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카위 데일리 (2)

내맘대로 되는 것이 없다해도

by 타인의 청춘

아침부터 비가 촉촉히 내렸다. 하아. 간밤에 내리던 비가 아침이면 그쳐줄까 싶었지만, 오전 10시가 다 되어도 비는 여전하다. 한국에서 랑카위로 여행을 온 20년지기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섬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한 날인데, 안절부절하다. 어제 날씨가 그럭저럭 좋았던터라, 랑카위에 딱 네 곳 있다는 폭포 중 하나에도 가보고, 한적한 해변에서 한껏 여유도 부리고, 랑카위 하늘전망대도 가기로 했는데. 망했다.

유명한 메뉴 중 하나인 망고 와플. 달달함이 온몸에 퍼진다.

일단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한창 25~29도를 오가는 날씨지만,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계속 내릴 때면, 긴 소매가 유용할 정도로 서늘함이 느껴기지도 한다. 이럴 때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에 달달한 디저트가 있다면, 부족함이 없다. 랑카위에서 가장 훌륭한 카페 중 하나인 스마일링 버팔로Smiling Buffalo를 찾았다. 앤티크한 소품, 아날로그 감성, 주말마다 무료로 즐길 수 있는 나즈막한 밴드 음악, 예쁜 색감의 테이블,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고양이, 세계 각국에서 모인 부드러운 표정의 사람들. 아, 좋은 카페의 장점은 고루 갖춘 것 같다. 행복은 바로 지금이다.

카페라떼, 카푸치노, 무엇을 시켜도 만족스럽다. 이날의 선택은 카푸치노.

말레이시아는 동남아 국가답게 건기와 우기가 나뉜다. 요즘은 전세계적인 기후 변화 때문인지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갈린다고 말하기 어려워진 듯도 하다. 서말레이시아에 속하는 랑카위는 원래 6월부터 9월까지는 비가 잦게 내리지만, 우리나라의 장마처럼 비가 오진 않는다. 갑자기 우두두둑 비가 내리다가도 30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맑아지는 하늘을 보기도 하고, 반대로 맑은 하늘에 가슴 뭉클한 선셋을 기대했다가도 갑자기 내리는 비와 몰려드는 먹구름에 아쉬움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자연이고 인생인 걸. 내맘대로 되는 것이 없다해도, 그게 '자연'스럽다. 역시,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면 되는게 여행의 맛이자 멋이다.


동남아시아 6개국에 진출해 있는 택시앱 그랩(Grab)을 타고 뜨루문 폭포로 향했다. 랑카위에 위치한 4개의 폭포 중 하나인 뜨루문은 체낭 비치에선 15분쯤 걸린다. 이럴 땐 섬이 작은게 외려 행운이다. 비가 조금 내려서 그런지, 불어난 물줄기가 폭포를 더욱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각국에서 모인 여행자들이 이미 여기저기서 환호성을 지르며 물에 뛰어들고, 누군가의 과감한 점프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깔깔대며 박수를 보낸다. 자리를 펴고 누워 물안개를 피우며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 소리만 듣고 있어도 낙원이 따로 없다. 곳곳에 원숭이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관광객을 맞이할 정도로 자연 그대로인 뜨무룬 폭포는, 랑카위의 숨겨진 보물이다. 맑은 물과 울창한 숲, 즐거운 사람들의 웃음까지 부족한 것이 없다. 가끔 입구에 주차된 오토바이나 차에 올라타 자기들만의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원숭이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풍덩 뛰어들고 싶지만 여벌 (속)옷이 없어...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는 뜨루문 폭포의 원숭이들

1시간쯤을 보내고 나서, 비가 언제 또 올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뜽꼬락 비치로 간다. 뜨루문 폭포에서 그리 멀지 않아 부담이 없다. 발리나 해운대처럼 길고 너른 해변을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뜽꼬락 비치는 보통 파도가 거의 없고, 아이들도 놀기 좋은 수심으로 안락함을 준다. 또 다시 행운이 함께 한다. 그랩카에서 내리니 눈앞이 쨍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지난 번에 왔을때 보다는 사람이 조금 많은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잡함은 찾아볼 수 없다. 각자 원하는 자리에 모여앉아 한적함을 있는 그대로 즐기면 그만이다. 샤워시설과 화장실도 있어 물놀이 부담도 없다.


역시 해외에 있어도 한국인은 어쩔 수 없는 걸까.전날 새벽 3시까지 일을 했더니 몽롱하다. 안되겠다 싶어 30분쯤 낮잠을 자기로 했다. 바닷 바람이 선선히 불어 와 눈을 살짝 감았다 싶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친구가 조용히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나들이 나온 현지인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
귀여운 아이의 뒷모습. 말레이 여성들은 물놀이를 할때도 저렇게 뚜둥을 쓰고 온몸을 가려야 한다
감탄이 나오는 바다와 하늘

"어..? 나 오래 잤어?"

"아니, 한 30분? 이제 괜찮아?"

"응, 땅과 물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서 그런가...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네?"


나무그늘 아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여전히 그림이다. 신이 아니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오늘은 좋은 날이다. 별거 있나. 이런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그걸로 좋은 순간, 좋은 하루, 좋은 인생이다. 감사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좋고, 감사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있어 또 다시 감사하다.


문득, 한국에서의 나날들을 생각한다. 왜 그렇게 바쁘게만 살았을까. 서둘러 달리는 법밖에 몰랐을까. 운동도, 독서도, 영화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내겐 사치 같았다. 매일같이 피곤에 절어 출근하고 퇴근하며 남는 시간엔, 불평으로 가득 젖은 술을 들이키거나 모자란 잠을 자기 바빴다. 아무리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고, 늘 우울했다. 이렇게 사는게 정답일까 생각하며 하루 하루가 지나 한달이 되고, 1년이 되고, 10년이 됐다. 극심한 피로로 흉추가 골절됐다. 답도 없는 것 같은 공황장애를 10년이나 앓았다.


허나, 나는 언제나 답을 알고 있었다. 다른 삶의 갈래길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을 하지 않은 건 나였다는 걸. 바쁘게 사는게 자랑인줄 알았다. 누구보다 높은 매출을 올리고, 바쁘다며 점심을 거르고, 밤낮없이 일하는게 나를 증명할 유일한 법인 줄 알았다. 그렇게 받는 인정이 사랑과 관심이라 착각하면서 나를 '갈아마시고' 있었다. 끝없는 갈증. 나를 좀 더 사랑해 줄걸. 후회하면 뭘하나. 지나간 과거를 흘려보내지 못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사는 삶이 가장 '바보같은 삶'이란 걸,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다행일 뿐이다. 내 마음대로 어찌 할수도 없는 날씨 걱정은 버리고, 맑고 화창한 행복을 '바로 지금' 마음껏 즐기는 게 현명하다.

랑카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오리엔탈 빌리지' 테마파크처럼 잘 꾸며 두었다.

랑카위에 있는 704m높이의 봉우리를 오를 수 있는, 스카이캡으로 향했다. 오리엔탈 빌리지에서 출발하는 이 케이블카는 사실 이번이 세번째지만, 언제 올라도 만족스런 경험을 준다. 예쁜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가족단위 관광객이 좋아할만한 음식점, 체험관, 물고기가 그득한 연못 등, 다양한 볼거리를 품고 있다. 잔뜩 기대하며 케이블카 탑승권을 사려는 차에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비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에...? 갑자기 또 비가 오네? 딱 30분만 기다려 보자. 출출한데 뭐라도 먹고 있으면 아마 곧 그칠지도 몰라"

"그래? 배는 별로 고프진 않은데.. 그럼 뭐 먹을까?"

말레이시아 현지인들이 즐겨먹는 사태Satay와 로띠 차나이Roti Canai. 그리고 언제나 빠질 수 없는 떼따릭Teh Tarik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푸드코트에서 사태와 로띠 차나이, 떼따릭을 시켰다. 사태는 우리나라 음식으로 보면 이자까야에서 파는 꼬치와 유사하다. 닭고기, 소고기, 양고기로 재료 다양한데, 역시나 한국인에겐 닭고기가 가장 무난하다. 로띠 차나이는 버터를 발라 철판에 구운 호떡과 비슷한데, 커리, 매운맛 소스 등에 찍어 먹는다. 단, 칼로리가 어마어마하니 다이어터들은 조심해야 한다. 인심이 넉넉한 편이라, 한장만 먹어도 속은 금방 든든해진다. 떼따릭은 말레이 사람들이 언제나 입에 달고 사는 음료 중 하나인데, 마치 와인을 디켄팅하듯 찻 주전자를 높이들어 '당겨(Pull, 따릭Tarik)' 따르면서 달달한 거품을 만들어내는 밀크티(Teh)라 하여, 떼 따릭이라 부른다. 적당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피로회복엔 그만이다. 우리돈 4천원에 이 모든것을 먹을 수 있다니, 먹는 인심만큼은 정말 후하다. 나의 메뉴 선정이 꽤 괜찮았던 건지, 옆 테이블 가족이 우리가 먹는 걸 지켜보다가 '같은 걸로'를 외친다. 친구가 좋아했으면 그만이다

케이블카를 타기전에 만난 꼬마들.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어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배를 좀 채우고 나니, 역시나 30분 동안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어두컴컴한 구름과 함께 사라지고 없다. 서둘러 케이블카 입장권을 끊고 랑카위의 가장 높은 하늘로 향한다. 말레이시아 돈으로 55링깃(약 15,000원, 1링깃 275원 적용)이면 일반 케이블카의 성인용 이용권을 살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스카이 브릿지, 스카이 글라이드 등 입장권을 또 따로 끊어야 한다. 왜 그럴까 궁금했었는데, 아마도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라 추측해 본다. 케이블카를 타기 전 스카이 브릿지 이용권을 사봤자, 올라가서 쓸 수 없으면 무용지물일테니 말이다. 이런 부분에선 '패키지 이용권'보다는 충분히 합리적인 것 같다.

랑카위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는 '스카이캡Skycab'을 타고 정상에 오르면 숨이 탁 트이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탄식이 절로 나온다. 분명 숨막힐듯 파란 바다와 하늘을 보면서 올라왔는데, 산꼭대기의 서늘한 기온 때문인지, 이미 스카이 브릿지엔 안개가 자욱하다. 조금만 멀어지면 친구 얼굴도 안 보일 것만 같다. 비가 오려나. 660미터 높이의 글래스 브릿지 위에서 열대우림과 푸른 바다, 99개의 군도를 내려다 보는 재미가 바로 이 스카이캡인데. 실망은 이르다. 이렇게 자욱한 안개가 시원한 바닷바람에 날려 순식간에 거치길 기다려보는 것도 여유를 가진 여행자가 기대해 볼 수 있는 행운이니까.

글래스 브릿지에는 바닥을 투명한 강화유리로 만든 구간도 있어서, 발밑을 바라보는 아찔함을 만끽하는 재미도 있다.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맑아진 하늘. 울창한 열대우림과 바다, 뭉게구름이 가슴에 맺힌다.
저 멀리 보이는 스카이브릿지. 85미터 짜리 단 하나의 기둥으로 만든 곡선형 글래스 브릿지가 하이라이트.
이 높은 곳에도 원숭이가 산다. 어쩌면 내가 억지로 너의 터전에 들어온 것일까.

역시나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5분 정도 기다렸더니, 어느새 다시 맑아진 하늘. 덕분에 발밑으로 펼쳐진 장관을 즐길 수 있었다. 랑카위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거리 중 하나인 스카이캡은 꼭 들러보길 추천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며 발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열대 우림도 그렇거니와, 유명한 세븐 웰스 폭포Seven Wells의 모습도 함께 눈에 담을 수 있으니까.

훌륭하고 깔끔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스카이캡
6명씩 탑승하는 케이블카에서 만난 말레이친구. 블랙핑크를 사랑한다며 '붐바야'를 춰준 귀요미. 블랙핑크 팬끼리 셀피를 찍자고 하니 수줍게 응해줬다. 오빠가 더 사랑해 블핑이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근처의 뜰라가 하버 파크Telaga Habour Park의 식당에 갔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고, 근사한 말레이 현지 음식을 친구와 함께 먹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 들르게 된 Tapaz 레스토랑 (랑카위 10대 현지음식 레스토랑, 트립어드바이저 기준). 뜰라가 하버 마리나Telaga Habour Marina를 바라보고 위치해 있어, 분위기도 무척 근사하다. 때문에 랑카위의 다른 식당들 보다는 음식값이 약간 비싸긴 하지만, 맛과 분위기는 만족을 준다.

저 많은 예쁜 보트는 누구의 것일까.
해산물이 저렴하고 무척 신선한 랑카위인지라, 친구가 무척 먹고 싶어하던 타이거프론, 깔라마리, 시푸드 수프를 주문했다.
꽤나 잘 정비된 느낌을 주는 뜰라가 하버 파크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20년을 알고 지낸 친구라 모르는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보내며, 나이테를 품는 나무처럼 각자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모습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인지 각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나이가 됐구나. 우리는 그동안 어떤 모양의 나이테를 품으며 살아왔을까. 서로의 앞날이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해외에 나와 있는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맙다. 한국에서 숨가쁘게 일하다 모든 걸 내려두고 쉬고 싶다며 랑카위에 찾아온 친구도 그토록 좋아하는 식물들과 함께하며,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랑카위의 체낭 비치. 그만큼 관광객도 가장 많이 모인다.

인생은, 내맘대로 되는 게 없다. 그게 삶이다. 모든게 내맘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은, 또 그런 삶은 얼마나 지루할까. 도전도, 성장도 없는 그런 삶. 1년 내내 맑은 날만 있다면, 땅 위의 생명은 말라 죽어버릴 것이다. 반대로 1년 내내 우중충한 날들만 있다치면, 나는 아마도, 내 마음이 오그라드는 걸 참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맑은 날만 있기만 바라는 건 욕심이다. 여행 내내 맑은 날을 바란다해서, 내 마음대로 얼굴을 쉽게 보여주던 태양이던가. 흐린 날도 흐린 날대로, 맑은 날도 맑은 날대로, 그 나름의 의미와 쓰임이 있다. 흐린 날도 겪고, 맑은 날도 겪어야, 우리는 언젠가, 각자의 뚜렷한 나이테를 품게 될 것이다.


흐린 날엔 한 템포 늦추고 내려놓는 마음가짐도, 맑은 날엔 맑은 날대로 즐길 줄 아는 긍정의 힘도 적절히 섞여야, 더욱 '자연'스럽다. 때론 내맘대로 되는 것이 없다해도, 그래서 인생이다. 안단테, 알레그레토, 크레센도, 데크레센도가 적절히 섞여야 아름다운 음악도 탄생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 인생이란 악보에 어떻게 음표와 기호를 찍어낼지만, 내 손끝에 달렸을 뿐이다. 지금의 이곳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흘러가는, 랑카위라는 '참 듣기 좋은 악보' 덕분일테다.

체낭 비치의 인기 좋은 카페, 옐로우 비치 카페 Yellow Beach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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