두칠성이 절대 아니라고 빡빡 우기는 나와, 끝끝내 북두칠성일 거라 우기는 친구랑, 그냥 그렇게 한바탕 웃고 만다. 앱 깔아서 증강현실이라도 해줄걸 그랬나. 아무렴 어떠랴.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며, 편하게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여서 좋고, 이런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해서 좋고, 북두칠성이든 카시오페이아든, 오리온이든, 저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이곳이라 더욱 좋다.
생각해 보면 나는, 서울에서 별을 찾는 노력을 별반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컴퓨터를 보느라 뻐근해진 목을 연신 주무르려고 고개를 젖히긴 했어도,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별을 바라보는 여유는 없었던 것 같네.
그렇담 나 지금.. 참 잘 살고 있는 거겠지?
(다음편에 계속)
* 정확한 여행정보를 드리려고 작성한 글이 아님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