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인의 청춘 Oct 23. 2018

팀장전설

26명의 팀장, 26개 에피소드. 분명, 당신이 알만해서 슬픈 이야기들

A "나는 관대하다" - 단, 나에게만 관대하다.

그는 언제나 자리에 없었다. 보통 사우나를 갔다거나, 어제 과음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라고 했다. 가끔 산더미같이 밀린 일로 야근을 하고 있으면, 거나하게 취해 사무실에 다시 들어와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이 새끼들은 능력들이 없어서 야근한다'며 고함을 치곤했다. 아침 일대일 보고를 할 때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언젠간 점심시간에 술을 마시고 들어와 옆부서 직원을 때리고 의자를 집어 던진 적도 있었다. 그는 가끔 기준이 없이 관대했지만, 그외의 시간들엔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직원들은 언제나 그의 눈치를 봐야했고, 그는 언제나 왕처럼 군림했다.


B "질투는 나의 힘" - 니 공은 다 내 공

그는 언제나 자기에게 좋은 일에만 욕심을 냈다. 칭찬받기 좋은 일, 나를 드러내기 좋은 것, 그런 것에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요즘 무슨 생각하세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이디어가 너무 좋으셔서 여쭤봐요", "고생 많으시죠? 어떤 일 때문에 힘드세요?"라고 바빠 죽겠는데 죽자고 붙잡고 늘어지며 대화를 하자고 했지만, 언제나 그건 '아이디어 사냥' 때문이었고, 모든 얘기들이 그의 입 밖으로 나갈 땐, 모두가 "**팀장은 참 열정적이고 아이디어가 넘쳐"라며 칭찬을 이어갔다. 정작 그의 밑에서 성장하려는 직원은, 언제나 그에게 짓밟혔다. 그는 "OO씨 없으면 저 진짜 못살아요"라고 언제나 배시시 웃었지만, 결국 모든 직원을 다른팀으로 보내거나 제발로 나가게 만들었다. 그렇게 본인이 아낀다며, 연신 고맙다 고백하는 자기 부하 직원이 '정말로' 잘되는 꼴은 두고 볼수가 없었기 때문에.


C "범죄도시" - 원래 이런거야. 다들 그러고 살아.

그는 오랜 세월동안 윗사람들의 더러운 점을 모두 보고 겪으며 알고 있었지만, 자신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대신 본인에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나름대로의 '살생부'를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닌다고 했다. 혹에나 누가 자기를 자르려고 하면 모두를 잘라버리겠는 말을 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모든 이메일 끝자락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얀 글씨로 "위 내용은 모두 *** 상사가 시켜서 억지로 적는 내용이다"라며, 마우스로 드래그를 해야만 보이는 한줄을 달아 두었다. 자신을 승진시켜 준 윗사람에게 본인이 나서서 모든 허드렛일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가장 충성스러운 듯 보였지만, 가장 더러웠던 사람. 그의 세상은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되는 '범죄도시'였다.


D "내 눈엔 다보여. 나도 해봐서 알거든" - 개미같은 것에 간섭하시면, 개미들은 다 죽어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에 강한 그. 그는 언제나 스토리를 지적하지 않고 '오타'만 지적했다. 제일 중요한 자료의 논리를 말하지 않고, 자간과 장평을 지적했다. 굳이 필요없는 자료를 만들라고 짧게 시간을 주고는 안절부절 못하겠는지, 모니터 뒤에 붙어 서서 "그 사진은 오른쪽에 두는 게 낫지 않나?", "그 글씨는 빨간색이 좋지 않나?". "미흡이란 단어는 왠지 우리가 일을 잘 못한것처럼 느껴지는데 '미흡'말고 '난항'은 어떨까? 외부 원인 때문에 잘못한거 같이 들리는게 좋지 않을까?"라고 훈수를 두었다. 내 눈엔 잘못된게 다 보인다고 말하던 그는, 언제나 윗사람에게, 그가 작성한 이메일 속 '오타' 때문에 깨지곤 했다. 큰 그릇이 되려면, 큰 생각으로 놀아야 한다. 개미들에게 그렇게 죽자고 간섭하시면, 개미들 다 죽는다.


E "지영씨, 우리 단둘이 밥 먹자" - 네, 콩밥 드세요.

그는 술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 술을 왜 그렇게 마셔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옆부서 여직원의 손을 잡았다든지. 느닷없이 옆에 있던 같은 팀 여직원 어깨를 깨문다든지. 보조개가 이쁘다며 뽀뽀를 하질 않나, 침대 위에서도 안 통할 법한 더러운 농담을 한다든지. 굳이 남자직원에게 키스를 한다든지. 중요한 부위를 만진다든지. 그런 더럽고 추잡한 것들만이 그의 '주류' 주사였다. 변태였다. 정신이 멀쩡할 때 그가 하는 거라곤 '리스크'를 줄이자는 의미에서 - 정말 1도 의미없는 - 시뮬레이션 뿐이었다. 시뮬레이션을 6개월을 하고도, 제대로 된 의사결정은 한 번도 내리지 못하는 그였다. 그런 사람이 술만 마시면 어찌 그리 과감할 수 있었는지. 애꿎은 여직원들이랑 밥 그만 드시고, 콩밥 많이 드시길.




F "월화수목금금금" - 제가 이렇게 충성합니다 회장님.

HR을 담당했던 그였다. 사내 업무 문화 개선을 담당했지만,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모두가 궁금할 정도였다. '일을 위한 일'을 하는 회사 분위기 때문에 직원들 불만이 쌓여가니, 그에게 대표로 1개월의 휴가명령이 내려졌다. "네!"하고 우렁차게 대답한 그는 자그마치 30일을 연차를 냈는데 - 그의 연차는 자그마치 46일이었다 - 결국, 회사 앞에 고시원을 잡았다고 했다. 아침, 점심, 저녁마다 구내식당에 들러 밥을 먹고, 상사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으며 인사를 했다. 상사들은 그가 대단한 '열정남'이라고 했다. 그가 업무 문화 개선에 대해 아는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가족도, 여유도, 휴가도 모르는 바보천치. 혹시 죽으면 무덤도 회사 옆에 파고 싶어 했을까.


G "스마트폰 좀 켜봐" - 내 욕한거 아니지?

회사 내부의 일들을 익명으로 게재하는 블라인드앱이 한창 유행이었다. 유독 그팀만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사무실을 빙빙 돌며 순시를 했다. "김대리, 스마트폰 좀 켜보지?", "박과장, 요즘 직원들 별일 없나? 잠깐 스마트폰 좀 열어봐?". 비논리, 비도덕, 비인간적 행태로 유명했던 그는, 직원들이 익명으로 혹여나 자신에 대한 욕을 쓰지 않았는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그의 악행과는 아랑곳없이, '누가 자기 욕을 하지 않나'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설령, 욕하지 않았으면 다리라도 뻗고 잤을까. 이미 직원들에겐 당신을 향한 일말의 존경심도 남아있지 않는데.


H "내가 제일 잘 나가" - 빰바라빠빠빠 라빠빠빱빠 오마이갓.

모든 게 잘난 그. 그는 언제나 '다시 생각해봐'를 입에 달고 살았다. 브레인스토밍을 해도 그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야했고, 아이디어를 내고 나면 언제나 "내 아이디어가 제일 좋지?"를 묻고 또 확인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그 무한한 자신감이 팀원들을 말려 죽이고 있다는 건 몰랐다. 아무리 쉬운 일에서도 그는 팀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법이 없었다. 조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그의 '잘남'은 언제나 팀원들의 사기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시간이 흐르고 그의 앞에서 굳이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눈치껏 대충 기다렸다가, '오~팀장님 의견 너무 좋은데요?'하면 다였으니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중요한 회의들을, 적극적인 의견 수렴도 없이 대애충, 쉽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I "예스맨" - 아 네네네네네네네

그는 아들 둘이 대학에 가게 되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뭘하는지 모르겠지만 죽어라 일했다. 산책 한번하고, 커피 한잔 마시는 걸 본적이 없다. 윗사람이 시키는 모든 '거지발싸개' 같은 임무들을 모두 들고와 팀원들에게 뿌렸다. 내일 오전까지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윗사람이 그 자료가 매우 중요한것 같이 얘기했으니 신경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윗사람이 낙하산, 바보, 멍청이라는 걸. 다만 그는 아무것도 거스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고, 그 모든 짜증과 스트레스를 팀원들에게 1/n, '엔빵'해줄 뿐이었다. 그저 자기 이쁜 자식 둘이 대학에 가야하기 때문에. 그런 무언가의 이유없이 일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무엇이든 "예쓰"라고 말하는 그의 두 아들을 위해, 방패 없는 직원 7명은 매일 야근을 해야했다.


J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 하하하하하 x 37.

그는 자신이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눈빛이 돌변하면서 화를 냈다, 웃었다, 그야말로 '지랄'이었다. 자격지심이 강했는지, 굳이 자신의 왜소함에 비해 자신의 '물건'이 얼마나 큰지를 서슴없이 화젯거리로 읊어댔고; 자기랑 침대에 누웠던 여자 얘기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와 얘기를 나눌때마다 귀가 썪는 느낌이었다. 그룹채팅방에서 그는 언제나 음담패설을 '복붙'해 실어 날랐고, 37명의 직원들은 눈코뜰새없이 바쁜 와중에도, "하하하하하, 팀장님 재미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했다. 숫자 1이 없어지지 않으면, "***씨는 내 얘기가 재미없나봐?"라고 물었다. "내일 일 좀 더 시켜야겠어. 참 진지한 사람이니까 말이야."라고 말했다.




K "상무님이 힘드신가봐" - 저기요, 저희는 죽어가는데요?

그는 언제나 상무님, 상무님, 하며 상무님을 챙겼다. 주말에 상무님과 골프를 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며, 자네들도 내 위치가 되면 힘들거라고 했다. 상무님이 힘드시다고 말하며, 상무님을 편하게 해드리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며 직원들을 달달 볶았다. 상무님이 지시하지 않은 일들까지 만들어내서, 주말특근, 야근을 시키는데 능숙했던 그는, 직원들이 힘들다 말할때마다 "상무님이 더 힘드시다"고 말했다. 나는 안다. 상무님은 1도 힘들지 않았다. 상무님은, 방에서 "책상에 발을 올리고 자는 것", "대낮에 술마시는 것", "시도때도 없이 골프치는 것", "직원들 개인사 캐묻는것" 이외에 할 줄 아는게 1도 없었기 때문이다.


L "자네, 옛날에 내가 정말 미안했네" - 렬루?

그는 언제나 착한 척을 했다. 자신이 피해자인양 코스프레를 했다. 그와 함께 하는 모든 팀원들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 물론 그도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끝도 없는 '일을 위한 일'을 던져주면서, 그는 언제나 야근을 했고, 팀원들에게 주말 특근을 시키는 게 다반사였다. 그가 던져 준 일 때문에 주말에 회사에 나오면 항상 그는 "어, 왔어?"라며 인사를 하며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언제나 그와 토요일, 일요일 점심을 함께 했다. 세월이 흘러 '자네, 옛날에 그렇게 일을 시키는게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했네'라고 진짜 뜬금없이 사과를 하길래, 대체 무슨 일로 이럴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새로 도입된 360도 직원 평가 때문에,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정말 미안했었나요? 렬루?


M "내 아들을 걸고 다시는 그런 짓 안 할게" - 이제 아들 좀 더 컸으니, 이번엔 제대로 걸고 사과하세요.

이번이 몇번째일지 셀수도 없는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다. 제발 시간을 내서 술을 먹어달라고 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다음에 얘기 나누면 안되냐고 했더니, 꼭 오늘해야 한다고 했다. 숨막혀 죽을 것 같은 불편한 분위기를 이겨내고 약속 장소에 갔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뼈를 깎는 기분으로 반성한다며, "내 아들을 걸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한다고 했다". 무릎을 꿇고 울었다. 팀장이 내 앞에서 운게 처음이었다.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심했다 그는. 두달 뒤 꿇을 무릎도, 흘릴 눈물도 없었는지,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했고, 나는 바로 사직서를 냈다. 그의 아들은 아빠가 그런 더러운 일들에 자신을 내걸었다는 걸, 과연 알고는 있을까.


N "너 나가도 갈데 없을걸? 후회하지 마" - 당신도 이제 갈데 없으신 거 잘 압니다.

그는 나보고 비겁하다고 했다. 말도 안되는 일들을 꾹 참고 회사를 나갈 게 아니라, 잘못한 사람들을 똑똑히 지켜보면서 제대로 처단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짬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해결하냐고 되물었더니, 그건 매우 비겁한 태도라고 했다. 나는 그런 당신이 비겁하다고 했다. 힘도 없는 내가 이 모든 고통과 절망을 몇개월간 열변을 토하며 얘기했을 때,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무엇을 했나, 당신을 포함한 그 모든 더러운 사람들이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고 몇번을 말했는데도, 당신은 왜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물었다. 대뜸 '너 나가도 갈데 없을걸? 우리 회사가 얼마나 좋은 회산데, 너만 잘난 줄 알지?'라고 물었다. 나는 이제 '그 잘난 회사에서' 그가 갈데가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O "업무 제외시켜줄테니 춤연습하세요" - 인생에서 제외 시켜드릴테니 사람 연습하세요.

높으신 분이 오랜만에 오신다고 했다. 그러니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춤을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그가 보낸 공지 메일에는 "업무에서 1개월간 제외시켜주고 합숙을 시켜줄테니 춤을 제대로 연습하라는 정성스런 문구도 적혀" 있었다. 업무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 물었다. 하지만 높으신 분을 실망시킬 수 없고, 듣기로 회사에서 네가 춤을 제일 잘 추기로 소문이 나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건 인권침해라고 느껴진다고 했다. 노동부에 신고한다고 했다. 다른 한명이 다시 차출되었다고 들었다. 정말 놀랐다. 우리 회사가 언제부터 맡은 업무를 1개월 동안 안해도 전혀 문제 없이 돌아가던 그런 회사였던가. 아니, 진짜 그래도 되는 거였으면, 그동안 일은 왜 그렇게 시킨거야?



P "됐고, 듣고 싶은 얘기만 해" - 뭐하러 물어보셨어요?

그는 언제나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말을 칼같이 잘랐다. 일본 300년 전통의 스시집 칼날보다 날카로웠던 것 같다. "아아아아, 그거 다 아는 얘기고". "아 뭐 새로운거 없어?", "됐고, 듣고 싶은 얘기만 해." 녹음기를 튼 것 같은 그의 말들엔 진심도, 호기심도 없었다. 멸시와 무시 밖에는. 대체 그럴 거면 왜 물어봤을까. 듣고 싶은 얘기를 카톡으로 미리 보내고 그냥 읽어달라고 하지. 그냥 "시리야, 나 칭찬해줘"라고 했으면 좋겠다. "오케이 구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읊어봐"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독심술가가 아니니까, 듣고 싶은 말을 맞혀 보라고는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듣기 싫은 소리만 해주고 싶어지니까.


Q "누구는 엄마 없나?" - 그러는 너는?

그는 언제나 팀원들의 연차를 쓰지 못하게 했다.요즘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툭하면 연차를 쓴다고 투덜거렸다. 엄마가 아프시다는데 자꾸 어머니 아프시다는 말 같지 않은 이유로 연차를 쓰지 말라고 했다. 수술이 위험해서 위독하시다고 말했는데, 자기가 듣기에 뭐 오늘 돌아가실 거 같진 않으니, 오늘은 회사를 업무를 더 하라고 했다. 정말 심각하게 아프시다고 했더니, 그 나이되면 원래 다들 심각하게 아프시다고 했다. 굳이 오늘 내일 하시는 거 아니면 이런 식으로 연차는 쓰지 말라고 했다. "참나, 누구는 엄마 없나?"라고 물었다. 이보세요, 그러는 너는 엄마 없으세요?


R "지각하는 사람 연차를 까도록" - 아니, 그러는 님은 왜 지각하셨어요?  

요즘 직원들이 부쩍 나태해진것 같다고 했다. 일할 시간이 모자라서 점심시간에 점심을 못먹는 직원들을 앞에 두고. 그는 '안빈낙도'가 인생의 꿈이라고 말했다. 요즘같이 한가하면 회사 다닐맛 나지 않느냐고 했다. 오늘은 전화가 한통도 오지 않아, 너무 신나는 하루였다고 했다. 모두가 야근을 할 때, 5시 59분이면 집에 가는 그였다. 어느날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면서, 앞으로 지각하는 사람은 연차를 까겠다고 했다. 나태한 직원들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회사에서 최초로 연차를 깐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난 지금도 그가 왜 지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S "응, 난데, 보고서 가지고 들어와" - 저기요, 공부는 스스로 하세요.

그는 책상에 보고서를 쌓아두고 살았다. 흡사 보고서와 연애라도 하는 양, 그 로맨스가 꽤나 달달해 보였다. 소름끼치는 건, 그가 언제나 지난 보고서를 500-600장 정도 쌓아둔 상태에서도, 자신이 다시 참조하고 싶은 보고서만 손톱으로 기가 막히게 뽑아냈고, 그건 마치 데이비드 커퍼필드가 그 수많은 카드 덱을 100개 정도는 쌓아 두고도, 단 한장만 들어있을 컬러풀한 조커를 눈감고 뒤로 돌아 뽑아내는 듯한 신공이었다. 그가 왜 그렇게 보고서에 집착했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일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 굳이 원페이지로 보고서를 만들라고 하고선, 뒷받침 자료를 스무 페이지씩 받았다. 모두 그에게 보고하러 갈땐 "나 과외 좀 하러 갔다올게"라고 말했다. 저기요, '자기주도학습' 뭔지 모르시나요? 뭐, 그래요. 그걸 아실 리가.


T "우리 팀이 영어 성적 평균 1등해야 내가 승진해" - 당신이 1등으로 회사에서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전 대통령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돈독한 고향 친구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인지 능력과 감성 지능은 아메바 수준이었지만, 그는 마치 토르처럼 회사 곳곳을 정복하고 단숨에 회사 끝까지 올라갔다. 일을 잘할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그는 유독 번외의 것들로 승진하고 싶어했다. 그는 대놓고 영어 성적 1위를 해야 자신이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니, 앞으로 매일 점심 시간마다 영어 공부를 하라고 했다. 밥은 도시락을 먹든, 김밥을 먹든, 예산이라도 대줄테니, 토익 공부, 스피킹 공부를 하라고 했다. 토익 990점이었다는 이유로 나는 점심을 거르며 영어를 가르쳤고, 그는 그렇게 승진을 했다. 1등으로 회사에서 나가주길 바랬던 그보다, 결국 내가 먼저 회사에서 나오고 말았지만, 그는 이름도 모르는 자회사를 돌고 돌며, 베짱이 한량처럼 살다 다시 본사로 컴백해, 또 다시 승진을 했다. 와, 만세.



U "우리 애가 수학이 좀 약해" - 님은 사리분별 분야에 특히 약하신거 같은데요.

그는 일에 여유가 생기면 나를 붙잡아 놓고 학창시절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를 물었다. 우리 애가 수학이 유별나게 약하다고 했다. 미분인가 적분인가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런 그가 미적분이 뭔지 알면서 나에게 묻는지도 알 수 없었다. 퇴근하고 시간이 나거나, 주말에 시간이 있으면 와서 우리 애 수학 좀 봐달라고 했다. 봐주는 김에 언어도 잘 못하니까, 같이 좀 봐주고 가족같이, 형같이 조언 좀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런 가족이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은 정말 가"족같다." 사리분별 분야에 특히 약하셨던 그분은 결국, 모니터 잠금화면에 포르노 사진이 뜨는 바람에 진급에서 누락됐다.


V "테이블당 4인분씩 먹으면 뚜껑 닫아" - 그 입 좀 닫으세요.

매출 맞추느라 고생들이 많다고 했다. 오늘만큼은 양껏 먹으라고 했다. 장정들이 앉은 삽겹살집은 언제나 고기 1근이 1그램 같다. 한창 먹고 있는데, 고깃집 직원들이 갑자기 숯불을 거두어 갔다. "불을 왜 빼시죠?"라고 물었더니, "테이블당 4명이면 4인분만 드시는 거세요 - 문법에 맞지 않는 이 말처럼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것도 없다- 란다. "네?"라고 물었더니, 이미 그렇게 주문이 되어 있고, "배가 고프신 분들은 공깃밥을 시켜 드시면 되세요."라고 했다. 정말 고생들이 많다고 했다. 오늘만큼은 양껏 먹으라고 했다. 대패삼겹살 그렇게 쪽팔리게 주문하느라 정말 고생들이 많았다. 자고로, 직원 귀한 줄 모르는 회사가, 잘되는 꼴을 본적이 없다. 차라리 회식을 하지 마시고 품격을 지키시지.


W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 그런 말 자꾸 하시면 진짜 무시당해요.

그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허나, 누가 봐도 그는 별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을 위한 일을 하는 그는, 실속이 없는 만큼 말만 많았다. 언제나 자신을 대변하기 위한 편법으로만 하루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의견을 한번 내라고 하면 한시간이 넘도록 지난주, 지지난주, 지지지난주, 지지지지난주에 했던 얘길 각색해서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그게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다거나 진행사항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달라고 말하면,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라고 되물었다. 그는 과연 언제 "나를 무시하는지"를 묻는게 맞는건지 타이밍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질문 자꾸하면 정말 무시당해요. 그럴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세요, 제발.


X "자 노래방 왔으니까 소녀시대 좀 춰봐" - 천번을 더 추면 절 놓아주실 건가요.

멋모르고 노래방에서 억지로 춤을 추라길래 그 당시 유행하던 소녀시대 춤을 따라 춰줬더니, 정신을 못차리고 좋아하더라. 그 후로 나는 노래방, 소위 가라오케에 갈때마다 오프닝으로 소녀시대 춤을 춰야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그는 아까 했던 소녀시대 춤 다시 한번 추라고 했다. 웬걸, 날로 실력이 늘었다. 그도 그럴것이 일주일에 4번 회식을 하는 팀이었다. Practice makes perfect. 피나는 연습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 그가 다른 부서에 소문을 내는 바람에 나는 다른 팀 회식에 가서도 소녀시대 춤을 추어야 했다. 천번을 추고, 이천번을 췄으면 지겨워질까. 장담컨대, 이제 그는 내가 그런 춤을 췄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Y "집에 돈도 없는데 퇴사해도 되겠어?" - 정신도 없으신데 인재 관리 잘 되겠어요?

HR 담당이었던 그는 퇴사를 하겠다고 말하던 나에게 "보아하니 집에 돈도 없는데 퇴사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HR부서에서 '끝빨'있다고 인정받던 그였다. 그가 과연 HR의 Human Resource가 뭔지 아는지 궁금하다. 우리 집에 돈이 없으면서도 이런 회사를 다니는 게 문제였다면, 애초에 내가 돈이 없고 빽이 없다고 아예 뽑아주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나는 분명 다른 '좋은 Human Resource'가 되어, 그 같은 인간은 안봐도 되는 곳에서 훨훨 날았을텐데. 참고로, 이런 HR 담당자가 있는 회사에서 '인재(人材)'가 되는건, 그야말로 '인재(人災)'다.  


Z "우리 회사 참 좋은 회사야!" - 팀장님 사무실에서 코고는 힘도 좋아요!

그는 우리 직원들이 참 열심히 일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누군 **가 좋고, 누군 **가 훌륭하다고 했다. 우리 회사는 참 좋은 회사라고 했다. 항상 싱글벙글 웃는 그는 아무런 걱정도 없어보였다. 사실 그는 우리 회사가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겐 이렇다할 R&R(Role & Responsibility)이 없었다. 오전엔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우고, 오후엔 그가 제일 자신있어 하는 '노가리'를 까다가 나른한 시간이 될 때, 대자로 뻗고 누워 코를 고는게 그의 일상이었다. 건물 반대편 복도에서도 그가 코를 곯며 자는 소리가 다 들렸을 정도라고 하니, 그에겐 낮에도 코곯며 잘수 있는 우리 회사보다 좋은 곳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직장'이라 말할 수 있는 곳에서 비록 11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에피소드를 단 1분도 쉬지 않고 써내려갈 수 있는 세월을 보낸 것이 정말로 한스럽고, 더 나아가 가끔은 무지 한심스럽다. 단순하게 26개인 알파벳으로 글을 시작했기 망정이지, 다양성으로는 둘째라면 서러울 한글의 모음과 자음으로 쓰기 시작했으면, 이중모음에 쌍자음에 받침까지 써서도, 줄줄 새어나오는 이야기를 끝낼 수가 없었을 거란 걸 알고 있다.


이렇게 허섭한 팀장'님'들을 '리더'라는 이름으로 소위 '뫼시고', '겪고', '보고', '듣고' 나서 얻은 결론은 단순하다. 첫째, 이런 상사를 만나는 곳에서는 단 하루라도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것, 둘째, 이런 수많은 일들을 겪을수록 반면교사의 교훈이 더욱 명확했다는 것, 셋째, 내가 훗날 팀장이 되었을때, 27번째 '팀장전설'이 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배우고 노력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갈고 닦아, '기꺼이 따르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게 언제나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팀장이 되긴 어렵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주는 세상도 아니니까. 다만, 세월이라는 갑옷을 입고, '윗사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도록 후배에게 조언이라도 해줄라치면, 적어도 '웃게 해주는 사람은 되고자' 하더라도 '우스운 사람'이 되진 말아야 되지 않겠나.


허섭쓰레기 - 가 표준어다 - 같은 팀장이 되지 않으려면, 신입사원일때보다 더 독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갈고 닦고, 끝없이 되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팀장이란 자리는, 리더란 포지션은, 올라 갔으니 쉬운게 아니라, 올라갈수록 부담스럽고 힘들어야 맞다. 내가 왜 그래야만 하냐고, 왜 그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되묻지 마라. 그러라고 월급 더 받는 거고, '팀장님'이라고 우대받으면서 '점심에 뭐 드시고 싶은지' 먼저 물어봐 주는 거니까.


팀장의 모든 것은 무거워야 옳다. 어깨도, 마음도, 입도. 머리도. 진짜로 당신을 승진시켜줄 사람은 당신을 납덩이처럼 누르고 있는 윗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아래에서 오늘도 묵묵히 당신을 무겁게 지탱해주는 당신의 '아랫사람'들이다. 누구에게 더 멋져 보여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비록 승진은 못할지언정, 자고로 리더라 자부한다면, 팔로워들에게 부끄러움은 남지 않아야 옳다.




* 모든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했지만, 일부는 각색되었고, 성별은 모두 '그'로만 표현했다.

* 정말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의아한 분도 있겠지만, 정말 모두 사실이다.

* 그래서 너무 슬프다. 손에 꼽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팀장님들을, 손에 꼽을 정도밖에 만나보지 못해서.

*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 세상에 정의가 남아 있다면, 그분들이 종국엔 반드시 잘되시길 바라며, 그분들을 위해서라면 내 피와 살을 던져서라도 모든걸 다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넘쳐난다.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 대부분의 부하직원들은 이런 마음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이제 당신만 모르고 있는, 당신만 잊어버린, 당신의 처음이다.

작가의 이전글 반딧불이 빛나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